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35)

영진은 낡은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건강원으로 돌아가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홈페이지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내일부터 가엾은 

별하를 위해 건강원에 있는 시간보다 광동수산의 주방에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늘리려면 몇가지 처리해 두어야

할 일들이 생각났던 것이다.

전화주문을 자동응답이 되는 시스템으로 고쳐놓고 홈페이지에 물건 주문표와 발송안내 같은 것의 메일이 PDA로 직접 들어오게 바꿔 

두었다. 원래 엑기스나 과일 야채의 즙이라는 것이 일정 시간은 지나야 물품이 만들어 지는 것이니 주문자들의 대부분은 

그리 성격이 급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영진의 건강원에서 엑기스나 즙을 주문해 먹는 인간들은 그 품질의 뛰어남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때로 주문한 물건을 구하기 힘들어 발송이 늦어진다 해도 타박하거나 불평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제대로 된 

가물치나 잉어를 구하기 위해 상품 도착이 늦어진다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광동 수산의 주방에서도 주문과 결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 영진은 오늘 발송해야 하는 물건들의 파우치를 박스에 담아 택배 

송장을 붙이고 나서 택배 기사가 가져갈 수 있도록 컨테이너 한켠에 설치해 둔 자물통 달린 상자에 그것들을 넣는 것으로 오늘 

일과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거울 속에 비춘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음흉하고 어두워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어쩌랴. 곰치로 태어나 곰치로 살다가 간신히 깨달음을 얻어 영성을 갖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진은 곰치였고 밝은 곳을 질색하는 본성도 바뀌지 않았다.

인간 세상에서 돈 좀 벌어보겠냐는 광해의 꾐에 넘어가 건강원을 차리기는 했지만 밝은 곳으로 당당하게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도 그 탓이었다. 남들은 답답해 보인다 질색하지만 영진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예민한 눈으로 들어오는 

자극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말이다. 태양의 빛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인간 세상은 너무 밝고 시끄러웠다.

"묶는 게……. 제일 낫겠지?"

별하의 곁에서 별하를 도와줄 수 있다는데 눈이 아픈 것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줄 수가 있었다.

나는 평생 자기 반려 얼굴만 뜯어먹고 살아도 좋다고 언제나 호언장담을 하던 별하를 위해서라면 아파도 얼굴을 뜯어 먹히는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생각하는 영진이었으니 눈이 아픈 게 대수겠는가.

내일 해가 뜨자마자 광동 수산의 주방으로 달려가야 겠다 다짐을 하며 영진은 다시 한 번 홈페이지를 점검한 뒤에 이례적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동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예쁜 여종업원의 얼굴을 보며 저절로 그녀와 비슷한 웃음이 지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가 기분 나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가장 유쾌하다 싶을 만큼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그의 아침은 뜨거웠고, 

그의 오후는 기대로 가득차 설레었으며 그리고 그의 밤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혹시 초밥이 될까요?"

"초밥이요? 물론이죠. 어떤 초밥을 원하세요?"

"간단하게 포장해 갈 수 있는 거면 좋겠는데. 사실 여기서 식사할 생각은 아니고 누굴 만나러 왔거든요."

"포장 말씀이세요? 녜. 해드려야지요. 초밥은 아직 정식 메뉴에 올라가 있지는 않지만 재료들은 모두 있으니까 원하시는 것으로 

말씀해 주시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참. 몇인분 정도 필요하시죠?"

"이인분 정도일까요?"

오늘로 이곳 광동수산은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그는 지금까지 오늘처럼 활기차 보이는 종업원 아가씨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몹시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지만 언제나 지치고 주눅이 든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죄송하지만 제가 초밥을 먹어보기는 했어도 거기 뭐가 들어가는지 잘 몰라서 말입니다.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기억났다. 지난번에 내실에서 식사하셨던 분이시죠?"

"……?"

"굉장히 많이 아파 보여서 제가 사장님한테 좀 살펴보시라고 말씀드렸던 그분이요. 맞죠?"

아마도 종업원 아가씨는 그가 광동수산에 처음 왔던 그날 조용한 자리를 찾는 그에게 내실을 권해준 그 아가씨였던 모양이다.

"아……."

"몸은 좀 어떠세요? 정말로 많이 아파 보였는데."

"덕분에 살았습니다. 신경 써주신 분이 그쪽이었군요. 감사합니다."

"아니 뭘요. 호호호"

금요일 저녁 쉴새없이 들이닥치는 손님들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맑은 종업원 아가씨의 웃음소리는 기분 좋게 동의 신경을 

누그러트리고 있었다.

"일단은 생선회로 만든 초밥이 있구요. 소라나 새우 같은 걸로 만든 초밥도 있구요. 계란이나 김초밥도 있는데 그건 시키지 마세요. 

주방장이 어패류 전문이라 그런 건 맛 없어요."

