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무 태수는 무릎 꿇고 두 손을 번쩍 든 채로 울상을 하고 있는 문어와 인어 아가씨를 보고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지난
천년동안 갈 곳 없는 신수 영물들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 나이트를 운영해 오던 자였다. 인간 말고는 어디에도
마음 쏟을 곳이 없어 방황하는 말썽꾼들을 수도 없이 다뤄본 경험과 인간들의 세상에서 이목을 끌지 않은채 신수 영물들을 위한
영업장을 운영하는데 있어 그만한 경험과 재주를 가진 자가 세상 천지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자 말이다.
신수간 연애 금지령의 시효가 다하고 나서 새롭게 개장한 광동수산. 즉, 공식적으로 두 번째가 되는 신수들의 놀이터 운영에 있어
적절하고 효과적인 조언을 해줄 사람도 물 나이트를 천년간 운영해 온 현무 태수 외에 아무도 없다 할 수 있었다.
금지령의 시효가 다하는 날 천년동안 가지 못한 휴가를 길게 잡아 떠났던 그가 돌아온 직후에 그가 받은 것은 광동수산의
막무가내식 경영을 바로 잡아 보라는 추상같은 제석천의 전갈이었다. 아무리 인간과 다른 신수 영물들이라고 해도 24시간 영업에
연중무휴라는 슬로건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제석천의 마음에 측은지심이 들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 눈으로 종업원에 대한 부당 대우를 목격하자 천년동안 날나리 제석천의 밑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어야 했던
현무 태수의 기분이 좋을리 만무했다.
"왜들 그러고 있는 거냐."
"태수 어르신……. 흑흑. 제발 살려주세요. 사장님이 우릴 달달 볶아 먹어버리실지도 몰라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차마 치켜 올린 팔을 내리지 못하는 인어 아가씨를 보며 태수는 다시 한 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벌을 서고 있는 거냐."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문어도 인어 아가씨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말 못할 잘못을 저질렀거나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들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광해의 성품에 비춰보자면 후자의 확률이 높았지만.
"어? 이게 누구냐? 현무 태수 아니야. 이야-----. 너 오랜만이다. 응?"
등 뒤에서 능글능글 조롱하는 듯 자신을 반겨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현무 태수는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현무와 용의 직급을 나누는 일은 무의미하겠지만 용왕과 사방신의 신분은 엄격하게 고하가 나뉘어지는 것이었다. 예전의 관계가
어떠했든 지금의 현무 태수는 광해에게 하례를 올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례는 정식으로 궁을 찾아가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제석천님이 보내셔서 왔으니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으응? 제형이? 아……. 네가 휴가를 갔다더니 이제야 돌아온 거냐? 개업하기 전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냐. 머리 터져 죽는 줄
알았다."
광해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오랜 벗을 허물없이 대했지만 깐깐하기로 소문난 현무 태수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는 광해가 올라온
계단참에서 시커먼 놈이 툭 튀어나오는 것을 놀라지도 않고 붙잡았다.
"곰치구나. 너도 잘 만났다. 너한테도 할 말이 있으니까 좀 있어라."
"아……. 태수 어르신."
"야. 야. 그런데 너희들 사방신의 황룡이 될까 말까 한다는 그 애는 어디 있는 거냐? 네가 휴가에서 돌아왔으면 그 녀석도
온 것이냐? 응? 얼굴은 한번 봬줘야 하는 거 아니냐.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다. 응? 응?"
"그 일은 오늘 제가 방문한 목적과 다른 것이니 연후에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별하는 어디에 있습니까."
"별하야 주방에 있지?"
"주방은 어딥니까."
"지하에."
"앞장 서십시오. 문어는 따라오고 인어 아가씨는 너희들 중에 우두머리 되는 이를 주방으로 내려오라고 전해라. 종업원들은 이게
답니까?"
