거짓말 - (8)
뭐가 내일은 외식을 하도록 하지… 라는 거냐…
재중은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사람들을 보며 혼자 벽에 기대어 불만스러운 얼굴로 서있었다.
대개 외식이라고 그러면 최소한 분식집이라도 가는 거라고. 그런데 이건 도대체…
재중은 저 멀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윤호의 능숙한 태도를 보면서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전날 윤호는 외박을 했다. 넓은 침대를 혼자 쓸 수 있어서 정말 편하긴 했지만,
다음날 저녁보다 이른 시간에 들어온 윤호는 난데없는 몇 개의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 갈아입어. ”
전날 외식에 관한 얘기를 했었기 때문에 재중은 어디 굉장한 데라도 가는가보다,
하고 넙죽 그가 내민 옷을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슈트까지 걸쳤을 때는
정말 어디 무대에라도 서는 듯한 기분이었다. 슬쩍 가격표를 본 재중은 휘청하고 쓰러질 뻔했으나
겨우 벽을 붙잡고 심호흡을 했다.
“ 왜 그러지? 어디 안 좋은가? ”
자신도 역시 슈트를 갈아입으며 물은 윤호에게 재중은 겨우 고개를 젓고 말했다.
“ 치 치수를 잘 맞춰서 사오셨네요. ”
재중의 말에 윤호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
“ 안아보면 그 정도야 간단히 알지. ”
아아, 그래요. 재중은 갈수록 윤호가 마음에 안 들었다. 손님이니 억지로라도 좋아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좋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윤호가 전날 사주었던 초콜렛은 얌전히 냉장고안에 넣어져 있다.
아무리 선물이라고는 해도 덥썩덥썩 받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마침 옷을 모두 갈아입은 윤호가 재중을 향해 말했다.
“ 늦어지면 곤란하니까 어서 와.
아무렇지 않게 걷는 듯이 보이지만 긴 다리에 걸맞게 보폭도 어마어마하다.
삽시간에 저만치 멀어진 윤호를 기를 쓰고 달려가 쫓으며 재중은 생각했다. 예약이라도 해 두었나 보지.
얼마나 대단한 곳에 가길래… 윤호의 차를 타고 재중은 꿈같은 몽상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보니 고기를 먹은 지 벌써 얼마지. 간만에 몸보신 좀 하겠구나. 하긴 먹은 것도 부실한데
그렇게 피를 쏟았으니 양심이 있으면 먹여야지… 잘 먹여야지…
처음 윤호의 뒤를 쫓아 호텔에 들어온 이후 만 이틀동안 호화로운 룸서비스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직접 대접받는 것과는 다르지. 다행히 지난 밤은 무사히 넘어갔기 때문에 몸은 많이 좋아졌다.
오늘 먹여놓고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만약에 이만큼 먹었으니 저만큼 해! 라고 말하면 어쩌지. 꼼짝없이 그렇게…
“ 이봐, 내려. ”
언제나 그렇듯 내뱉는 듯한 말투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던 재중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어마어마한 대저택이 눈앞에 놓여있다. 이게 꿈인가… 생긴 건 분명히 집인데 도대체 뭐하는 델까…
재중이 입만 쩌억 벌리고 있는 새 윤호는 키를 그 집 사용인에게 맡기고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가, 같이 가요! ”
서둘러 뒤를 쫓으면서도 재중은 어리버리한 얼굴로 시종 주변을 살폈다. 앗, 저 여자는 드라마에서 본 여자다.
헉, 저 사람은 그 유명한 패션모델. 아앗? 저건 도대체 누구야? 절라 예쁘네…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재중을 향해 윤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 행여나 혼자 길을 잃고 헤매거나 하면 버리고 가버릴 거다. ”
웃, 하고 재중은 놀라 더 이상 한 눈을 팔지 않고 후다닥 뒤를 쫓아갔다.
“ 어머 어서 오세요 윤호씨. ”
홀의 한 중간에서 반색을 하며 다가오는 미인을 향해 윤호가 미소를 지었다.
“ 오랜만이군요. 건강히 지내셨나요? ”
미인은 자연스럽게 윤호의 목에 팔을 감고 키스를 하며 말했다.
“ 윤호씨를 자주 보지 못한 것 빼고는 모두 좋아요. ”
“ 저런, 제가 요즘 새로운 놀이에 빠져 있어서… ”
능숙하게 말을 받는 윤호에게 미인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 또 순진한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건가요? ”
에? 내가 처음이 아냐?
뒤에서 우두커니 서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재중은 화들짝 놀라 귀를 곤두세웠다.
윤호의 무심한 음성이 이어졌다.