"그럼 그쪽에서 적당히 이인분만 주문해 주시겠습니까?"

"그럴까요? 특별히 싫어하시거나 알러지가 있는 건 없으시죠? 그때 보니까 음식은 가리지 않으시는 것 같았는데."

"초밥에 복숭아가 들어가는 거 아니면 다 괜찮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얼른 포장해서 갖다 드릴께요."

그녀가 계단참으로 사라지자 동은 사람들의 소음 속에 혼자 남아 멍하니 광동 수산의 내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정신없이 

먹기만 했고, 한번은 일 때문에 온 것이니 한가롭게 이 가게를 둘러보거나 할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한쪽 벽면에 거대하다 싶을만큼 다양한 메뉴판이 벽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 위에 '외상 사절.', '무전 취식 절대 금지.', '술은 1인당 소주 1병까지.'라는 따위의 험악한 문구는 꼭 광해를 닮아 있었다. 

자연산 100%만 취급한다는 상투적인 문구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지만 실제로 자연산 횟감을 사용하는 집은 많지 않다. 

광어를 팔지 않는 횟집도 없다. 광동수산은 그런데 그 특이한 차이점을 모두 갖고 있었다.

외상도 안 되고 술도 취하도록 마실 수는 없다. 안과장 말에 따르면 내실에서는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한 제한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적어도 홀에서 만취해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가게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날 

자신이 내실로 안내되어 간 것이 매우 특별한 경우라는 사실을 오늘 알 수 있었다. 이층에 있는 내실로 올라가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고, 번호표를 받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게 앞에 줄을 서 있어도 종업원들은 그들을 내실로 안내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실로 올라가는 계단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런 모양새를 갖고 있었다.

저가형 횟집을 표방하고 있지만 조용하고 독립적인 분위기를 원하는 고급 손님에게만 이층의 내실을 내주는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며 동은 광해가 장사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가게 크기에 비해 주차장이 작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위생 검열을 하러 나왔을때는 가게 옆에 있는 작은 주차장이 아니라 

건물 뒤편에 따로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가게 이층에 있는 내실로 올라갔다 다시 홀로 

내려왔으니 내실을 이용하는 손님은 번잡한 홀을 거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우울해 특산물 울어? 저건 뭐지?'

단조로운 동의 마음속에 든 의문은 옆 자리에 앉은 젊은 청년들도 똑같이 가진 모양이었다.

"우울해 특산물 울어는 뭘까?"

"야! 무려 시가다. 뭐지?"

"여기 가격 장난 아니게 싼데 '시가' 딱지를 붙인 저건 뭐지?"

"울어……. 우럭 아니겠냐?"

동은 개중 한 청년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울해, 울어.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은 것이겠지만 그 옆에 똑같이 '시가' 딱지를 붙이고 있는 인어회를 생각하면 

그저 재미난 위트에 지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우럭을 울어라고 하면 인어회는 어떤 생선을 말하는 것일까.

"울어가 우럭이면 인어는 잉어겠습니까?"

언제나 그렇지만 광해는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도록 뜬금없이 나타나 청년들의 즐거운 대화에 끼어들고 있었다. 푸른 

연기를 피워 올리는 곰방대를 손에 쥐고 눈이 시릴 만큼 새파란 비단 저고리와 품이 넓은 한복 바지를 입고서 말이다.

"어떻게…….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제가 이곳 광동 수산 사장입니다."

"아. 예……. 맛있어요."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광해는 짧은 눈인사를 마치고 청년들의 앞을 떠나 동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서늘하고 기분 좋게 느껴지는 그의 체향이 

소란스러운 홀의 소음을 헤치고 곧장 동에게로 건네지며 그는 반짝이는 눈을 한 채 광해를 보고 웃음 지어야 했다.

동은 오늘이 너무도 만족스러웠고, 행복했고, 유쾌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점에 이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남자를 보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날 불러 달라 하지 그랬냐. 오래 기다렸어?"

"아닙니다. 초밥을 주문했는데……. 포장해 달라구요. 싫어하지 않으십니까?"

"난 먹는 거 안 가린다. 대신 밥값은 니가 내라."

"훗……."

자기 가게에서 음식 싸가는 것도 제값을 내라는 광해의 말이 억지처럼 들릴 수 있지만 동은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부터 사귀기 시작했고, 어제부터 시작한 데이트 비용은 전부 동의 지갑에서 나가고 있어도 불만이 없는 건 광해가 충분히 

동을 만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더 바라는 것이 없는데 몇푼 되지도 않는 호텔비며 밥값을 내는 게 아까울 리가 없었다.

동은 틀이 박힌 것 같은 직장생활을 하는 평범한 공무원처럼 보이지만 돈도 출세도 아쉬워 해 본 적이 없는 부잣집 외동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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