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할 수 있으십니까?"
트렁크에 물건을 싣고 차문을 열자 광해는 저도 모르게 스멀스멀 입가로 기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차문이 열려도
실내등이 켜지지 않도록 해놓은 것인지 어둠 속 앉아있는 동이었지만 그가 얼마나 애를 닳아하며 할딱였는지 차 안의 공기가
한참은 더워진듯 했기 때문이었다.
"왜."
"전 도저히 운전 못할거 같은데요?"
"뒤가 발씬거려 못참을 정도인 거냐?"
"얼굴만 가릴 수 있다면 길가에서라도 당신을 덮칠거 같습니다."
"하하하하. 그래. 이제 어디로 갈까. 내가 운전할테니 이쪽으로 건너와라."
광해는 순순히 운전석으로 올라타고 나서도 한참동안 큰소리로 웃었다.
밤새 손님 받고 새벽 나절에 잠깐 졸았는가 싶었는데 다시 아침 해장 손님들이 들이닥쳐 정신없이 바빴던 별하는 겨우 아침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고 완전히 녹초가 돼서 늘어져 버렸다.
사실 곰치 영진이 주방에 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단 교대할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어떻게든 버텨온 일과가
어찌나 힘들고 고되던지 그저 팍 주저앉고 싶었던 심정이었다.
비몽사몽간에 도마를 소독하고 팽준이가 데려온 아이들한테 대충 주방 설비나 식기들이 어떻게 정돈되어있는지를 설명하고 나니
벌써 아침이 훌쩍 지나가버리고 있었다.
해는 분명 동천에서 떠야 하는데 그날 해는 광동수산의 주방에서 떴다. 적어도 별하는 그 사람이 주방으로 내려오면서부터 주방에
해가 떴다고 생각했다.
아름답고 고귀한 해님이. 심장이 발딱발딱 제정신을 못차리고 콧구멍이 발씬발씬 오금이 저리도록 오매불망 그려왔던 내님이 이
천하고 씨발스러운 생선 도살장에 강림해 주신 것이었다.
"누, 누구세요……."
말은 그리 하였어도 별하의 눈은 벌써 초점이 풀려 해롱거리고 있었다.
"별하야……."
"누구신데 주방에 오셨나요? 손님 주방에는 들어오시면 아니되어요."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오적어 팽준과 다른 오적어 가문의 아이들은 모두 간드러지는 별하의 음성에 왝왝대며 반발심을 표했지만
별하는 그런 것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나 영진인데……."
"애헤헤헤. 장난치지 마시구요오."
이제 몸까지 베베 꼬며 얼굴을 붉히는 별하가 심각하게 아픈게 아닌가 걱정 되었던 영진은 그의 손을 덥썩 잡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별하야. 어디 아프냐? 너무 무리해서 병이라도 난 거냐? 왜 이렇게 제대로 일어서 있지도 못해. 응?"
"저 아픈데 하나도 없어요오. 그런데 손님은 누구세요? 여긴 정말 내려오시면 안되걸랑요?"
"별하야 나 영진이야. 영진이. 곰치 영진이."
별하는 초점 없는 눈동자 침이라도 흐를 것 같이 헤 벌어진 입을 한 채 가볍게 휘황찬란한 미남자의 가슴을 톡! 하고 애교스럽게
건드렸다.
"에에이! 왜 이러시와요. 그 음흉하고 시커멓고 우울한 놈이 이렇게 잘난 분과 동일 인물일 리가 없잖습니까요오----. 그 새끼는
주둥이가 사발만 하고 시커먼 머리털로 얼굴을 다 가리……."
"별하야. 나야 나. 태수 어르신이 주방에서 일하려면 머리를 단정하게 하라고 해서 묶었어. 별하야. 응? 이래도 나 못알아 보겠어?
너 진짜 어디 큰 병이 난거 아니냐?"
영진은 애간장이 녹도록 걱정이 되어 아침 나절 내내 공들어 빗어 묶은 머리를 단숨에 풀어 내렸다. 궁의 업무를 보랴 24시간
광동 수산 주방 일을 하랴 지난 반년동안 별하가 징그럽도록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었던 자신이 찢어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영진이었다.
