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35)

의원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벌벌 떨며 진료와 처치를 마쳤다. 마물처럼 으르렁대면서 등 뒤를 배회하는 용왕의 서슬 퍼런 살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주작 주원이 아무리 달래고 윽박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미친 용왕은 진정한 광인의 모습을 확연하게 드러낸 채 의원의 

일거수일투족을 번들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떠냐. 어떤 것이냐. 위중하냐? 살 수가 있겠느냐?”

“그런 게 아니라…….”

“말을 해라. 그가 죽으면 네 놈 목도 무사하지는 못할 게다. 제대로 치료를 해. 너희가 아무리 나를 업신여겨도 너희의 

생사여탈권이 내 손에 있음을 잊지 않았다면 성심을 다해 치료해. 그가 죽으면 너 뿐만 아니라 네 가족은 물론이고 조상의 묘까지 

파헤쳐 난도질을 해줄 테니. 그를 살려내라!”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의원은 환자의 상태가 이만큼 위중했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 한다. 그것이 능히 고칠 수 있는 가벼운 것이라 

해도 먼저 상세를 부풀려 그런 것도 고쳐 내었다는 치사를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원은 살기등등한 용왕의 겁박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제발 진정하세요. 이 자가 용궁에서 가장 용한 의원입니다. 하늘이 거둘 목숨이 아니면 이자가 고치지 못하는 환자가 없다니까요! 

제발 진정 좀 하세요!”

별하가 으르렁대며 이를 드러내는 용왕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는 용궁의 제1비서관다운 위엄으로 

의원에게 물었다.

“환자의 상태가 어떤가. 가감 없이 말을 하게.”

“환부의 손상이 깊고 내장에 울혈이 심하게 들었으나 환자가 인간이니 그리 염려하실 것은 아닙니다.”

“아……. 다행이구만. 인간의 병이나 상처는 치료하기가 훨씬 쉬우니 말이야. 아. 그리 보지 마시게. 내가 별주부의 후손이 

아닌가. 우리 조상님도 의학을 조금 아셨으니 나 또한 어느 정도는 배움이 있어.”

별하는 여전히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헐떡이고 있는 광해를 모질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요. 사장님! 아니, 용왕님 아니, 아니. 마마 정신 차리시옵소서. 젠장. 얼마나 놀랐는지 나도 정신이 안 차려지네. 

괜찮다잖아요. 예? 쉿! 쉿! 훠이!--- 사장님?”

“피를 많이 흘렸다. 저것이 모두 이 아이 몸에서 나온 피야. 인간이 저 정도 피를 흘리고 살아남을 수 있는 거냐?”

쇠붙이가 갈리는 듯한 괴로운 음성이 용왕의 목구멍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의원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실혈이 많으나 크게 염려할 바는 되지 않습니다. 기운을 돋우는 향을 피우고 기와 혈을 보하는 탕재를 지어 올리겠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하루면 상처가 멀쩡하게 나을 것이며 사흘이면 허혈 증세도 회복 될 것입니다.”

“네 목을 걸고 장담할 수 있는 일이겠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리까. 인간은 본디 회복이 빠른 존재이고, 더군다나 궁에는 다 죽어 가는 인간도 일으켜 세울 영약이 

많습니다. 환자의 이전 모습을 보지 못했사오나 사흘이면 전보다 더 기력이 좋아질 것임을 확신하옵니다.”

“물러가서 탕재를 내오너라. 향을 피우고 탕재를 만드는데 있어 한 치의 실수도 용서치 않겠다. 명심해라.”

“예. 소인 물러가 탕재를 준비해 오겠사옵니다.”

의원이 물러가자 별하와 주작 주원은 넋을 빼고 있는 듯한 광해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가 불러 이곳 용궁까지 온 

주작은 습기 많고 물에 젖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기 때문에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방금 전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생각하면

화낼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엇이 그의 오랜 벗을 그토록 동요하게 하였는지 모르지만 그에게도 뛰는 심장과 뜨거운 마음이 있다는 것이 싫지도 않았던 것이다.

“광해야.”

“……아. 아……. 미안하다 주원. 널 불러 놓고 못 보일 꼴을 보였군.”

“친구 사이에 볼꼴 못 볼꼴이 어디 있냐. 못 볼꼴은 예전에 더 많이 봤다.”

“훗…….”

의원의 호언장담이 그나마 위력을 발휘했는지 적어도 지금은 누구든 눈에 띄기만 하면 찢어발길 기세는 아니라 주원도 긴장한 

별하의 어깨를 두드려 동해 용궁 제1비서관의 심기를 안심시켜 주었다.

“별하 이놈이 어지간히 쫄았나 보다. 너한테 마구 대놓고 대거리를 하고 말이다.”

“그 놈은 원래 나한테 대드는 게 취미야.”