천년이나 되는 세월동안 한 개의 업소를 유지 운영하던 자의 면모는 어디가 달라도 다른 것이었다. 현무 태수의 등장과 함께 한차례
손님이 빠져 나간 뒤 조용하며서도 어수선했던 광동수산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정돈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곰치 영진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으나 신중하고 생각이 많은 눈으로 그러한 현무 태수를 훔쳐보며 속 마음으로만 감탄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용왕님도 그저 불평하기에 바빠 앞뒤 생각 할 여유도 없는 동쪽 바다 백성들이 모두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생선 수급 일을 맡는 인어 녀석들도 있지만 그 애들은 모두 바다에 있지."
"부르십시오. 바다문은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주방에."
"가시죠."
핍박받고 착취당하던 동해 용궁의 영물들은 이로서 제석천이 드디어 자신들을 살려주는 것인가 싶었다.
물론, 그들은 지난 천년간 제석천이 물 나이트의 종업원들을 어떻게 부려먹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미력한 자들이었다.
"태수 어르신!"
"헉! 태수 어르신……."
"태, 태수님!"
멀끔한 잿빛 양복을 입고 있는 현무 태수에 대한 동해 용궁 영물들의 반응이란 것은 거의 열광적이라 해도 좋은 것이었다.
그는 비록 인정머리가 없는 성품이기는 하지만 사소한 잔정으로 마음을 흐리지 않을뿐 합리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공정한 심판의
상징으로 유명한 존재였던 것이다.
앞뒤 생각 없이 제 욕심만 차리는 동해 용왕 밑에 있는 자들이 두손 들고 그를 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무가 움직인 것은
제석천이 광동수산의 엄청난 노동집약적 영업방침에 제재를 가하려 든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지간히도 반가운가 보구나들."
이례적으로 현무 태수의 입에서 부드러운 말이 나오자 그가 속이 새까맣게 타서 재도 남지 않은 별하는 거의 그 앞에 엎어질 듯
절을하며 차마 말문도 잇지 못했다.
"의자와 책상을 가져와라. 홀에서는 사람들 이목도 있어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거 같아 내려온 거다. 네가 생선 수급을
맡은 인어들의 우두머리냐?"
"괴생이라고 합니다."
"광해님도 앉으시지요."
광해는 곰방대를 빡빡 빨아 당기면서 못마땅한듯 현무 태수를 바라보다 괴생이 내어온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랜 벗이라고는
하지만 대하기 편한 벗이라는 말과는 달랐다. 저 까칠한 성격이며 빈틈없는 계산이며 현무 태수의 모든 것이 광해의 성품과 달라
거의 유일하다 싶을 만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였으니까 말이다.
"문어가 회계를 맡고 있는 거냐? 매출 매입 장부와 세금 계산서를 가져와라. 아……. 네 이름이 뭐냐."
"채랑이라고 합니다."
"그래. 장부 일체와 공과금 고지서는 따로 모아놓고 있겠지?"
"예.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광해는 웃는 얼굴로 현무 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건들거리며 진심 없이 행동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이 기분 좋을리는 만무했다.
"감사라도 나온 거 같구나?"
"감사 맞습니다. 요즘 사람들 말로는 컨설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일단은 공식적인 신수들의 두 번째
놀이터가 되니 앞서 놀이터를 운영했던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이렇게 네 멋대로 내 가게를 뒤집어엎을 권한은 누가 준 거냐?"
"제석천님이 보내서 온 것이니 제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거래처 관리는 채랑이가 하는 겁니까?"
"아니. 그건 별하가 한다."
현무 태수는 의미심장한 광해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꿈쩍하지 않았다. 허긴 북방의 수호신인 현무로 태어난 자인데다 그를 이곳
광동수산에 보낸 이가 선견성의 성주 되시는 제석천님이시니 광해의 심사가 틀어졌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주류와 음료 정도인가?"
"식수와 쌀. 그리고 야채도 외부에서 공급받고 있죠."
"거래 장부는."
"갖다 드릴까요?"
"응."
현무 태수가 비상한 자임은 분명했다. 그는 채랑과 별하에게서 건네받은 장부를 살피면서도 끊임없이 뭔가를 물었고, 그리고
그 대답에 따라 또 뭔가를 적었다.
