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일이지만 주말 내내 혹사당한 뒤에 마개까지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의 출근은 경쾌했다. 탈진할 것처럼 달아올랐고,
무리하게 굽힌 자세로 한정 없이 괴롭힘을 당했음에도 그는 한 시간 정도 헬스장에서 땀을 빼고 난 정도의 피로감 밖에 느끼지
못했다. 아무 연락이 없었던 외박에 대해 추궁 당할 것을 염려하고 들어간 집이었음에도 일하는 아주머니 말고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개운하게 샤워도 마쳤고, 잘 다려진 셔츠와 양복을 입으며 약간의 이물감을 느낀 것도 달콤한 한숨처럼 가벼운 것이었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차가 없으니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며 택시를 잡고 구청 건물 입구로 들어설 때까지 그는 매우 유쾌하고 산뜻한 기분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예?”
특별히 제갈동이 외교부 장관의 외동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성품 좋은 구청 공익 근무 요원의 인사를 들으며
동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물론 축하를 받을 만큼 굉장한 주말을 보냈지만 그것은 동의 지극히 개인적인 잠자리 사정이지 세상에
대고 소리치며 자랑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묻는 제갈동에게 공익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어……. 결혼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예?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아니, 전 신문에서…….”
묘하게 당황하는 공익의 표정에서 제갈동은 재빨리 스스로의 표정을 추슬러야 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훈련한 무표정은 이런 경우
매우 유용하게 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신문이라는 말과 뉴스라는 말.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동을 차갑게 가라앉은 마네킹처럼 만드는 단어였다. 무슨 말을 들어도 당황하거나 곤란한 기색을 내 비추면 안 되는
절대적인 제시어.
“아……. 그거요. 예. 감사합니다.”
무슨 일인지는 알지 못했다. 동은 아직 신문을 읽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기사가 어떻게 났는지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저 정도의 답변이라면 축하 인사를 건네는 사람에게 썩 무난한 답변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 의아하던 공익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어리는 것을 보면 그 예상은 적중된 모양이었다.
동은 대신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그대로 구청 건물 뒷문으로 나 있는 지상 주차장을 향했다. 현관에는 축하
인사를 건넨 공익이 있으니 그대로 몸을 돌려 구청 건물을 빠져 나가는 것은 혹시 모를 입방아를 자초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구청 건물을 빠져 나간 그는 가판대에서 몇 가지나 되는 조간신문을 샀고, 태연한 얼굴로 그것을 옆구리에 낀 채 아침 일찍부터
영업하는 커피 전문점을 찾았다.
심기 불편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지만 그는 여느 때와 똑같이 평온하고 쌀쌀맞은 얼굴을 한 채 출근 시간 전 한가롭게
신문을 보며 커피를 즐기는 여느 샐러리맨과 똑같이 행동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평온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경제면을 채운 자신의 결혼 기사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며, 대기업 총수의 외손자인 자신의 실명이 이렇듯
버젓이 기재될 정도로 확실한 정보원은 기업 비서실 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기정사실화 된 정보가 아니라면 어떤 기자도 아니,
어떤 데스크도 외교부 장관의 외동아들인 제갈동의 실명을 함부로 쓰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 다음 전화기를 꺼내 아버지의 비서실을 연결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청와대에 조찬 모임이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그런 경우 전화 연결이 가능한 방법은 없었다.
그 다음은 어머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글쎄다?]
동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낯익은 여성에게 가볍게 눈웃음을 지어 보여준 뒤 부드러운 그 얼굴을 지우지도 않은 채 태연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머니. 제가 이런 일을 신문에서 읽고 알아야 하는 겁니까?”
[아들. 난 네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질 수 있는 성인이 되기를 바랐단다. 하지만 넌 요즘 그걸 잊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다.]
“제가 실수라도 한 게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지만 네 의사를 내게 말해 준 적도 없지 않니? 네가 적극적으로 네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이상 이 일이 번복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내 말에 반박할 소지가 있어 보이니?]
아무래도 구청 근처의 커피숍이었기 때문에 동료 여직원들이 꽤 눈에 띄고 있었다. 그러니 동은 어머니의 부드럽지만 뭔가 벼르고
있는 듯한 말에 미소 띤 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 이런 식으로 그걸 확인하게 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 네 심정은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이 일을 매우 서두를 것이란 사실에 대해서도 난 미리 말했단다. 잊었니?]
