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2)
내게 거짓말을 해봐…
문득 어느 영화의 광고카피가 떠올랐다. 등급판정불가로 꽤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그 영화.
실상 내용은 성행위보다도 폭력적인 부분이 더 많아 도대체 등급판정이 불가능했던 것은 성행위때문인지
폭력성때문인지 알 수 없었던… 왜 갑자기 그 영화가 생각났을까.
알 수가 없다. 재중은 운전석에 앉아 차가 출발하고 나서부터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는 남자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안경을 끼고 있어서인지 선이 단정한 옆모습은 무척이나 날카로워 보인다.
재중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을 다리 사이로 감추고 꼭 움켜쥐었다.
어쨌거나 오늘밤은 넘길 수 있는 것이다. 흔한 뒷골목 여관이라고 해도 마다할 처지가 아니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멋진 호텔정도 된다면 좋겠지만.
끼익.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차가 멈추고, 도어맨이 후다닥 달려와 문을 열어주었다.
재중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눈앞에 놓여있는 거대한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현기증이 난다.
여기, 귀빈들만 묵는다는 그 곳이 맞나? 외국의 유명한 연예인이나 정치가들이 자주 묵는 그 곳.
“ 어서 오십시오, 항상 쓰시는 방으로 드릴까요? ”
안으로 들어서자 맵시있게 정장을 갖춰입은 매니저가 나와 절도있게 인사를 하며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익숙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아아, 그래 주게. ”
그리고 그는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고, 재중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엉거주춤 그 뒤를 따라갔다.
아아, 오늘밤은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면을 바라보며 서있는 남자와는 대조적으로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서있던 재중은 생각을 덧붙였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무리한 건 원하지 않을 거야.
그래, 지적으로 보이고 꽤나 하이클래스인 것 같으니까…
하이클래스일수록 변태가 많다는 통계를 재중은 일부러 무시해버렸다. 통계는 통계.
다수가 그렇다고 해서 소수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일방적인 신뢰로 재중은 남자를 그 소수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멈추고, 보이가 방을 안내해주었다.
“ 편안한 밤 되십시오. ”
문을 열어주고 난 후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그는 남자의 뒤를 따라 재중이 방에 들어가고 난 후 뒤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한순간 재중은 남자와 단둘만이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소리가 나도록 삼켜버렸다. 침묵. 남자는 편안한 태도로 코트를 벗어 옷장에 걸더니
재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네 옷도 주지 그래. ”
재중은 얼결에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두툼한 학생용 반코트를 벗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 먼저 씻겠어? 아니면 같이 씻을까? ”
“ 콜록… ”
무심하게 중얼거린 그의 말에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다 사레에 걸려버렸다.
목에 습기가 가득 차 숨이 버겁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연신 기침을 해대자
남자가 넥타이를 벗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샤워를 같이 하는 것은 별도요금인가? ”
번쩍. 재중은 남자의 말에 서둘러 기침을 삼키고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 원하시는 대로 해드려요. ”
호기있게 말한 재중에게 남자는 셔츠의 단추를 풀며 빙긋 웃었다.
“ 서비스가 좋군. ”
아, 웃는 얼굴은 역시 멋지다… 하지만 또한 성격 정말 나쁘게 생겼다. 나, 아무래도 잘못 택한 것 같다…
자꾸만 불안해지는 가운데 재중은 다시금 마른침을 삼켰다. 남자는 셔츠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 그럼 처음엔 각자 씻고 끝나고 난 후에 함께 씻는 걸로 하지. ”
“ 별도요금이에요. ”
냉큼 덧붙인 재중에게 남자는 여유있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 물론 그렇겠지. ”
그리고 남자는 한 쪽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 저 쪽에 또 욕실이 있어. 씻고 나오도록 해. 난 성격이 급하니까 기다리게 만들지 마라. ”
“ 네 네에. ”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재중은 재빨리 욕실로 들어갔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다른 쪽의 욕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서두르지 않으면.
제대로만 하면 꽤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재중은 급히 옷을 벗느라 하마터면 욕실바닥을 구를 뻔했다.
놀라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겨우 삼키고 급히 벽을 짚는 바람에 별 일은 없었지만,
숨을 고르는 사이에 생각은 사방으로 튀어다닌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정말 몇 달전까지만 해도, 아니 아까 낮에만해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이렇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니, 믿을 수 없어. 이게 정말 현실인 걸까.
