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짓 말 - (1)
“ 미안하다 재중아… ”
재중은 망연히 울고 있는 친구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아직 2월. 겨울이 끝나려면 멀었는데 또다시 갈 곳이 없어졌다.
부모님이 행방불명 된 지 얼마나 되었었지? 문득 기억을 더듬던 재중은 곧 생각하기를 포기해버렸다.
의미가 없는 행동인 것이다. 재중은 한숨을 내쉬며 바로 앞에 보이는 가마에 손을 댔다.
“ 괜찮아, 민철아. 그동안도 너무 고마웠는걸. 하긴 내가 너무 오래 빌붙어 있었지? ”
‘아냐 아냐’ 하고 고개를 도리질하는 민철을 보며 재중은 어렵게 미소를 지었다.
“ 한달이나 있었으면 오래 있었던 거지. 어머님께 너무 감사했다고 전해드리고…
인사 못 드리고 나가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줘. ”
민철은 여전히 흐느끼며 말을 못했다. 여린 놈. 재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까지 눈물이 날 것 같잖아.
이봐, 울고 싶은 건 내 쪽이라고.
재중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같은 눈물을 겨우 참고 애써 웃었다.
“ 그럼 새학기 때 보자. ”
“ 어 어디로 가려고 재중아… ”
서둘러 소리친 민철에게 재중은 어깨를 으쓱했다.
“ 걱정하지 마. ”
그리고 크게 팔을 휘저어 바이바이를 하고 돌아서서 달려가면서, 재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어버렸다.
아버지의 중소기업이 부도를 낸 것은 지난 12월의 일이다.
처음에는 갑작스레 난입한 빚쟁이들과 차압딱지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뿐인 남동생은 아직 어려서 두려움에 큰 눈을 두리번거릴 뿐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재중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장남이라는 이유로 어떻게 해서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에 보탬이 되어야겠다고 나름대로 굳은 결심까지 했다.
하지만 이사를 앞두고 며칠 전, 부모님이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큰 집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쳤지만 어디에도 자취는 남아있지 않았다.
뒤늦게 알게된 사실이었지만 부모님은 빚을 지기 얼마 전에 사채를 끌어다 쓰면서 꽤 많은 돈을 숨겨두었던 듯 했다.
우리 가정이 그다지 살가운 집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되면 황당함을 지나쳐 분노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직 초등학생인 인찬이는 어쩌라고 이렇게 달아나버린단 말인가.
졸지에 동생과 단둘이 남게 된 재중은 당장 먹을 쌀도 없어 기아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그 때 생각하게 된 것이 가장 친한 친구 차민철.
민철은 갑작스레 동생을 등에 업고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 친구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으나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이부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우선 급한 것들을 챙겨오긴 했지만 빚쟁이들이 행여나 들이닥치진 않을까,
한동안 겁에 질려 민철의 집에 숨어있기만 하던 재중은 용기를 내어 집을 나서 외가댁으로 향했다.
전후사정을 얘기하고 불쾌한 기색이 만연한 할머니에게 울며 매달려 겨우 인찬이만 맡기고 돌아서던 날,
인찬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울려퍼져 도망치듯 달아나야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겨울인데다 방학이라 아르바이트도 이미 자리가 다 차버렸고,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설 뿐 도무지 앞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민철로부터 퇴거명령을 받아버린 것이다.
물론 한달이나 빌붙어있었으니 민철이에게 미안한 것도 미안한 거지만
무엇보다도 그 집 식구들에게 볼 면목이 없다. 그 집도 역시 평범한 중산층이었는데,
갑작스레 남의 식구까지 와서 더부살이를 한다는 건 꽤나 불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이 겨울을 어떻게 보내면 좋은 건지. 입에서 그 새 하얗게 입김이 새어나온다.
눈물이 마르고 나니 이젠 얼굴이 얼어붙었다.
재중은 한숨을 내쉬며 짐보따리를 어깨에 멘 채 터덜터덜 걸었다.
여름이라면 공원에서라도 잘 텐데 이 겨울을 어쩌면 좋을까… 고민이 지나쳐 패닉상태에 접어들려던 찰나,
갑자기 재중은 맞서 걸어오던 누군가와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 앗!! ”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지자, 맞은 편에서 작게 욕설이 들려온다.
재중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몇 번씩이나 고개를 숙여가며 사과의 말을 했다.
“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 정신 차리고 걸어! ”
매몰차게 외치는 음성에 재중은 다시금 사과의 말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 에… 지금 경황이 없어서… ”
눈이 마주치자 남자의 얼굴이 순간 변해버린다. 깔끔한 슈트에 코트를 입고 있는 그는
한눈에도 상당한 재력가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샤프한 외모까지.
여자 꽤나 울리고 다니겠군…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 재중을 그는 천천히 훑어보더니
아까와의 음성과는 다르게 사뭇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 뭐야, 손님을 잡으러 나온 거였나. …그 가방은 뭐지? ”
응? 손님? 재중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때까지 땅에 떨어져 뒹구는 가방을 서둘러 집어들었다.
