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35)

쾌감 말고는 아무 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린 서늘하고 기분 좋은 음성이 사라지고 그의 체취가 사라지고 

그의 기척이 사라진 후 날카로운 쾌락의 사이로 가시처럼 날을 세운 고통이 동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아무리 음란한 행위라도, 그 아무리 무리하다 생각되는 난잡한 짓이라도 그저 지끈거리는 즐거움으로만 느껴졌었다. 다소 불안하고 

겁이 나더라도 그 곁에는 항상 저속한 말로 동의 마음을 붙들어주는 광해가 있었다.

번쩍 눈을 뜬 동은 낯선 용궁의 침전에 홀로 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광해는 없었고, 그는 혼자였다. 살을 가르고 들어와 

빙빙 돌아가는 거대한 남근이 그처럼 끔찍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공포가 

발기한 성기를 쪼그라들게 만들었고, 크게 부풀어 오른 크기에 맞춰진 금속 링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른 것은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뿐이었다.

“아아악! 으윽!”

쾌감에 젖어 달콤하게 울리는 신음이 아니었다. 가슴을 저며 내듯 섬뜩한 울부짖음이 거친 성대를 타고 올라 방안을 울렸지만 

아무도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찌릿찌릿 등뼈를 녹일 듯 그를 달궈 주었던 남근이 이제 더 이상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단지 고통만이 몸을 둘로 

찢어낼 듯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부욱- 하며 피부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과도하게 경직되어 버린 뒤를 찢으며 여전히 감흥 없이 돌아가는 기구가 기어이 

피를 보고 만 것이었다. 비릿한 피비린내에 동은 목이 터져라 광해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가 아니라 

광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동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누가 와도 그를 이 고통에서 구원해 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흐르며 천천히 흐르는 피와 상처 난 살점을 헤집듯 무성의하게 움직이는 기구는 마치 

고문을 하듯 동을 후벼 파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아아악! 광해! 당장 내게로 오지 않으면……. 크읏! 죽여 버릴 테다!”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아도 그만 둘 생각이 없을 것이다. 기계란 마음이 없으니까 이제 더 이상 이게 재미난 놀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광해! 광해! 으읏…….”

고통을 견디지 못해 까무룩해지는 의식 속에서 동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을 하게 되어도 만날 수 있겠냐고 물으려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외조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으니 이 혼인을 꼭 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었다. 하지만 당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놓칠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혼인을 한다 해도 계속 만나면 

안 되겠냐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이 누구라도 상관없고, 어떤 존재라도 마음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즐거움은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으니 당신도 나와 생각이 

같다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안 굳이 잡은 손을 놓을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동은 천국과 같았던 이 기구가 단지 광해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만으로 지독한 고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이 

광해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결코 다른 누구도 채워 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 회사? 제길……. 개나 물어 가라 그래라.

용왕이고 자시고 동은 자신이 저 남자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고, 저 남자가 아니면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기어이 

납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그를 만난 것인데 기묘한 방식으로 설득 당한 것은 자신이었다.

주작과 별하를 잠시 침전 밖에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간 광해는 제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해 잠시 동안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동의 몸에서 어떻게 그만큼 많은 피가 나올 수 있는 것인지 일단 그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 잠깐 동안 동해 

용궁에까지 삿된 것들이 침범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손과 발을 묶인 채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목마 위에 올라앉은 동의 모습은 

유년기의 자신과 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린 와중에 어떻게 수갑과 족갑을 떼어내고 목마 위에서 동의 몸을 끌어내렸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지는 것처럼 급박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동해 용왕의 음성에 놀란 별하와 주작이 침전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용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모진 일을 당해도 아무리 험한 소리를 들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미친 용 광해가 품안에 인간 사내 하나를 끌어안은 채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었다.

선견성 경비대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지나갈 때도 광해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천도복숭아 농원을 밤서리 하다 들켜 뭇매를 

맞으면서도 광해의 눈빛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가 제석천의 손에 붙들려 천덕꾸러기 사방신들에게 소개 받을 때 온몸이 한군데 

성한데 없이 피비린내 상처투성이의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의 눈만은 새파랗게 빛이 나고 있었다.

마음이 없는 현무조차도 혀를 찰만큼 독하고 모질었던 그 광해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되어 진짜 광기를 번들거리며 절박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주원은 지금 자신이 보는 광경도 귀로 듣고 있는 소리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것은 그가 아는, 그들이 아는 광해가 아니었다.

“의원을 불러라. 별하야. 의원을……. 누구든……. 누구든 이 아이를 살려내라! 당장! 지금 당장!---.”

광해의 품에 안긴 그 남자가 누구이든 주작 주원은 그 남자가 살지 못하면 진정 미친 용을 보게 되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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