이렇게 정신도 못차리고 헛소리를 하면서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데 병이 나도 단단히 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의원! 의원을 불러. 팽준이 너 뭐해?! 어서 의원을 불러!"
"어버버버……."
"별하야. 정신 차려. 별하야."
곰치는 조용하지만 영진은 용감했다.
그는 풀썩 주저앉아 버린 별하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채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팽준을 독촉했고, 팽준은 날래게 수족관으로 달려
용궁으로 의원을 부르러 사라져 버렸다.
"별하야. 별하야……. 날 두고 죽으면 안돼. 별하야. 너 없으면 내가 어찌 살라고 아픈 거냐. 응? 별하야 정신 좀 차려 봐라. 응?"
"이……. 이……."
"별하야. 나를 좀 봐. 응? 나야. 곰치 영진이야. 별하야……."
"이 씨발 새끼. 너……. 너 곰치!"
"별하야 정신이 들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려 영진은 별하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여느때처럼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영진의 멱살을
틀어쥐자 그는 소중하게 무릎으로 별하의 등을 기대주고는 급하게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묶었다. 위생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눈에
봬는게 별하 밖에 없으니 대충 그리한 것이라고 해도 영진의 얼굴이 훤하게 드러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쓰라린 사나이의 눈물이 굵게 방울져 영진의 뺨위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하아……. 고……곰치. 영진이……."
"그래. 별하야.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어디가 아픈 거냐. 무슨 병이 난 거야. 조금만 기다려라. 팽준이가 의원을 부르러 갔으니
곧 올 거야. 별하야. 응? 조금만 참아."
영진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자 눈꼬리가 치켜올라가던 별하의 표정이 그가 머리를 묶자 다시 헤롱헤롱 풀어졌다.
별하는 그리하고 싶지 않아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꿈에서도 그리던 꽃미남이 코 앞에 있는데 욕이 어찌 나올 것이며 화가 웬말인가 말이다.
선견성에 선녀들 중에서도 이렇게 잘난 얼굴은 보지 못했고, 미색이 출중하다는 현무 태수 어르신도 이렇게 맞춘듯 별하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곰치 영진이라니…….
그 암울하고 음침한 곰치 영진이 원래는 이런 얼굴이라니…….
영진과 마주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별하였지만, 그가 내미는 자라 엑기스를 똥덩어리 보듯 내팽개친 별하였지만 지금부터
그럴 수 있겠냐고 누가 묻는다만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곰치는 진저리가 쳐지도록 싫지만 당장 눈 앞에 너무도 잘난 이 남자는…….
별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제 가슴을 탕탕 쳐댔다.
"별하야. 왜 이러냐. 가슴이 아파? 응? 대체 왜 이러는 거냐. 흐으윽!"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별하의 턱이며 뺨을 적시는데 이게 꿈이라면 황당할 노릇이고 생시라면 가혹할 노릇이었다.
대체 이 화상의 낯짝이 이런 줄 알았다면 그동안 구박을 좀 작작 하는 건데 하는 후회가 물 밀듯 밀려오고 있었다.
"별하야. 너 없이는 못산다. 제발 죽지 마. 으흐흑! 별하야. 내 목숨을 가져가고 너는 살아라. 응? 내가 널 보내고 어떻게 사냔
말이다. 별하아아. 어흐흐흑!"
아주 통곡을 해라 통곡을…….
곰치를 생각하면 삐딱한 말이 절로 나오지만 그것조차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에 막혀 별하의 목구멍에 머물렀다.
인연이 먼데 있는 게 아니라더니 매일같이 부모 때려죽인 웬수 보듯이 힐시 했던 곰치 새끼가 오매불망 그리던 자라 별하의
인연인가 하며 몇 번이나 더 가슴을 치던 별하는 영진의 얼굴을 보며 봄날 눈 녹듯 흐물흐물 해져서 맥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내 팔자야. 내 팔자야. 자라 백정 곰치는 싫어도 이 놈이 오백년 동안 간절히 바라고 그리던 내 님인 것을 어쩌랴. 아이고
내 팔자야…….'
