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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차를 세운 곳은 어느 빌딩의 지상 주차장이었다. 관리인이 뛰쳐나오면 여기 차를 세우면 안된다고 큰 소리를 치더니 동이
차창을 내리고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마치 신호와 같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관리인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몇마디 인사를 건네였지만 그것에도 동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광해는 시종일관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그런 행태를
지켜보기만 했다.
"화상통화 하실 줄 압니까?"
"흐응?"
"핸드폰이요."
"아. 이거?"
인간 세상의 과학문물에 대해 전혀 모르지는 않아도 광해는 그것에 익숙하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만들어야 한다길래 만들어
두기는 했으되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거 말고는 도통 쓰는 일이 없었다. 사실 걸려오는 전화도 벨 소리를 듣지 못해 놓쳐 버리기
일쑤였다.
"잠시만 줘 보시겠습니까?"
"그래라."
소매자락 안쪽에 넣고 다니기는 하지만 무겁지도 않고 걸리적거리지도 않아 잊고 다니기 딱 좋은 조그만 기계는 동의 손으로 건너가
익숙하고 신속하게 다뤄졌다. 몇차례 조그만 기계를 다루던 동이 고개를 들고 방긋 웃자 광해는 그 모양을 보고 덩달아 웃어 주었다.
까칠하게 생긴 녀석이 가끔씩 저렇게 환하게 웃으면 그저 냉큼 삼켜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화상통화가 신청되어 있네요. 사용해 보신적 없으십니까?"
"그게 뭔대."
"그러니까……."
동은 빠르게 번호판을 누르고 다른 버튼들을 누르는가 싶더니 전화기 화면을 광해에게 내밀어 보여주었다. 신호 연결이 되고 있다는
화면 아래쪽에 제갈동이라는 이름이 뜬 것을 신기하게 보며 광해는 이게 네 번호냐고 물었고, 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작고 검은 구멍 같은게 카메라 렌즙니다."
대시 보드 위에 올려져 있던 동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하자 그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광해의 것보다는 조금 크지만 광해의 눈에는
제 것이나 동의 것이나 부실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동이 통화버튼을 누르자 전화는 곧 연결되었다. 바로 곁에 사람을 두고 손전화로 뭘하는가 싶어 광해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했다.
"여긴 어둡군요……."
작게 중얼거린 동이 차량의 실내등을 누르자 광해의 핸드폰에는 커다랗게 확대된 동의 얼굴이 나타났는데 그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 화면에 나타난 것과 똑같은 표정의 동이 있었다.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군. 인간들은 참 기특한 것을 잘도 만들어낸단 말이야."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흐응?"
동은 실내등을 끄고 두 개의 전화기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통화를 끊어버린 뒤에도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하고 연애를 하는 거라든지 놀아나는 것에 관해서는 제 개인의 기호와 판단이겠지만 제 행동으로 인해 집안에 누를
끼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입니다."
"……?"
"제 아버지가 정치를 하십니다. 그리고 전 외동아들인데다 어머니는 꽤 유명한 사업가라서 제 얼굴을 아는 사람이 꽤 됩니다."
광해는 마음속으로 꽤 그럴듯한 집안이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세상에서 정치를 하는 자의 집안이 용왕된 광해의 입장에서 별반 대수로울 것은 없지만 그래도 밑구녕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자손보다는 듣기도 보기도 좋으니 아무렴 어떠냐 싶었던 것이다.
"여기 이층에 딕 앤 딕이라는 샵이 있습니다. 혼자 올라가서 사가지고 오시겠습니까?"
"뭐?"
"말씀드렸다시피 얼굴을 아는 사람이 꽤 있는데다 여기 외조부님 소유의 빌딩이라서 그렇습니다. 제 개인적으로야 당신과 함께
올라가 사고 싶은 것이 많지만 그 일로 인해 집안에 피해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흠……."
나름 기특한 면도 있다. 광해야 별하가 자신을 찾았을 그때까지 세상 천지에 버려져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이 필연적으로 가져야 하는 보호와 훈육의 대가를 모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동이 잘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이 없는
과거를 살아올 수 있었다면 다소간의 불편이 따르더라도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광해는 납득했고,
그리고 수긍할 수도 있었다. 다만 겨우 인간 세상의 정치가 따위의 집안 체면을 내세워 동해 용왕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작태가
조금 아니꼬울 뿐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청담동에 20층 넘는 이정도 규모의 빌딩이 외조부의 것이라는 말은 광해를 정치가 운운하는 말보다 더 쉽게
이해시키고 있었다.
자고로 돈이 최고라 믿고 있는 광해였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이 체면치례를 따지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돈벌이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고약한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는 것은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것은 제갈동의 아비가 현직 외교부 장관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갈동의 외가가 갑부이기 때문이었다.
"부탁드리자면……."
"응?"
"화상 통화로 고르시는 상품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아! 아까처럼 말이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사실 같이 고르고 싶거든요."
광해는 비열하게 낄낄댔다.
"그게 뭐 어렵겠냐. 어차피 니가 쓸 물건이고 나한테 소용되는 물건이 아닌데. 아까처럼 만들어 봐라. 낱낱이 보여주며 골라보자."
동은 다시 한 번 방긋 웃었다. 흐린 주차장의 불빛에 비친 그의 미소는 아무런 걱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것처럼 화사했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이어폰 두 개를 꺼내 광해의 핸드폰에 연결해 주고는 그것을 광해에게 내밀었다.
"올라가시면 제가 전화 드리겠습니다. 꼭 자세히 보여주셔야 합니다."
"알았다. 알았어. 후훗……."
기쁜 일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설레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동을 남겨둔 채 광해는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의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가 '딕 앤 딕'이라는 상호 아래 부드러운 오렌지 빛 조명이 새나오는 샵으로 들어간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