"야채와 식수는 도리천 농장에서 공급받으실 수 있습니다. 일단은 신수 영물들의 유흥장 개념이니 선견성에 그 정도의 협조는
당연한 일입니다. 쌀은 생산자 직거래를 통하십시오. 요즘은 농촌에서도 저온 저장이 가능한 창고를 조합 단위로 갖고 있는 곳이
있으니 그 방식을 통하면 품질 좋은 쌀을 안정된 가격으로 공급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주류와 음료는 가격표를 보니 물 나이트의
거래처보다 비싸군요. 바꾸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엉? 더 싸게 주는데가 있단 말이야?"
"아무래도 저희쪽은 아주 오랫동안 거래를 해왔으니까요. 이쪽 소개라면 같은 가격으로 공급할 겁니다. 다만 물 나이트 자회사나
계열사로 체계를 잡아야 겠지만요."
"얼마나 싼데?"
"20%"
"바꾸지."
광해도 숫자 놀음에 있어 아둔한 자는 아니었다. 바다 백성들과 궁의 신료들이 모두 그를 일러 돈독이 올랐다 그러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종업원 처우 문제는 획기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이들이 영물들이라고 해도 체력에 한계라는게 있습니다. 언제까지 쉬지
않고 일을 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건……. 사실 노동부에 누구 하나 제보만 하면 영업정지 먹는 일도 쉬울 걸요?"
"엥?"
"더군다나 선견성에도 투서가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인간세상의 노동부가 아니라해도 선녀 조합에서 들고 일어설지도 모를
일이죠. 광해님은……."
서류에서 고개를 든 현무 태수가 빙그레 웃으며 광해를 보자 광해는 그의 입에서 나온 선녀 조합이라는 말에 인상을 구겼다.
"선녀 조합에 척진 이가 많으시죠."
"그렇지만 여긴 인간들만 대상으로 장사하는 영업장이 아니다. 그렇다고 교체 인원을 끌어다 댈만큼 동해 용궁이 한가한 곳도
아니고."
"인간 종업원을 쓰십시오."
"그네들 줄 급료가 어디 있냐."
"홍보라는 것은 국 끓여먹으려고 있는 말인줄 아십니까?"
"……?"
현무 태수는 아무것이나 휘갈겨 쓰는듯한 속도로 채랑이 가져온 장부를 베껴쓰고 있었는데 옮겨 적은 새 장부의 내용은 누가 봐도
일목요연하다 싶을만큼 잘 정돈이 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따박따박 광해의 말에 딴지를 거는 현무 태수는 정말 위대한 존재였다.
"장사는 영업입니다. 물 나이트는 따로 영업할 필요가 없이 전적으로 신수들을 위한 놀이터였지만 이곳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가게 아닙니까? 그러면 홍보도 하셔야죠."
"어떻게?"
"방송에 한번 나가십시오. 이 집 평판은 이 근방에 자자합니다. 사실 동해 바다에서 직접 잡아 그 자리에서 회를 뜨고 있는데
소문 안나는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더군다나 가격도 품질에 비한다면 다른 업소가 따를 수 없을만큼 매리트를 갖고 있습니다."
"싫어."
"왜요."
광해는 연초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런 때의 광해는 어린애 같았지만 이 자리에 그 음흉한 속내를 모르는
이가 없으니 아무도 속아주지는 않았다.
"방송국에서 나온 녀석들은 공짜로 밥을 먹는다잖아. 난 절대로 돈 안받고 음식 팔지는 않아."
"도깨비들한테도요?"
"흐응?"
"찾아보면 배우나 모델이나 뭐 그런 쪽에 도깨비들이 많습니다. 유명인 단골집이라는 타이틀로 나가는 방법도 있을 테고,
홍보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한끼 식사값 정도는 양보할 수 있는 거죠. 공무원들 접대는 할 거 아닙니까."
"그게 그거랑 같아?"
"같습니다. 언론은 제 3의 공권력이죠."
"체엣!"
광해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현무 태수이니 그는 더 이상 광해를 닦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24시간 영업체계가 이곳 강남에서는 보편적이라 하겠지만 적어도 궁안 식구들에 대한 근무 조건은 따로 짜는게 좋을 겁니다.