“ 또, 라니오. 그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씀을. ”
“ 어머 사실이지 않아요? 당신은 정말 나쁜 남자라구요. ”
윤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 굳이 제가 원하지 않아도 쫓아오는 걸 저라고 해서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
잘났어 정말… 재중은 뒤에서 툴툴거리며 윤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래, 나도 그랬다. 좋겠수다 아주.
“ 뒤에 계신 분은 일행이신가요? ”
그 때까지 무시하고 있었던 주제에 미인은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 재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윤호는 고개를 돌려 놀라 눈을 깜박이는 재중에게 시선을 향하며 끄덕였다.
“ 말씀하신 그 순진한 아이지요. ”
“ 어머, 이번엔 상당히 어리군요 윤호씨. ”
신기하다는 듯 말한 그녀를 향해 재중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봐 당신, 난 남자라구. 상당히 어리군요,
라고 말한 주제에 전혀 이상하지 않단 말이야? 미인은 방글거리는 얼굴로 재중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 조심하도록 해, 윤호씨는 아주 위험한 남자니까. ”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고. 미인의 말에 대꾸하기도 전에 윤호가 재중에게 말했다.
“ 아무 거나 먹으면서 너도 놀도록 해. 갈 때가 되면 따로 부를 테니까. ”
그리고 윤호는 미인의 가는 허리에 팔을 두르고 성큼성큼 멀어져 버렸다. 물끄러미 뒷모습만 바라보던 재중은
어깨를 으쓱하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화려한 파티였다. 아마 잘 뒤져보면 어느 그룹의 누구,
어느 회사의 이사, 뭐 이런 사람들이 즐비하겠지.
“ 쳇. ”
재중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척척 걸어가 식탁으로 향했다. 그래, 밥이나 먹자. 배가 터지도록 실컷 먹어주지!
접시에 여러 가지 음식을 담고 한 쪽 벽에 가서 섰다. 여긴 앉아서 먹을 데도 없어.
불만, 불만.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드는 것뿐이다. 재중은 음식을 먹으며 윤호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의 모습은 어디로 보나 성공한 사회인, 바로 그것이었다. 도대체 윤호의 직업은 뭘까.
보니까 보통 회사원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잘해야 20대 후반일 텐데 기업체를 꾸리고 있지는 않을 거고.
…한 번 물어볼까…
어느 새 한 접시를 다 비우고 재중은 다시 식탁으로 향했다.
아까는 그나마 배가 고파서 아무거나 집어먹었는데 이제 배가 좀 차니 그나마 좀 골라먹게 된다.
저건 처음 보는 건데, 싶은 건 죄다 골랐다. 다시금 자신의 지정석으로 돌아와 음식을 먹으며
천천히 파티장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 어? 너 혹시 봉화물산 홍사장님 아들 아니야? ”
어라? 놀라 번쩍 고개를 돌리자 웬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반가운 듯 말을 계속했다.
“ 야아, 회사 위험하다고 들었었는데 괜찮은가 보지? 사장님은 어디 계셔? ”
평범한 인상이지만 웃고 있으니 친절해 보인다. 이 사람은 나를 봤던 모양인데 왜 나는 전혀 기억에 없는 거지.
재중은 어색하게 마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저, 저어… 아버지는 못 오시고 다른 사람이랑 함께 왔어요… ”
“ 어, 그래? ”
다행히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 야, 그건 그다지 맛이 없어. 이리 와, 내가 좋은 걸 먹게 해주지. ”
재중이 거절의 말을 하기도 전에 남자는 재중의 손을 잡아끌고 식탁으로 향했다.
“ 나는 이걸 아주 좋아해. 기름을 빼서 맛도 담백하고,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지. ”
맵시있게 썰어진 고기 몇 점을 올려주며 남자는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재중은 역시 마주 웃었으나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불편했다.
“ 여기, 물은 없나요? ”
계속 식사만 했더니 목이 메인다. 웨이터를 부르려하자, 남자가 말렸다.
“ 기다려, 나도 마침 목이 마르니까 같이 가지고 올게. 아까 거기 있을 거지? ”
“ 예… 고마워요. ”
빠르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재중은 참 친절한 사람도 다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슬쩍 윤호쪽을 보자 아직도 사람들이 줄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저렇게 즐기면 되는 거니까 괜찮겠지.
“ 기다렸지? 자. ”
약속했던 대로 벽에 기대어 서있던 재중은 남자가 가져다준 물을 건네받으며 감사의 말을 했다.
“ 고맙습니다. ”
“ 별 말을. ”
물맛이 조금 이상했지만, 아마 그것은 생소한 음식맛이 입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리라.
재중은 그리고 잠시 한 쪽 벽에 기대어 서서 음식을 먹으며 남자의 지루한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