민철의 집에서 나왔다고는 해도 애초에 그다지 짐도 없어 지하철의 보관함에 넣어두고 급한 것만 들고 다니던 쌕에
넣어다니던 참이었던 것이다.
“ 그냥… 가방이요. ”
왠지 느낌이 좋지 않은 사람이다. 재중은 조심조심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할께요. ”
말과 함께 휭 돌아서려던 재중의 팔을 남자가 세게 붙잡았다.
“ 하룻밤 얼마야? 멀리 갈 것 없이 나한테 팔지? ”
뭔소리래? 재중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남자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이거, 혹시 말로만 듣던 그 헌팅…?
남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두 배 주지. ”
“ 시 싫어요! ”
재중은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냅다 소리를 지르고 남자가 잠시 주춤하는 새 재빨리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 버렸다. 제길, 꼬이라는 돈은 안 꼬이고 꼭 저런 놈만…
욕설을 지껄이며 마구 달려가던 재중은 한참만에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벽에 기대서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은 이미 남자가 했던 제안을 자꾸자꾸 되새기고 있다.
두 배 주지.
“ 미친… 놈… ”
낮게 욕을 내뱉었지만 이미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지. 당장 잘 곳도 없고.
오늘같은 날 밖에서 자면 정말로 얼어죽을 텐데… 나마저 죽어버리면 인찬이는…
울고 있는 동생의 얼굴이 시야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 제길… ”
재중은 마디가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손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인가. 재중은 벽에 기대었던 몸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딜 보아도 자신을 사줄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아까 그 남자라도 잡을 걸.
재중은 얼굴을 찡그리며 뒤늦게 그를 아쉬워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사이에 시간은 점점 늦어져 거리에는 점차 사람들이 뜸해졌다.
어쩔 줄 몰라하며 한참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재중은 드디어 타깃을 결정했다.
뒷모습만으로는 잘 알 수가 없지만, 더 이상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재중은 어깨에 맨 가방의 끈을 움켜쥐고 나는 듯이 그를 향해 달려갔다.
남자는 키가 커서 그런지 걸음이 무척 빨랐다. 속도를 다해 달려가도 따라잡기가 힘들다.
그가 도로 한 쪽에 세워둔 검은 색 고급 승용차에 멈춰서더니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 이봐요! ”
열쇠를 찾고 있는 사이 겨우 그를 따라잡은 재중은 다짜고짜 남자의 소매를 붙잡고 눈을 꼭 감은 채 소리쳤다.
“ 저, 저… 저를 하 하하 하룻밤 사 사사주세요! ”
얼굴이 온통 붉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 날씨가 이토록 덥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있기만 했다. 그렇다고 뿌리치는 것도 아니고, 뭘 생각하는 걸까.
불안해하면서도 재중은 도저히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 …사달라고? ”
한참만에 들려온 그의 음성은 듣기 좋은 로우톤이었다.
재중은 겨우 눈을 떴지만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전혀 동요하지 않는 기색으로 그가 다시 말했다.
“ 물건을 보여줘야 살지 안 살지를 결정할 게 아닌가. ”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지시에 따라 재중은 어렵게 겨우겨우 고개를 들었다.
예상했던 곳보다도 한층 더 높은 곳에 있는 그의 눈을 마주보기 위해서, 재중은 한껏 목을 젖혀야 했다.
남자는 올백으로 머리를 넘기고 가는 은테안경을 끼고 있었다.
상당히 잘생긴 외모였지만 가늘고 긴 눈매가 그의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재중은 순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재중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퍽이나 뇌살적인 웃음에 재중의 심장이 다시 한 번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 나 아무래도 손님 잘못 잡은 것 같다…
“ 나쁘지 않군. 얼마지? ”
재중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런, 시세가 얼만지 알 수가 있나… 재중은 애써 침착하게 겨우 입을 열었다.
“ 그 글쎄요 평소엔 얼마에 사시죠? ”
슬쩍 되물어보자 남자는 다시금 재중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 글세, 물건의 품질에 따라 다르겠지. 너는 얼마만큼의 서비스를 할 수 있는데? ”
잘하면 꽤 부를 수 있겠다. 전신에서 묻어나오는 부의 체취를 느끼며 재중은 서둘러 말했다.
“ 워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 서비스해요. ”
재중은 문득 채찍으로 맞는 거라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자신을 깨닫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나, 설마 천부적인 거 아닐까… 남자는 엷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 기대가 되는군. ”
그리고 그는 차문을 열고 재중에게 턱짓으로 타라는 표시를 해보였다.
재중이 조수석에 앉자 그는 차문을 닫고 앞으로 돌아서 운전석에 앉았다.
부드럽게 출발하는 차에 앉아 재중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려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