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진짜 미쳤냐? 제 정신이야?”
“흥. 광해의 광자는 미칠 광자다. 너희들도 날 보고 언제나 미친 용가리라고 하지 않으냐. 미친놈 맞지 뭐.”
태수나 다른 사방신이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광해는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맨 정신이었다. 말짱한 정신으로 그런 난동을
천연덕스럽게 부릴 수 있는 것이 더 위대해 보이기는 하지만 네 명의 사방신은 아주 골머리가 썩을 정도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다.
그 후련한 감정을 가장 먼저 표현한 것은 주작이었다.
“진짜 크기는 하더라. 주눅 들어 살겠냐?”
“그런 게 두 개 더 있다고? 이비! 용궁 가에 왜 자손이 귀한 줄 알겠다.”
“야 그럼 적손의 아들만 열 하나가 있는 서해 용왕 가는 뭐냐?”
“용부인이 대단한 거냐. 용왕의 거시기가 작은 거…….”
태수는 사방신들의 엉뚱한 상상을 막으며 그때까지 붙들고 있던 광해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만하자. 내려갈 테냐?”
“가야지.”
“그래. 그럼 우리도 같이 가자.”
“그러든지.”
그들이 선견성에 머문 것은 한나절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지상에서는 벌써 열흘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금요일 오전이었다. 사방신은 좀 더 광해를 붙들어 두려 하였으나 그의 마음은 명경처럼 맑으며 동시에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뒤집히고 있었다.
아찔할 만큼 강렬한 태양 아래로 나와 광해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길을 걸었다. 태수만이 그의 뒤를 따라 한참 동안이나 뭐라 말을
걸었지만 그것은 하나도 광해의 귀에 와 닿지 않았다.
온전히 마음을 닫아 버린 광해에게 무엇인가 큰 변화가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가 스스로 입을 열기 전에는 아무도
그를 채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태수는 조용히 물 나이트로 돌아가 버렸다.
사람들에게 부딪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걷던 광해는 갑자기 밀려오는 두려움에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 인간들의 세상,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그 속에는 온갖 신수 영물들의 흔적도 있고, 더럽고
삿된 것들의 탐욕도 있었다.
음과 양이 공존하는 세상. 바르고 그른 것이 언제나 동일한 질량으로 섞여 있는 기묘한 세계.
용의 정을 더 많이 묻혀 두어야 했다. 그의 몸 가장 깊은 곳에 싸질러 놓아서 그가 그것을 온전히 흡습할 수 있도록, 그래서
어두운 것들이 그에게 범접할 수 없도록 해야 했다.
부지불식간에 광해가 금옥에 끌려가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광해가 어느 날 암습 당하여 비명횡사 하게 되더라도 그만은
부정한 것들의 노리개 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보다 많은 용의 정을 침투시켜 놓아야 했다.
열흘. 아니, 한 달. 아니, 일 년만이라도 삼충 없이 보통의 인간 삶을 살 수 있도록 용의 정이 온전히 그에게 배어들도록
해 놓아야 했다. 처음 만난 그 순간 소매 자락 속에 있던 삼충을 돌려주지 않은 죄 값은 제석천이 아니라 동에게 벌을 청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욕심으로 참담한 진창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 하는 인간에게 속죄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마개를 사자. 하루면 녹아 못쓰게 되어 버리는 것이니 여러 개를 사자. 그래서 매일 같이 그의 몸 안 깊은 곳에 가장 많은 정을
싸질러 놓고 한 방울도 새지 않도록 꽉꽉 틀어막아 버리자. 정이 넘쳐서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라도 멈추지 말고 이곳, 인간 세상에
머무는 동안 매일 같이 매 순간 매 초가 아까운 것처럼 그에게 용의 정이 스며들도록 하자.
그것만이 살아남기 위해 발악해야 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광해가 할 수 있는 전부. 속죄의 유일한 방책이 생각나자 그는 더 이상 망설이고 서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자신이 언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제석천이라고 해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예측한다 하여도 살아남기를 명하기만 할 뿐 혼자의 힘으로 살아남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던 제석천이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 줄 리 없었다.
그는 본디 그런 존재였다. 아무도 그 속을 알 수 없고 아무도 그의 결점을 보지 못하고 그리고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한다.
그의 애정에 기대 그를 믿었다가는 험한 꼴을 면치 못하고 그를 믿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내린 은총에 당황하고 또 감사하도록
만드는 왕이 그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광해는 그를 믿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시간이 허락하는 한 동에게
속죄하려고 마음먹을 수 있는 것이다.
