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35)

“으하하하하하. 임자를 제대로 만난 것이로구만. 저 물러 터진 광해한테는 딱 저런 녀석이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하하하하하하.”

수라사궁 바닥의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면경을 들여다보던 제석천이 박장대소를 하자 다소곳하게 앉아 복숭아를 깎으며 백사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남의 잠자리 사정을 저렇게 말도 없이 면경으로 훔쳐보는 제석천도 고약한 취미를 가졌지만 멀쩡한 인간 아이 뒤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놓은 광해 역시 백사 입장에서는 결코 편들어 주기 힘든 못된 짓을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찌 인간의 몸으로 광해의 용정을 받을 까요. 목숨이나 붙어 있을지…….”

“그건 걱정하지 마라. 백사야. 저 아이는 내가 내린 선물이니까.”

“예?”

백사가 잘라 내 내미는 복숭아를 냉큼냉큼 받아먹으며 제석천은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는 그럼 저 아이가 그냥 보통 아이라고 생각했더냐?”

“하지만…….”

“하늘이 내린 구멍이란 소리가 절로 나오지 않았더냐. 지금까지 저 아이 행태를 쭉 지켜봐 와 놓고서도 모르겠더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석천은 백사를 냉큼 들어다 자신의 무르팍 위에 앉히고서는 그의 목덜미에 복숭아 과즙이 잔뜩 묻은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저 아이는 특별한 아이다. 능히 광해의 세 양물을 품고도 환락의 경계를 넘어 즐길 만하니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특별한 아이라니요?”

“도화살이라고 해야 하나? 유달리 음욕이 강한 아이들이 있다.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그런 아이들은 광해 같은 사내를 만나야 

삶이 안정되고 편안해 지지. 저 아이가 제 사주로는 결코 접하기 힘든 제 짝을 기연으로 만났으니 그것도 다 제 복이니라. 

그런데 저런 애들한테는 삼충이 잘 붙어 있지 않아서 말이다.”

“그, 그럼…….”

광해를 불러다 앉혀 놓고서 숙주 잃은 삼충과 삼충 잃은 인간을 보고도 고하지 않았다고 불벼락을 내릴 때는 언제고 이제 보니 

저 시커먼 속으로는 원래 그런 아이임을 뻔히 알고 있었다 토설하는 제석천이 백사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참으로 못돼 처먹은 인사라고 속으로야 백만 번 욕을 해도 그걸 표현할 수 없으니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백사 너도 저런 아이란다. 음욕이 강해 너 역시도 내가 없으면 애간장이 녹…….”

“거짓말 하지 마세요!”

이제 제석천의 수작에 놀아나 전전긍긍 매 번 속아 주기에 백사는 나이가 너무도 많았다.

그는 지엄한 하늘 주인의 말꼬리를 뚝 잘라 먹고는 냉정하게 그를 힐난했다. 분풀이라도 되는 양 귀한 천도복숭아를 푹푹 칼로 

찌르면서 단단히 토라져 버린 것이었다.

제석천은 그런 정인의 허리춤을 슬금슬금 쓰다듬으며 그의 귓전에다 대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광해가 저 목마를 언제쯤 가져다주려나. 저 굵직한 남근이 빙빙 돌아가는 것 말이다.”

쨍그랑-!

백사의 손에서 칼이 떨어지며 탁자 위에 있던 도자기 접시에 꽂히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제석천은 제 무릎 위에 앉아 사색이 되어 발발 떠는 백사가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이 울퉁불퉁 구슬 같은 돌기도 있고 말이다. 백사야. 이참에 그냥 우리가 내려가서 저놈을 사 올까?”

“사, 살려만 주세요. 잘못했어요. 우아아앙-----.”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고 놀아나는 동해 용왕 부부 때문에 죽어나는 것은 단지 늙은 우렁쉥이 각시 백사 뿐인 듯했다.

경계하고, 반대하고,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수많은 신장 신수 영물들이 모인 가운데서 동해 용왕의 정식 즉위식이 이루어 졌다.

이례적으로 옥좌의 왼편에 앉은 것은 하잘 것 없는 인간이었으며 그것도 여자가 아닌 남자였으나 막상 동해 용궁의 용부인 되는 

자의 얼굴을 보고난 후에는 아무도 그것에 토를 달지 못했다.

광해가 미친 용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허허실실 살았다면 새로 등극한 동해 용부인은 지엄한 신장 신수 영물들 중 누구도 그 

신분이 미천한 인간이라고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 기품 있고 엄한 성품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는 분이셨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의 존귀함이 도리천의 서왕모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견줄 분이 없으니 그 자리에 앉은 자를 일러 아무도 입방아를 찧을 수 

없을 만큼 적격인 분이 옥좌에 앉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죽 했으면 동해 용왕 광해 보기를 벌레보다 못하게 눈살 찌푸리는 서왕모까지도 친히 용부인의 손을 잡아 앞으로 친분 있게 

지내며 자주 보자는 말을 하였겠는가. 물론, 윗전 분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과 속마음이 다른 일은 허다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 것이다. 하지만 본디 서왕모께서 고귀하고 품위 있는 것을 기꺼워하여 주변에 두기 좋아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만한 위엄과 

기품을 갖춘 용부인을 귀애하는 서왕모의 마음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더욱이 그러한 서왕모의 칭찬과 호의에도 아부하는 기색 없이 의연하게 대처하는 용부인의 모습에 평소 광해를 질시하는 무리들은 

모두 모골이 송연해 지는 듯하였다. 한낱 미천한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은 저만치 달아나 버릴 것 같은 그 모습은 마치 모두에게 

능히 그 자리에 오를 분이 동해 용부인이 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왕모의 그런 겉치레 인사말이 그 분이 진정한 속마음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그들이 득세하는 것도, 

그들이 광해를 핍박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서왕모의 권세에서 비롯된 것이니 앞으로 세상 모든 신수 영물들의 권력 암투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다만 본디 하늘 주인 되시는 제석천과 서왕모 두 분이 모두 변덕 심하고 심중을 알기 힘드니 앞으로의 일은 두고 봐야 할 것이라 

후일을 다짐할 뿐. 더는 뭐라 동해 용왕의 혼례에 입초사를 떨 수도 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권력 암투의 정점에 서 있는 동해 용왕 광해는 장가드는 그 날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심기 불편한 것도 후련한 것도

아닌 낯 색으로 친우들의 환송을 받으며 무사히 침전으로 향했다.

새로 연을 맺은 동해 용왕 부부와 그들을 둘러싼 복잡하고 미묘한 권세 다툼이 앞으로 어떤 길을 향할지는 하늘 주인 되시는 

제석천만이 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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