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실로 올라가자 시작된 것은 술판이 아니라 매타작이었다.
주작은 무식하게 광해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지만 광해는 꿈쩍도 하지 않은채 미리 차려진 술상 위에서 제 잔을 집어 들어 마셨다.
원래 단순무식하고 과격한 주작은 손버릇이 나빴고, 주작이 암만 후려쳐 봐야 광해는 끄떡도 하지 않을 만큼 맷집이 셌다. 만날
술 퍼먹고 도리천 유흥가를 패거리 지어 다닐 때부터 그랬으니 지금에 와서 왜 패는 거냐고 따져 물을 생각도 없었던 광해는
후끈후끈 열이 오르기 시작하는 주작에게 물을 끼얹으려는 백룡의 손짓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렸다.
“내가 예전부터 말하는 거지만 수증기 정말 싫거든?”
“저러다 쟤 또 녹는다?”
“요즘은 그런 스킬도 익혔냐?”
“저번에 영보 만났을 때부터 과하게 흥분하면 흐물거리며 녹던데?”
오랜 친구들은 이글거리며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주작은 아랑곳도 없이 한가롭게 술잔을 나누며 담소를 즐겼다.
“이 씨발 새끼야. 뭐야! 대체 뭐냐고! 우리 전부 물 나이트 불려가 개고생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천년동안 코빼기 한번
안보여주고 말이다. 응? 내가 네 놈이 천년 전에 용왕이 되었으면 말도 안한다. 바빠서 그랬겠거니. 짬이 안나 그랬겠거니.
하면서 틈 나면 오겠지. 여유 생기면 보겠지 했을 거다. 이놈아!”
퍽. 퍽. 퍽.
정말 모지락스럽게도 광해를 후려패는 주작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광해의 푸른 비단옷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진심을 다해 때리는 것인데도 광해는 꿈쩍하지 않았다. 원래 주작의 불길이라는 것이 상처 입히고자 마음먹지 않는다면
그저 따뜻하기만 할뿐이고, 더군다나 광해가 지금 용왕이며 그 이전에도 용이었으니 작정하고 싸우고자 들지 않는한 맞는다고
아프기나 하지 다칠 일이야 있겠는가.
“그런데 뭐냐고! 뭐냐고! 이 미친 용가리 새끼야. 태수 이야기 들어보니 아주 가관이더라. 뭐? 이제 우리가 널 잊은줄 알았다고?
씨발 아주 지랄을 해라. 지랄을 해. 쌍놈에 새끼. 광해에 광자가 다른 광자가 아니다. 니놈이야 말로 제대로 미친 놈이야.
썅! 잘못했다고 안 빌어? 이래도 안빌어?”
아무도 발광하는 주작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신수가 훤하다. 재미진 일이라도 있는 거냐?”
“흐응…….”
“어? 진짜 그러나 보네? 요즘 장난 아니게 시달리고 있을텐데……. 원로원에서 아무 말도 안해?”
“왜 안하냐. 아주 노인네들 망령이 나도 단단히 났지…….”
천년만에 만나도 어린 시절의 벗들은 하나 새로울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지만 서로의 익숙함을 잊을만큼
긴 시간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본다는 말도 없이, 그간 보고팠다는 인사도 없이. 그리고 어째서 그동안 적조했는지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사방신과
광해 그리고 백룡 용하는 낄낄대며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눴다.
아래층 일을 마쳤는지 현무가 돌아오자 후텁지근하던 방안의 공기가 쾌적하게 바뀌었다.
“나 빼고 먼저 마시고 있냐? 의리 없는 것들아?”
“일벌레가 일보고 덤비는데 언제 끝날 줄 알아서 기다리냐. 앉아라.”
“얘는 또 왜 이러는 거냐?”
“으하하하하. 진짜 녹네? 뭐냐 이거. 새로 익힌 재롱이냐? 주원아. 어이! 주원아…….”
흐물흐물 방바닥에 눌러 붙은 주작의 입만 불그레 죽죽한 점액질의 덩어리 위에 떠 있는 채로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인마. 나름 그 재롱도 참신하다만은 나는 요즘 다른 재롱에 빠져 있어서 좀 숭하다. 일어나라.”
광해는 가장 열정적인 기질을 갖고 있는 오랜 벗의 흔적을 툭툭 쳐댄 뒤 곰방대를 꺼내 길게 한모금 들이켰다.