“조금 더 시간을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이건 좀 경솔한 행동 같은데요? 사랑하는 어머니.”
[호호호호. 사랑하는 아들아. 나도 의도한 바는 아니란다. 생각지 않게 그 일이 밖으로 새 나가 좀 혼란스러운 상태야. 그것 때문에
조금 있다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했어. 너도 오겠니?]
울컥하는 불만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동은 누가 봐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한 채 신문 기사만을 보고 있었다.
“재미있으세요?”
[재미없어 얘! 니 아버지도 아침에 전화를 해서 얼마나 역정을 내셨는지 몰라. 할아버지도 화가 단단히 나 계시고 말이야. 어떠니.
와서 엄마 좀 도와주지 않으련?]
“제가 왜요?”
[아들. 어쨌든 이건 네 문제잖니?]
“무단결근하면 인사고과에 안 좋습니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이 그런데 있지만 네가 언제까지 구청 말단 공무원 일을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이참에 구청 일 정리하고
엄마 회사로 들어올래? 할아버지도 너만 좋다 그러면 본사에 자리를 만들어 주신다는데. 이제 결혼하면 공무원보다는 대기업 임원이
낫지 않을까?]
“그건 어머니 생각이시구요. 요즘은 언제 정리 해고당할지 모르는 대기업 임원보다는 철밥그릇 공무원이 훨씬 인기 좋습니다.”
[동아…….]
“예. 어머니.”
동은 베껴 썼나 싶게 대동소이한 기사 읽기를 포기한 채 신문을 접어 버렸다. 부드러운 어머니의 음성이 다소 복잡한 심경을
표시하고 있었지만 결국 어머니의 주장은 기사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아들.]
“듣고 있습니다.”
[네가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난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네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란다. 결국 혼인은 가장 원하는 사람과
하는 게 좋으니까. 내게 아들이 많았다면 하나쯤은 회사를 위해 희생하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나한테 아들은 너 하나 뿐이야.
그러니까 신문 기사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정말로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결정해 줬으면 좋겠어.]
부모님은 사이가 좋은 분들이셨다. 대기업 총수의 따님과 풋내기 외교관의 결혼은 분명 정경 유착의 빌미가 충분한 정략결혼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처음 봤을 때 사랑에 빠지셨고, 아버지는 현명하고 쾌활하며 소녀 같은 어머니를 귀하게 ]
여겨 주었다.
승승장구하는 정치가 그리고 부호의 따님이라는 두 분의 환경은 물론, 두 분의 평탄한 결혼 생활에 빼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조건이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두 분은 서로를 신뢰하고 있었고,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이상적인 결혼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는 부모님의
밑에서 동은 안정된 유년기를 보냈던 것이고 말이다.
물론, 애틋하게 사랑하여 두 분이 서로 타오를 것 같은 감정으로 서로를 보신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선에서는 서로에게 무심하고,
또 어느 정도는 서로의 부정이나 불성실을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점혈육인 동에 대해서만큼은 두 분 모두 지극한 애정과 보살핌을 보여주었고, 그도 역시 그것을 느끼며 살았다.
그가 까탈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행실과 이목을 신경 쓰는 것도 그런 부모님에게 누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일종의
부담이었다.
“어머니.”
[응?]
“저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습니다.”
[흐음…….]
수화기 너머의 음성은 동의 제안을 고려하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거니?]
다시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을 때 동은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그래. 그렇다면 그 기사에 관한 우리 입장은 일단 노코멘트로 하는 게 좋겠구나. 하지만 그 시간이 그렇게 길수는 없다는 것에
관해 알고 있겠지?]
“일주일. 아니, 열흘 정도면 됩니다.”
[그 정도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야. 아들…….]
“예.”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지?]
“물론이죠. 저도 사랑합니다. 어머니.”
[그래. 푹 쉬고 잘 생각해서 결과를 갖고 오길 바란다. 아빠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 전화 연결 안 될 테니까.]
“예. 그럼 끊겠습니다.”
[잘 다녀와 아들.]
자신의 결혼과 그 남자 사이의 상관관계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떼놓고 볼 수도 없는 기묘한 위치에
있었다.
동은 아직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일주일. 아니, 열흘이었다.
그가 인생의 가장 큰 결정이라고 해야 할 혼인 문제에 대해 선택하는 것은 겨우 그 정도의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부모님, 광해, 그리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