재중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서둘러 머리를 세게 내저었다.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다.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성격도 나빠 보이는데 거슬려서 좋을 건 없다.
이미 내친 걸음, 이 이상 더 나빠질 일이 있을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어.
재중은 이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피드로 샤워를 마치고 대충 머리를 감았다.
마음같아서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담고 여유있게 생각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비누를 씻어내고 곧장 수건을 들어 머리를 제대로 닦지도 못한 채 욕실안에 준비되어 있는 가운을 걸치고
급히 욕실을 나왔다. 침실로 향하니 예상대로 남자는 길게 침대에 누워있었다. 빌어먹을, 뭐가 저렇게 빠르냐.
낭패감에 재중은 입술을 삐죽였다. 남자는 시트로 허리아래를 덮고 있었으나 드러난 상체로
그가 나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운의 끈을 꼭 움켜쥐었을 때, 남자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 늦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침대앞에서 기다리게 만드는 건가? ”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었으나 그다지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어 재중은 조금 안심했다.
“ 죄 죄송합니다. ”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는데, 남자가 손을 들어 그런 재중을 제지했다.
“ 그 불필요한 것은 벗지 그래. 보기만 해도 답답하군. ”
“ 네! …네? ”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던 재중은 다음 순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 아아 그래. 벗어야 하지. 벗어야 하는 거였어. 벗어야 하는데…
재중은 떨리는 손을 애써 움직여 가운의 끈을 움켜쥐었다. 남자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모르고 재중을 바라보고 있다.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마구 떨려왔다. 그래, 나는 저 남자가 하룻동안 산 상품인 거야.
그러니까 그에겐 볼 권리가 있어. 나는 저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고…
그러니까 이렇게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는 거야. 끈을 풀고 나서 재중은 눈을 꼭 감고 숨을 들이켰다.
움직이지 않는 손을 들어 어깨에 걸쳐진 가운을 벗었다.
사소한 손짓만으로도 가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발치로 떨어져 내려갔다.
“ 꽤나 오래 걸리는군. ”
남자의 지루하다는 음성에 재중은 겨우 눈을 떴다. 남자는 아직 침대에 누운 채였다.
재중은 무거운 발걸음을 힘겹게 움직여 한걸음 한걸음 남자에게 다가갔다.
겨우 침대가에 선 재중은 당장이라도 외면하고 싶은 것을 애써 눌러참고 똑바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 저,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
재중의 질문에 남자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첫 남자의 이름 정도는 알아둬야 하는 거겠지.
그다지 명예로운 기억은 아닐 테지만. 이 남자가 나를 비싸게 사주면 나중에 성공해서 감사의 인사라도 할 지 모르고…
“ 정윤호다. ”
멍하니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재중은 아련히 들려온 남자의 음성에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본명일까, 하고 의심이 들었지만 가명이라고 해도 확인할 방법은 없으니 상관없다.
“ 나는 김재중이에요. ”
윤호는 ‘그런데?’ 하고 무심한 눈길을 재중에게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침대에 벌거벗은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이름 따위를 소개하고 있다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참 바보같은 행위였다. 하지만 재중은 어떻게 해서든 앞으로 다가올 미지의 공포를
조금이라도 더 미루고 싶었다.
“ …상대에 대해서 이름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재중은 자신의 목소리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은 이미 한계였다. 윤호는 물끄러미 재중을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 글세, 울면서 이름을 불러야 하는 건 내 쪽이 아니니까 내게는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지 않군.
…하지만 나로서도 상대가 다른 녀석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니까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
그리고 그는 사이를 두고 덧붙였다.
“ 좋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행여 그렇게 된다면 그 때는 네 이름을 불러주지. 그럼 이제 된 건가? ”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윤호가 손을 내밀었다.
“ 자, 그럼 이만 올라오지 그래. 기다리기에도 지쳤다. ”
재중은 한동안 내밀어진 윤호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빨라진 맥박소리가 거세게 울려 퍼진다.
재중은 겨우 떨리는 손을 힘겹게 들어올려 윤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윤호는 손안에 잠겨드는 작은 손을 붙잡아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