동은 그의 연초 냄새가 좋다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신수들은 그가 피워대는 독한 연초 냄새를 싫어했다. 청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그의 연초는 도리천의 저자거리에서 막노동하는 자들이나 피우는 싸구려 하질의 연초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독 저것에 집착하는 광해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모두 독한 냄새에 코를 찡그릴뿐 그것에 대해 시비를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 너희들의 황룡은 안 데리고 온 거냐? 한번 보고 싶다 그랬잖아.”
“학원 갔다.”
“엥?”
온갖 산해진미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놓은 음식을 먹으며 현무 태수가 쌀쌀맞게 말하자 그때까지 흐물흐물 녹아있던 주작이
벌떡 일어섰다.
“나쁜 놈 쉐이 애 좀 놀게 내버려두지…….”
“넌 장가 안갈 거냐?”
현무 태수는 궁시렁대며 잔소리를 하려는 주작의 말을 싹뚝 자르고 정색을 한 채 광해를 보았다.
지금 현재로서 광해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저 ‘장가 가라’는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용부인을 들이라는 말이고, 돌려 말하면
혼기가 꽉 차고 넘쳤으니 이제 짝을 찾으라는 것인데.
광해는 깊게 연초 연기를 들이마시고는 그저 고개를 숙인채 연거푸 술잔만 들이키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말하면 잔소리로 취급하면 되고, 망령난 소리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가볍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해 용부인 자리가 비어 있으니 지금 유서 깊은 가문에서 온통 처녀단자를 보낸다고 난리도 아니다. 이 소동을 언제까지 남의
일인 것처럼 보고 있을 거냐.”
“…….”
“용부인 없는 용왕은 그야말로 거기 앉아있는 것일뿐 권리도 권한도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잖냐.”
“그래. 광해야. 다들 네가 뭐 때문에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지독히도 우리나 널 싫어하는 원로원에서도 강권하는 일을 어째서 기를 쓰며 도망만 다니는 거냐. 용부인이 있으면 더 이상 너의
자질 문제는 언급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백룡 용하만 빼고 사방신은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며 광해를 들쑤셔 놓았다. 광해는 씁쓸하게 웃는 얼굴인채 자신을 보고 있는
백룡에게 눈길을 주더니 눈썹을 슬그머니 치켜 올리며 웃는게 아닌가.
“넌 뭘 알아서 입 다물고 있는 거냐?”
“뭐…….”
“알면 설명 좀 해주지? 나는 사실 뭐…….”
“쟤들이 제 잇속 계산하면서 너한테 용왕 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니까 니가 설명해도 별 무리는 없을 거다. 니가 모르는 부분은
내가 설명해 주지.”
“뭐야! 뭔가 사정이 있는 거야? 이런 썅! 그런게 있으면 좀 나불대! 응? 좀 나불대고 살라고. 대체 언제까지 속이 시커멓게 타도록
아무 말도 안하고 참고만 있을래. 아직도 니가 저자거리 왈패 미친용인줄 아냐?”
퍽!
이번엔 광해의 머리가 휘청하고 꺾일만큼 위력 있는 펀치였다.
그는 뒷통수를 문지르며 주작을 보았지만 그 눈에 원망이나 부아 같은 것은 한점도 섞여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말이다. 나한테 용왕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놈이 하나라도 있으면 당장 아무나 용부인으로 들이마. 그렇게
생각하는 놈 있냐?”
“……?”
“…….”
“흐음…….”
“어?”
광해는 만족스러운 듯 웃고는 모두의 빈 술잔에 술을 따라 건배를 권했다.
“조카님이 돌아올 때까지 내가 용궁을 말아먹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냐? 동해 용궁을 위해 건배.”
“광해.”
“광해야…….”
“미, 미친놈!”
“나.”
광해의 말은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자신은 그저 잠시 그 자리를 맡아주고 있을뿐 원래 주인이 돌아오면 두말없이
비켜주겠다는 뜻을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무 태수는 광해가 치켜 올린 술잔에 제 것을 갖다 부딪히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광해에게 능히 용왕될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뭐라고 했냐?”
“이중 하나라도 네가 용왕될 재목이라 생각하면 용부인을 들인다 했으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난 네가 충분히 용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이?”
