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의 손에 백사의 목이 잡혔다. 그것은 그냥 잡았다는 것보다는 틀어쥐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우악스러운 행동이었다. 거칠고
난폭하게 백사의 숨통을 거머쥔 광해의 얼굴에는 실낱같은 표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해보십시오.”
“네가 진짜로 미쳤구나.”
벼락같은 제석천의 호통이 뒤를 따랐지만 한 개의 결점조차 없는 천주되시는 분이라도 정인의 숨통을 거머쥐고 있는 광해 앞에서
섣부른 행동을 하지는 못했다. 숨통 잡힌 자가 반항이라도 한다면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아 광해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백사는 명줄을 남의 손에 맡긴 채 가만히 눈을 감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해 보라구요.”
“광해!”
무표정한 광해의 얼굴은 그림 같았다. 그림이 입을 열어 말하는 것처럼 어색하고 이상하게 그는 말하고 있었다. 미친 광해. 왈패
광해. 상종 못할 백룡 종족의 쓰레기 광해.
“해 보라니까요? 칠칠맞게 삼충을 흘리고 다니는 인간 따위 버려 보십시오. 자질도 되지 않으면서 용왕 자리에 앉은 미친 용 따위
금옥으로 보내 보라구요. 해보세요. 지금 당장 당신이 날 금옥으로 끌고 가라 명하셔도 그 너저분하고 지긋지긋한 절차라는 것이
끝날 때까지 나는 용왕이겠죠? 내가 동해 용왕이고 백사가 동해 용궁의 가족인 이상 너무 오래 산 백사의 명줄 끊어놓는 일은 일도
아닙니다. 그건 아시겠죠? 아니, 내가 언제 절차 따지고 명분 만들었소? 나야말로 미칠 광자 쓰는 광해 아닙니까? 아무 이유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백사 목을 분질러 놓는다고 그게 이상한 일입니까? 해봐요. 해 보라고. 한번 해봐.”
“네 이놈! 네가 감히 지금 누구 앞에서 그따위 행동을 하는 것이냐!”
“금옥에 가는 것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해봐. 대신 거기 들어가기 전에 당신이 영원히 고통스러워 할 상처 하나는
만들어 줄 생각이야. 이대로 맥없이 넘어지기는 너무 서운하잖아? 안 그래?”
“니가 아주 실성을 했구나.”
“원하는 게 그거 아니야? 내가 미쳐버리는 거. 미친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미쳐버리는 걸 원하는 게 아니냐고.”
“그래. 네가 단단히 미친 모양이야.”
“왜 시뻘겋게 눈을 뒤집고 침이라도 흘려줄까? 그러면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어 줄 거요?”
“그런데 왜 미친 거냐?”
지금까지 격하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는 것 따위 꿈이라는 듯 단박에 표정을 바꾸는 제석천은 탁자 위에 턱을 괸 채 말똥말똥 광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근대며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백사의 맥박만이 방금 전의 위태로운 상황을 유지하고 있을 뿐 제석천의
얼굴에는 요만큼의 긴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지간히도 잘 참고 있다 싶었는데 이 시점에서 왜 그 질긴 가면을 찢고 나한테까지 이빨을 들이대는 거냐 이 말이다.”
“……?”
모든 것이 너무도 평온했다. 숨통을 잡힌 백사도 정인의 목숨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의 제석천도 평소와 하나 다를 것이 없었다.
광해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능구렁이 같은 제석천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것은 그저 유흥을 돋우기 위한 전조에 지나지 않는
것 인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적어도 백사와 제석천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연심을 주었더냐?”
“…….”
“지극히 은애하는 정인을 위해 네가 지금 나의 백사를 죽이겠다 덤비는 것이라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으로 쳐주겠다. 네가 그 아이를 연모하고 있었던 것이냐?”
광해는 지금 담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백사가 백사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인형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제석천이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손바닥 안으로 느껴지는 백사의 맥박은 물론이고, 부드럽고 온화한 흰색의 기운 역시 백사의 것이 분명했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석천의 연인으로 살아낸 우렁쉥이 각시 백사가 아니면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기운.
하지만 백사라면 이런 상황에서 발발 떨며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그 아이를 버렸다는 말에 뚜껑이 열린 게냐? 정신이 나가버려 이 난동을 부리는 거냔 말이다.”
“내가…….”
“물론 알고 있다. 그간 네가 그 아이와 어떻게 놀아났는지 뻔히 보고 있었으니 너에게 그 아이만큼 맞춘 것처럼 잘 어울리는 놈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느냐. 그 아이의 마음을 모른다면 용부인을 들이고 천천히 데리고 즐길 수도 있지 않느냐? 단지 배가 맞아
놀아난 것뿐이라면 그리해도 될 것인데 안 그러냐?”
“…….”
“그 아이를 버리겠다는 말에 이렇듯 지랄 발광을 하며 개기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다.”
“저기!”
선견성의 주인 된 자로 앉아 근엄하게 말하고 있지만 저 문장들 사이에 뚜껑이며 지랄 발광이며 개긴다는 단어들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 것일까. 광해는 미심쩍은 눈으로 제석천을 흘겨보았다.
“데리고 즐기다 마음까지 통하면 처나 첩으로 들어앉혀도 아무 문제없을 것이고 말이다. 안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놈이
금옥에까지 가겠다고 말하면서 나의 백사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은 대체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냐. 응? 광해야.”
“…….”
입이 있으되 할 말이 없고 더군다나 지금의 광해는 너무도 혼란스러워 말하지 않는 것이 이로울 것이라 판단했다. 지금 꺼내는 말은
모두 본심일 수가 있다. 속마음을 꺼내놓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그의 금기 중에 하나였다.