이층 내실은 전부 신수들로 받고 있습니까?"
"가끔 단체 손님은 그쪽으로 돌리지."
"그럼 인어 아가씨들은 이층 내실로만 돌리고 홀은 인간 종업원을 쓰십시오. 지금 여섯입니까 여덟입니까."
"여덟."
"넷씩 조를 짜서 이교대로 하십시오. 그 정도만 해도 선녀 조합으로 눈물 자국 떨어진 투서가 날아드는 일은 줄어들겠죠. 그리고
그 정도면 광해님이 많이 양보하신 거니 선녀 조합에서도 항의할 명분이 없어지는 거고 말입니다."
홀에서 일하는 인어 아가씨들의 대표로 주방에 내려온 일번이의 입이 귀에 가서 걸렸다.
물갈퀴에 있는 가시로 한번만 긁어주면 꼴까닥 죽어버릴 인간 따위가 시도 때도 없이 엉덩이를 만지고 추파를 던지는 일이 정말로
싫었던 것이었다. 대놓고 좋아라하며 웃지는 못해도 광해의 등 뒤에 숨어 일번이는 오두방정을 떨며 현무 태수에게 절을 하고
있었다.
"물품 매입과 장부 정리나 공과금 처리 같은 것은 한사람에게 온전히 맡기는게 좋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책임소재가
분명해지니까요. 거북이 상귀를 추천합니다. 현명하고 진득한데다 신의가 깊은 자이니 믿고 맡기셔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상귀는 날 좋아하지 않아."
"아까 말씀드렸을텐데요? 광동수산은 공식적으로 인간 세상에 있는 두 번째 놀이터입니다. 선견성에서 상귀에게 직접 그리하라
한다면 상귀가 불복하지 못합니다."
지금 광동수산에서 일하는 자들은 동해 용궁에서 별하의 사람이라 불러도 되는 이들이었다. 새로운 용왕 광해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자들은 별하가 함부로 손 쓸 수 없는 자들이며 그들은 아직도 광해를 용왕으로 대우하지 않을 정도로 분란이 심하니
그런 자들 중에 대표라 할 수 있는 거북이 상귀를 함부로 부르거나 부릴 수 없는 광해의 입장에서는 선견성의 참견을 싫다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카운터 역시 2교대로 근무체계를 잡으십시오. 채랑이는 너와 교대조로 근무할 자를 추천해서 데려와라. 할 수 있지?"
"무, 물론입죠. 예! 당연, 당근빠답니다."
"좋아. 생선 수급의 경우는 나나 광해님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너희들끼리 조를 만들어 적당히 쉬도록 해라. 괴생아. 가능한
일이겠지?"
"예! 분부 받잡겠습니다."
"영진아."
현무 태수는 광동 수산 종업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서 그가 온 대부분의 목적을 순식간에 처리해 버렸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지금까지 주방에 불려와서도 존재감 없이 주방 한켠의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곰치 영진을 불렀다.
"예……. 태수 어르신."
"건강원을 한다고?"
"예."
"네 개인의 사업이야 내가 가타부타 말할 것이 아니지만……."
덩치 커다란 영진이 잔뜩 몸을 수그린채 고개도 들지 못하는걸 알면서도 현무 태수는 한참동안 말 없이 영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음으로 태수보다는 영진이 더 기꺼운 광해는 이 놈이 무슨 시비를 걸려 이러나 하면서 예리하게 태수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가 내뱉은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별하가 걱정이구나."
"……?"
시커먼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영진의 눈이 번뜩이는 것을 보며 현무 태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야 다른 신수 받는 일도 아니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물건 만들어 건네는 일 정도 뿐이니 혼자 벌어먹고 사는 일이라고 해도
꽤 벌이가 괜찮지? 재료 값이 들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시간도 널널할 테고."
"……."
"그런데 별하는 혼자 이 주방일을 도맡아야 하는 구나. 누가 이 주방에 들어와 저 칼을 잡으려 하겠냐. 굳은일 마다하지 않는
별하니까 싫어도 싫은 내색 없이 저러고 있지만 너도 알다시피 별하의 일이 단지 이곳 광동수산의 주방일만은 아니지 않으냐.