“무릇 비늘 가진 모든 것들의 왕이 용이다. 허나 그렇기 때문에 용정이었을 때도 교룡이었을 때도 세상의 어느 것보다 무기력하고
약하지. 용들이 제 새끼를 금쪽 같이 아끼는 이유도 거기 있는 거 아니냐? 버려진 용정으로 알을 깨고 나와 혼자 힘으로 교룡
시절을 살아낸 너야말로 진짜 왕이 될 수 있는 자다. 내 영보가 황룡의 자질을 넘치도록 가져 아직 그 선택을 하지 않았음에도
우리들 모두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처럼 너 또한 왕이 될 자가 가져야 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
“…….”
광해는 곰방대를 입에 문채 넋을 놓고 벗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
지금 현무 태수를 넋 놓고 바라보는 것은 비단 광해만이 아니었다. 사방신들은 물론이고 백룡 용하마저도 의미심장한 현무 태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현무 태수는 그런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가 왜 이렇게 변했냐. 창준아. 호민아. 그리고 주원아. 저게 내가 아는 현무 태수가 맞는 거냐?”
“그런 의미라면 나도 광해만큼 왕될 자질을 갖춘 자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
부드러운 은색 머리카락을 겸연쩍은듯 쓰다듬으며 백호 호민이 말했다.
그는 광해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현무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영보를 생각하면 동해 용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진정한 왕을 갖게 된 셈이지. 응. 나도 광해 네게 용왕될
자질이 차고 넘친다 본다. 나 역시 태수의 의견에 찬동한다.”
청룡 창준마저도 비장한 얼굴로 현무의 의견에 동조하자 광해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자이지만 마음이 없기 때문에 누구도 다가갈 수 없었던 현무 태수의 발언도 광해로서 적응하기 어려운
변화였지만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의 황룡에 대한 사방신의 절대적인 신뢰와 애정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 임한 자만이 가장 높은 곳으로 갈수 있는 거다. 네가 진짜 지금 앉아있는 자리를 잠시 맡아두고 있는 것일 뿐이라
생각한다면 차라리 버려라. 우리는 불완전한 사방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기다리는 일 밖에 할 수 없었지만 네가 용왕이 된 것은
네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네가 선택한 이상 제대로 할 생각이 없다면 오랜 벗으로서 충고하는데 차라리 버려라.”
“태수…….”
주작을 제외한 모든 사방신이 광해가 평소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을 하자 광해는 태수를 부르며 주작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태수와는 가장 반대되는 성향을 띄던 그였기에 그만큼은 다른 의견을 내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대체 너희들의 황룡은 어떤 자냐…….”
광해는 나지막하게 속삭였지만 무거운 분위기를 깨치며 다시금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마시고 죽자 분위기에 편승하여 모든 의문을
마음 한켠으로 밀어둬 버렸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고, 오랜 벗들의 권유는 시간이 날 때 천천히 생각하면 그만이라고 판단했던
것 이었다.
선대 용왕이 창졸지간에 비명횡사하여 옥좌가 공석이 되자 만대의 충신이라 할 수 있는 자라 가문의 별하가 전전대 용왕께서
남기셨다는 기록이 있는 용정을 찾아 세상을 헤매고 어쩌고 한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이다. 그 용정이 지금 눈 앞에 있는
광해이고, 그 광해를 찾았으니 옥좌는 비워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후손 없이 비명횡사 하였다고 알려진 그 동해 용왕이 남긴 용정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선대의 용부인이셨던 구미호 이수가 가까스로 그 용정을 껴안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자가 드물었으니
말이다. 지금 현재 동해 용궁에서 광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신료들은 바로 그 점을 들어 광해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옥좌에는 앉았으되 용부인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그가 용왕이 아니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용궁의 모든 권력체계는 용왕과
용부인이 모두 있어야 비로소 안정되는 것으로 용부인이 없는 용왕이 없고, 용왕이 없이 용부인 만으로도 옥좌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용부인이 있는 한 용왕은 종신직이고 세습직이었다. 어떤 핏줄로도 당대 용왕의 자손이 아닌자가 옥좌에 앉을 수 없고, 어떤 명분의
쿠테타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불변의 지고지순한 자리였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용부인으로 완성되고 마무리 지어졌다.
광해가 용부인을 들이지 않는 것은 불완전한 용왕으로서 반란이나 역모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고, 광해가 용부인을 들인다면
선대 용왕의 자손이 장성하여 나타난다고 해도 그는 결코 옥좌에 앉지 못한다.
광해가 장가들지 않겠다 버티는 이유와 그의 오랜 벗들이 그에게 장가 들라 강권하는 이유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가운데에서도
백룡 용하는 그저 빙그레 웃는 얼굴로 광해와 사방신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