“살아 남아라 광해야.”
“적자생존이 아니라 생자적존이다…….”
광해는 영문 모를 제석천의 말에 영문 모를 대답을 하였다.
그가 분노를 감추는 이유. 그가 미친 용 행세를 하며 구천을 떠돌던 이유. 그가 결코 속 깊은 곳에 스스로도 알지 못하도록 마음을
감춰두는 이유.
그것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저 말을 해준 이가 제석천 바로 눈앞의 이 분이셨다.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을 던져주시고
다시금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제석천의 뜻이 광해를 모질게 후려패고 있었다.
백사의 숨통을 조이던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모래 알갱이처럼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광해가 그리하려 해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 광해의 손에서 기운을 빼내고 있었다.
결국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저 사람. 광해를 미친 용으로 만들고, 광해를 용왕으로 만들고 광해를 살아남게
했던 저 분.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 거 같으냐.”
“용부인을…….”
광해의 의지가 아닌 말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쥐어짜는 것처럼 광해의 뜻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그는 숨을
멈추며 말을 막았다.
“내게는 널 금옥으로 보낼 생각이 없다. 네가 금옥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 아이도 삿된 것들의 노리개 감이 되어 비참한 경험을
하지 않을 게다. 그러면 네가 어찌해야 하는 거냐.”
“싫어.”
“나를 기만한 죄를 물어 금옥으로 보내줄까? 네가 금옥으로 간다면 용의 정이 흐려지는 대로 삿된 것들이 그 아이의 음란한 구멍을
탐하여 쉴 새 없이 유린하게 되겠지. 타고나기를 그리 타고 났으니 어쩌면 생각보다 오래 버틸지도 모른다. 인간의 정에 굶주린
그것들이 쉴 새 없이 그 아이를 간하는 장면을 네가 볼 수 있도록 해주마.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몸이 썩어
쫄깃한 구멍 맛을 보지 못하게 되는 그 순간까지 그 아이가 허덕이고 울부짖는 장면을 똑똑히 보게 해주마. 요새는 이쪽도
디지털 HD 방송이 되니까 솜털 하나 땀구멍 하나까지 잘 보이도록 5.1채널 음향 시스템이 갖춰진 홈시어터 룸으로 준비하라
할 테니까.”
“미쳤어?”
“살아남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생각해라.”
손가락하나 꼼짝할 수 없는 중압감이 광해를 짓누르고 있었다. 광해를 옭아매고 있는 저 말. 그리고 결코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
“이제 좌중들 앞에 나서 네가 뭐라고 해야 할지 알겠지?”
“…….”
“고집이 어지간해야 좋은 말로 설득하지 너 같은 놈은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고 협박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으냐. 그건 그렇고 백사야 괜찮으냐?”
꼿꼿하게 등을 펴고 앉은 광해의 눈이 살기를 담은 채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제석천은 그런 것쯤은 우습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빼앗기기 싫은 것을 들키면 안 되었다. 소중한 것은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것을 박탈당하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광해에게서 빼앗은 것을 소중하게 여겨주지도 않을 자들이. 광해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누리는 자들이 광해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을 빼앗았다. 빼앗고 희롱하다 버렸다. 그래서 광해는
미쳐야 했다. 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중한 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목숨까지 빼앗길 판국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숨기고
스스로도 알지 못하게 묻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을 들킨 것이었다. 제석천이 그것을 알았고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것을 빼앗을 수 있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광해를 기쁘게 하고 그를 흡족하게 만들고 그를 미치지 않을 수 있도록 잡아주는 그 안온한 것을 빼앗아 제멋대로
망가트려 버릴 것이다.
“눈치 챈 것이 나니 이 정도로 끝나는 게다. 행여라도 또 다시 속마음을 흘리고 다니면 그때는 선택의 여지도 없을 테니 그리
알아라. 선대 용왕에 대한 너의 의리는 기특한 일이다마는 이렇게 의지를 꺾이는 것이야말로 너에게 가장 좋은 교훈이 될 것 같으니
이렇게 한 것이다. 다음번이라는 기회는 없다. 언제나 원로원이 널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훗……. 흐흐흐흐. 으하하하하하하.”
“실없이 웃기는. 나가서 의관을 차려입고 오거라.”
최면에서 풀려난 듯. 금제에서 벗어난 듯 광해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자 제석천은 제 무릎에 백사를 앉히고 노닥거렸다. 얼어붙을
듯 긴장해 있는 방안의 공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의 제석천 앞에서 광해 또한 언제 살기를 띄고 있었냐는 듯
웃었다.
“감사합니다. 제석천님. 좋은 교훈을 또 얻고 갑니다. 옥좌에 올라 너무 긴장이 풀어졌는지 이 목숨이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이렇듯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미천한 놈 이만 물러가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래. 잘 가라. 참!”
“예?”
“그 목마라는 거 말이다. 백사한테도 효용이 있을까?”
광해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웃었다. 그의 눈은 시퍼렇게 번들거리고 있었고, 그의 살가죽은 실에 꿰어 당기듯 뻣뻣하게
주름이 졌다.
“글쎄요……. 그것은 소인이 직접 시험해본 연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물건을 팔았던 녀석이 한 말과 같이 죽고 못살도록 좋고,
또 숨이 끊어질 만큼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제가 한 벌 손수 사다 선물해 드리도록 하지요. 재미난 밤을 보내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 내가 예전처럼 인간 세상에 자주 나가지를 못하니 그리 좀 해다오. 나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 좋은 물건이 허다하더구나.”
“그럼 대연회장에서 뵙겠습니다.”
방안에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제석천과 쓸쓸하게 광해의 등을 바라보며 한숨 쉬는 백사만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