동해 용궁 제 1 비서관의 소임만 해도 눈이 돌아가게 바쁠텐데 24시간 쉬지도 못하고 회 뜨느라 정신이 없으니. 내가 그게 걱정이
된다."
"벼, 별하가……. 그럼……."
광해는 입을 딱 벌리고 현무 태수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인정도 없고, 인정이 없어서 다른 이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던 현무 태수였다. 차갑고 단호한 만큼 정확하고
공정하기 때문에 속내를 나누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벗이라 칭할 수 있었던 현무 태수가 왜 이렇게 변질된 것일까. 광해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은밀한 곰치 영진의 바람을 어떻게 현무 태수가 저토록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광해는 저 구렁이 같은 현무 태수의 변화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예전과 한치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너무 많이 변해 다른 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수 어르신!"
"응?"
"그,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이 저 곰치 영진이 더러 여기 주방일을……. 그, 그러니까 저를 도우라고……. 예? 그런 겁니까?"
"왜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고 그러냐?"
"절 죽이실 작정이십니까?"
"아니. 일에 치여 네가 죽게 생겼으니 널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자에게 조력을 구하는 거다."
"그 말이 그 말이죠!"
광해는 흥미진진하게 현무 태수와 별하의 대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귀여운 놈은 정말로 수틀리면 제석천의 상투도 틀어쥘 놈이
분명했다. 앞뒤 분간 못하고 울컥증이 도지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게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해 지면서 현무 태수의 변화에 대한 너그러움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나저나 너는 장가 들지 않는 거냐? 네가 장가들어 알콩달콩 사는 꼴로 광해님의 심기를 흔들어 놓아야지 누가 그럴 수 있겠냐.
그렇게라도 해야 얼음장같이 단단한 저분도 옆자리 허전함을 느끼실게 아니냐. 아직도 그 하늘 똥구멍을 찌르는 눈이 안낮아졌어?"
"하늘 똥구멍을 찌르기는 누가……. 난 그냥 얼굴이 중요하다고 말할 뿐이거든요?"
"미색이라면 네 주변에 차고 넘치도록 미남 미녀들이 있지 않냐? 그들조차 네 수준을 맞추지 못하는데 그 정도면 하늘 똥구멍을
찌르는게 맞지. 얼굴 뜯어먹고 사는거 아니다. 인연이 닿고 마음 안에 두기 시작하면 얼굴 그거야 아무 문제가 안되지. 너는 나도
못났다고 하질 않았냐? 솔직히 내 인물 두고 그런 평을 하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었다."
"아니. 그건 말이죠. 태수 어르신이 박색이라는 말이 아니라 제 취향과 아주 조금 벗어나 있다고……. 그런 거거든요? 서운하셨어요?"
현무 태수는 한번도 장부에서 눈을 떼지도 않았고, 장부를 옮겨 적는 손을 쉬지도 않았지만 사색이 되어 변명하는 별하의 표정을
그린듯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손과 눈은 장부로 가 있는채 대답했다.
"별로. 내 마음으로 흐르는 이는 네가 아니니 네 말에 서운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영진아. 네가 별하를 좀 도와주련?"
"태수 어르신!"
"제, 제가 말입니까?"
"그래. 네 가게 일이 바쁘다면야 굳이 강요는 못하겠지만 그래줬으면 하는데?"
영진은 심장이 발랑발랑 뛰고 눈 앞이 어질어질 한 것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저 예쁜 사람의 곁에서 저 사람의 일을
도울 수 있다면 가게고 뭐고 다 때려쳐도 상관없다 생각하고 있는데 높은 분께서 직접 부탁까지 하시고 계시지 않은가.
사실 현무 태수께서 직접 하는 명령에 거부할 권한이 곰치 영진에게는 없었다.
"가, 가게는 거의 인터넷 주문이고 직접 찾아오는 손님은 없습니다."
"그래? 그럼 네가 별하 사정을 좀 봐줄 수 있겠어?"