별하는 이제 아예 대놓고 엉엉 울고 있는 곰치의 가슴 속으로 포옥하니 안겨 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경계하고 미워했던 것을 생각하면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이다 욕하는 자도 있겠지만 혼기에 접어든 오백년 전부터 자라 별하가
꿋꿋하게 지켜온 정인의 조건은 단 한가지였다. 오백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했던 그 님이 바로 코 앞에 있는데 자존심은 별하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게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광동수산의 주방에 봄이 오고 있었다.
경기도 후미진 곳에 있는 외가쪽 별장이란 곳에서 재미진 주말을 보내고 미적거리는 동을 출근시킨 광해는 가게로 돌아오자마자
반가운 얼굴들에 둘러 싸이게 되었다. 그들이 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천년 만에 만난 그들이 조금도 변함없이
부드러운 애정을 담고 있다는 사실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한차례 손님이 그은 광동수산의 입구에 서서 미간을 찡그린 채
서있기만 해야 했다.
자신은 용왕이 되었고, 그들은 황룡을 얻었다. 아니, 아직 황룡이 되기로 선택한 것은 아니라 하니 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사방신과 관련 없는 용하 또한 그 팔 안쪽에 안겨 있는 새끼를 얻었으니 그들 중에 변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찡그리고 선채 꼼짝도 하지 않는 광해와 그들 사이에는 변함없는 신뢰와 애착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얼빠진 놈…….”
새빨간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는 주작이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손은 망설임 없이 광해의 손을 잡아끌었다.
“미친 용가리 새끼 하여간에 뻐덩뻐덩하기는 태수 저리 가라라니깐? 뭐 하고 섰어. 올라가자.”
우격다짐으로 끌어당기는 뜨거운 손과 등 뒤에서 밀어대는 여러 개의 체온.
“야. 미친용.”
“아…….”
“내 딸래미.”
덥썩 내미는 못생긴 어린애도 떠안아야 했던 광해는 자신의 품에 안기자마자 ‘뿌직’하는 소리를 내며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을
싸놓은 그것의 만행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용정태를 벗은 교룡의 배설물 냄새가 지독하기는 만인이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뭐냐. 이 똥자루는.”
“말했잖아. 내 딸래미.”
광해는 저절로 입가가 당겨지는 느낌을 애써 참으며 따끈따끈하고 묵직한 애새끼를 멀찌감치 들고 인어 아가씨를 불렀다.
“이번아. 이 똥자루 궁에 가서 데리고 놀아.”
“예, 예? 사장님 뭐라고…….”
“궁에 데리고 가서 놀고 있으라고. 지금 애 어미가 술 배 고파 눈 뒤집혀 있는 거 안보이냐? 어린애를 어른들 술판에 앉혀둘 수
없으니까…….”
암만 교룡의 똥냄새가 지독해도 포동포동하고 야들야들한 어린애에 환장하는 인어 아가씨들은 로또당첨 같은 행운을 품에 안은
이번 아가씨를 시샘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저마다 저 아이와 같이 궁으로 가서 한갓진 한때를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들이었다.
“오늘…….”
정말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광해도 친구 귀한 것을 알고 반가움에 일탈할 때가 있었다. 돈이 아무리 좋아도 아주 가끔은
이럴 때가 있는 게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니까 말이다.
“장사는 접는다. 별하더러 앞으로 홀에서 일할 인간 종업원 이력서 받은거 있으면 몰아서 면접 보고 내일부터 출근 시키라 그래.
니들은 전부 궁에 가서 놀아.”
“헉! 사, 사장님.”
“마음 바뀌기 전에 다들 꺼져. 올라가자. 위에 큰 내실은 우리 다 들어가도 될 정도니까.”
휘적휘적 팔을 저으며 계단참을 향하는 광해의 손은 여전히 주작이 꼭 붙들고 있었다. 청룡과 백호가 그 뒤를 따르고 홀가분하게
애를 맡긴 백룡 용하도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광해를 보며 미소 지은 채 한숨을 내쉬던 현무 태수 만이 홀에 남아 용궁 식구들의 경악을 위로해 주었다.
물론, 그조차도 빠르게 궁으로 돌아갈 자와 잠시 더 가게에 머물러 있으면서 급하게 처리해야할 일을 지정해 준 뒤 이층에 있는
내실로 향해 버렸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