“사장님은 나 구박하며 괴롭히는 게 취미잖아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별하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주원은 좀 더 다정하게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별하야 난잡하게 놀아나던 미친 광해를 사실상 처음으로 목격한 것이니 당혹스럽기도 했을 것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대신 휴가 줄 테니까 성질 그만 부려라.”

“……휴가요?”

별하의 눈이 대번에 새초롬해지며 광해의 눈치를 살폈다. 허튼말을 하는 분은 아니니까 못 믿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용왕 자리에 앉고 수십 년 동안 휴가는커녕 비번도 없었다. 그러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차차 논의토록 하고 가서 쉬거라. 가게로 돌아가지 말고 일단 궁에서 대기해라. 주원이 돌아갈 때 길 안내가 필요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뭐냐.”

“제갈동 씨가 왜 용궁에 있는지 또 왜 저렇게 되었는지 물어보면 안 되는 거겠죠?”

“…….”

광해는 말없이 별하를 바라보았고, 별하는 움찔 어깨를 떨며 조용히 침전을 나갔다.

“흐음…….”

“이제 정신을 좀 챙겼냐?”

“그래도 궁에 별하 저 놈이 있으니 내가 아주 박복한 것은 아닌가 보다.”

“별하야 만고에 충신이지. 미친 용가리 왕도 지 놈 왕이라고 등딱지가 터지도록 삼십육천을 해매서 결국 너를 찾아 냈잖냐.”

“…….”

주원은 침상에 앉아 일어날 줄을 모르는 광해를 내버려 둔 채 다탁의 의자에 앉았다. 한참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궁 내의원 소속의 시녀들이 와서 실혈을 보하는 향을 피우러 들어왔을 때 함께 온 침전 시녀들이 주원에게 차와 과자를 좀 

갖다 준 것 말고는 무거운 침묵이 용왕의 침전에 감돌고 있었다.

매콤한 향냄새가 방안을 채우기 시작하자 주원은 이것이 광해의 연초 향기보다 백 배 낫다고 생각하며 느리게 차를 음미하기 

시작하였다.

“나한테 설명할 게 있을 텐데 언제 시작할 거냐.”

“삼충을 잃어버린 인간이다. 이 아이가.”

“……?”

“그래서 제석천님이 천상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 버리셨지.”

“아!”

그러면 인간이 어찌 되는지 주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초에 관해 광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아주 흘러가는 말처럼 아무렇지 않게 광해 자신이 빛도 어둠도 아닌 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말을 하였으니까 말이다.

“내가 이 아이 삼충을 주웠는데 바로 돌려주지 않았다. 너무 탐이 나고 욕심이 생겨서 희롱하여 노느라 거기까지 미처 생각을 

못한 거지.”

“쯧쯧쯧……. 왜 그런 짓을 했어.”

“나도 몰라. 미쳤나 봐.”

“미쳐서 그런 짓을 한 게 아니라 그 때만 용케 제정신이 돌아와서 그리한 건가 보다.”

“응?”

주원은 의미심장하게 말했지만 그 뜻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광해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가만히 찻잔을 들어 올려 향을 

음미하며 앉아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 형편이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다.”

“…….”

“내가 잘못되면 이 아이가 어떻게 될 것인지 너무 뻔하지 않으냐.”

“그렇지.”

“그러니 이 아이를 좀 보살펴 다오.”

“그 말이 뭘 뜻하는 것인지도 알고 부탁하는 거냐?”

저렇게 조심스레 정신을 잃고 있는 인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광해의 속내와 그가 하는 말은 너무도 달랐다. 하지만 

주작은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냉정하게 물었다.

“더 곁에 두면 정이 들어 내놓기 싫을 것 같다.”

“예전에 누구더라? 태수한테 그런 말을 했다더군.”

“응?”

“정 가는데 길이 없고, 그걸 막을 것도 없다고. 그 말 듣고 난 뒤 한참 지나서 태수가 뭐라고 했는 줄 아냐?”

“…….”

불의 기운을 가진 주작에게 용궁은 결코 편한 곳이 아니었지만 주원은 이곳의 차향만큼은 어디와 비교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막지 못할 것이 없다고 알려진 현무 태수가 그리 말하더군. 제 안으로 그가 흐르는 것은 알지도 막지도 못했다고 말이다.”

“무슨 뜻이냐?”

“그렇다는 뜻이다. 네가 그 인간을 나한테 맡기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지금 딱히 마음 주는 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짧은 인간의

삶이 끝날 때까지 그 인간 하나 보살펴 주는 건 크게 힘든 일도 아니니까.”

광해는 아직 제 마음으로 누군가가 담뿍 스며들어 흐르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게 이렇게나 확실하게 보이고 

느껴지는데 너무 가까운 곳에 있으면 보지 못하는 게 많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 아닌가. 주작 주원은 빙그레 웃으며 당황하여 

따라 일어서는 광해를 만류한 채 또 보자는 인사를 후 훌쩍 방을 나가 버렸다.

또 보게 될 때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기대되기도 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리고 부디 저 인간이 어질고 영민한 자이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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