"예!"
"고맙구나. 그럼 내일부터 네가 편한 시간에 이곳에 와서 주방 일을 좀 해줘라. 네가 오면 별하는 좀 쉬거나 궁의 업무를 보거나
요량껏 할테니까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예! 내일 아침에……. 아니 지금 당장에."
현무 태수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그 이전에 그가 웃는 얼굴을 본 이는 극히 드물었다. 그는 마음이 없는 북방의 신이었고,
그래서 슬프고 기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광해는 그것이 화 나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하면서 묘하게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라서 말 없이 그 모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천덕꾸러기로 어딜 가든 환영받지 못했던 자신이 용왕 자리에 오른 것처럼 오래된 벗에게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 그를 바꿔 놓았다
싶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느리지만 시간이 흐르면 변하게 마련이고, 그 흐름에 따라 그들은 성장하고 자라면서 바뀌고 있었다.
"내일 하거라. 그리고 주방에서 일하려면 그 헤어스타일은 곤란하니까 머리는 단정히 하고 와야 한다. 알겠지? 구청 위생과에서
지금 네 꼬라지를 보면 기겁을 하며 난리를 칠테니까 말이다."
"머, 머리요?"
"단정히 묶든지 자르든지 해라."
"예. 알겠습니다."
아주 잠깐씩 얼굴을 들어 말하는 상대를 본 것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장부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태수는 거기까지 말한뒤 지금껏
집중해서 옮겨적던 장부를 덮고 광해를 바라보았다.
"이쯤에서 급한 일은 다 처리가 된 것 같으니 돌아갑니다. 상귀는 내일부터 보내죠. 거래처 변경에 관한 것은 상귀한테 말해
둘테니까 신경 안쓰셔도 됩니다. 장부는 두서가 없어서 그렇지 빠지는 품목이나 금액은 전혀 없는거 같습니다. 세무서 관련한 일은
제가 상귀랑 의논해서 처리할테니까 그것도 신경쓰지 마십시오."
"야."
"왜요."
바람같이 나타나 광동수산 종업원들의 모든 고충을 한방에 날려버린 현무 태수는 뭔가 떨떠름한 표정의 광해를 바라보았다.
괴생이는 바다로 돌아갔고, 채랑이와 일번이도 홀로 올라가 버렸다. 영진은 아직 주방에 있는지 밖으로 나간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오적어 가문의 팽준이는 주방일을 도울 자를 구하러 괴생이와 함께 바다로 가버렸다.
넋이 나가버린 별하를 제외하고는 광해와 현무 태수의 대화에 끼어들 자가 아무도 주방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너 많이 변했다."
"광해님도 변했습니다. 지금은 양아치 백룡이 아니라 어엿한 동해 용왕님이 아닙니까."
"그래도 넌 내 친구거든?"
"친구로 대해주길 바라시는 겁니까?"
"가끔은……."
현무 태수는 장부를 광동수산에 남겨둬야 할 것과 자신이 들고 가야 할 것으로 나눠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사고 치지 마라. 광해야."
"……?"
"아직은 내가 불완전한 사방신이라서 네가 사고 친다고 큰 힘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우리들의 황룡은 아직 황룡이 될지를 결정하지
못했거든. 그러니 사고를 치더라도 내가 완전한 사방신이 되고 난 후에 쳐라. 알겠냐?"
황룡 없이 태어난 저들 사방신과 부모의 보살핌을 조금도 받지 못한채 버려진 용정 광해.
그들은 모두 구천의 천덕꾸러기 들이었다.
마음속에 응어리 진 것이 있어 함께 몰려다닐 때부터 서로 갈구고 비아냥거리기는 했어도 결국 같은 처지라는 것이 그들을 엮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광해는 방금 전까지 깍듯한 태도로 용왕을 대하는 사방신으로 처신했음에도 순식간에 긴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듯 깐깐하고
빈틈 없는 예전의 태수로 돌아와버린 그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천년동안 너도 알다시피 물 나이트에 묶여 사느라 너 만나러 갈 시간도 없었다. 그 사이 넌 용왕이 되었고……. 다들
보고 싶어 하지."