마개가 필요했다. 더 많은 마개가. 매일 매일 쓸 수 있도록 셀 수 없이 많은 마개가 필요했다.
‘딕 앤 딕’의 앙드레 장은 굶주린 맹수처럼 쳐들어온 남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남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은 그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 남자를 단골로 만들어 놓으면 여간한 단골 수십의 몫은
충분히 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개를 줘.”
“어서 오십시오. 손님.”
“한두 개로 안 돼. 갖고 있는 걸 전부 내놔.”
“플러그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내 말 못 들었나. 여기 있는 거 전부를 줘.”
앙드레 장은 이 남자가 하늘님이 자신을 위해 내려 준 로또 같은 게 아닌가 싶었다.
씀씀이 큰 고객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는 재빨리 직원을 내려 보내 창고에 플러그가 몇 개나 있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지난번 구매하신 상품과 다른 형태의 것이라도 상관없으십니까?”
“아무 거나 상관없다. 마개로 쓸 수 있는 거면 뭐든지.”
“알겠습니다. 손님.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거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필요 없어.”
고객이 대체 어느 곳에 그 많은 플러그를 사용하려 하는 것인지는 앙드레 장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대단히 성질 급해 보이는
고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창고로 내려간 직원을 재촉하는 전화를 보란 듯이 해보인 뒤 그럴싸한 미소를 지으며 안쪽
진열대에서 잘 포장된 제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고객님 이건 한 번 써 보시라고 드리는 상품입니다. 고객님과 같이 다양한 경험을 즐기시는 분들을 위해 개발된 최신 상품입니다.
이 상품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앙드레 장은 그야말로 미국에서 직수입된 에네로스를 망설임 없이 포장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파트너에게 대단히
너그러운 사람이며, 적어도 앙드레 장이 파악하고 있는 바대로 라면 그의 파트너는 애널 섹스를 제대로 즐기는 사람이었다.
원래 전립선 마사지용 의료 기구로 개발된 상품에 기발한 상상력이 가미되어 출시된 에네로스라면 그의 파트너를 충분히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남자는 다시 가게를 찾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앙드레 장의 인센티브가 천정부지로 솟구친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남자의 파트너가 가지는 성적 환상에 대해서는 차츰차츰 알아 가면 될 것이다. 성인들의 장난감은 하루에도 몇 개씩 새로운 제품이
생산되고 있고,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부류의 사람들은 색다른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앙드레 장의 예상대로 남자의 두려울 만큼 강렬한 눈빛은 이글거리며 앙드레 장의 손에 들린 에네로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홍콩행 왕복 티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한 번이라도 드라이 오르가즘을 경험해 보신 분이라면 확실하게
아찔한 즐거움을 느끼실 것이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드라이 오르가즘? 그게 뭔데.”
“사정하지 않는 사정을 뜻하는 말로 그러니까…….”
앙드레 장은 은근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저 남자는 난잡한 말을 소리 높여 이야기해도 되지만 판매자는 언제나 은밀하게 제품의
효용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 ‘딕 앤 딕’의 규칙이었다.
“뒤를 자극 하는 것만으로 꺼뻑 넘어가며 자지러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페니스에 대한 자극 없이 말입니다.”
“난 그 녀석의 양물 따위 건드려 본 적도 없다. 그 녀석은 매 번 뒤를 찔러주는 것만으로 질질 싸지.”
“그, 그렇습니까. 예.”
앙드레 장은 너무도 노골적인 남자의 말에 현기증을 느낄 지경이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물건처럼 환상적인 장난감도 없습니다. 예. 틀림없이 파트너 분께서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래? 그러면 그것도 사지.”
“아닙니다. 손님. 이것은 제 작은 선물입니다.”
“……?”
남자의 사나운 눈이 의심을 품은 채 앙드레 장을 훑어보자 그는 까무라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골 고객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일종의 영업인 셈이냐?”
“그, 그렇지요. 하하하.”
“고맙군. 어차피 마개는 많이 필요하니까 자주 들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고객님.”
앙드레 장의 심장을 발랑발랑 뛰게 만들어 놓은 남자는 수십 개의 플러그를 포장한 가방이 그의 손에 쥐어지자마자 계산을 끝내고
바로 돌아가 버렸다. 아침 개시부터 굉장한 재수라고 생각하며 그날 하루 종일 앙드레 장의 입이 귀에 가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