"난 니들이 이제 나를 상종하고 싶어하지 않는줄 알았다."
"사고 친 게 좀 있어서 자숙하는 중이었지. 윗전 눈치 살피느라 너 보러 갈 짬이 안났다. 우리들과 네가 뭉치면 틀림없이 사고를
칠 것이라 믿는 원로원에 더는 밉보일 수 없는 노릇이니까."
왜인지 모르지만 목이 꽉 조여들며 뜨끈뜨끈해지는 느낌이라 광해는 연신 곰방대를 빨아대면서 고개를 돌려 널브러진 별하만
바라보고 있었다.
별하를 보니 좀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이 저 녀석이 좋아 죽고 못 사는 영진이 내일부터 당장 이 주방에 당당히 출근을 하게
생겼으니 앞으로 저 둘의 하는 꼬라지 보는 것만도 꽤나 재미있겠다 싶어져 기분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버럭버럭 소리만 지를 줄
알았지 알고보면 마음도 여리고 귀여운 별하와 우직한 성품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영진의 기나긴 짝사랑이 한 자리에 붙어있게
생겼으니 그 얼마나 재미나겠는가.
"흠! 용하가 새끼를 낳았다면서."
백룡 용하 또한 저들 불완전한 사방신과 같이 광해의 오랜 벗이었다. 같은 백룡이지만 귀한 가문의 자손으로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자란 용하에게 괜한 시비도 많이 붙고 일 없이 깐죽거리며 그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했지만 그런 광해를 너그럽게 받아준
용하 또한 낯선 용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광해에게는 그리운 이였던 것이다.
"허구헌날 못 잡아먹어 안달 하더니 용하도 보고 싶은 거냐?"
"설마."
"한번 데리고 오지. 교령이라고 딸래미가 예쁘다."
"예뻐? ……용하 닮았으면 예쁘겠네."
"얼마 전에는 집 나간 애비가 잡혀 오더니 조만간 얼굴도 못보고 살던 삼촌까지 생기겠네. 뭐……. 어쨌든 나는 이만 간다."
"바쁘냐?"
"바쁘거든?"
"쳇!"
원래 저런 놈이었다. 광해는 차라리 오늘 저들 사방신 중에 주작이나 백호가 왔다면 자신과 술잔을 나누며 밤이 새도록
놀아줬을텐데 재미없는 놈이 와서 일 없게 되었다며 혀를 찼다.
그래도 오랜 벗의 소식을 듣고 그들이 자신을 박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짬이 없었을 뿐이라는 말까지 전해 들었으니 심기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립고 보고 싶어서 당장 골목하나만 건너면 있는 그들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용왕 체면으로 눌러 참고
있을 뿐.
널브러진 별하를 버려두고 그들은 주방을 나섰다.
"그런데 너 영진이가 별하를 애틋해 하는 거 어떻게 안 거냐?"
"자라한테 자라 엑기스 주는 게 시비 거는 심사가 아니면 앞뒤 분간도 못할 만큼 그이를 좋아한다는 말이겠지. 바보나 그걸 눈치
못 챌 거다."
"별하가 바보냐?"
"애가 좀 답답하기는 하지."
"뭐……."
아니라고 변호해 줄 수 없는 것이 가엾지만 자라 별하는 집안 대대로 답답한 가문이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도 약속 있어 나가야 된다. 놀러 와라."
"사흘 뒤가 그믐날이다. 그때 오마."
"응."
광해는 산뜻하게 돌아서 가게를 나가버리는 오랜 벗의 등을 바라보며 저 등이 크기와 모양은 달라도 어쩌면 자신의 재롱동이와
꼭 닮은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깍듯하고 공손하지만 오만한 기품을 잃지 않는 말투며 그런 얼굴을 하고서도 터무니없을 만큼 친근하게 보채기도 하는 변신이며
하는 것들이 현무 태수와 제갈동을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유래 없이 활기에 가득 찬 광동수산 내부를 바라보다 슬쩍 시간을 확인하였다.
곧 그의 재롱동이가 도착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