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부셔져 버린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정신을 놓았다 눈을 뜨자 자신은 여전히 사지육신 멀쩡한 몸으로 광해의 무릎 위에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늘어져 있었다.
"……아! 몇십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일곱시 이십분 정도니까. 서두르면 출근하는데 문제가 없을 거다."
"삼십분 정도 한 겁니까. 우리?"
날씬한 다리를 오므리며 동이 일어서자 아직 그의 비문 속으로 들어가 있던 광해의 양물이 주르륵 빨려 나오며 철썩 떨어졌다.
그리고 채 다물어지지 않은 동의 주름진 구멍에서 용왕의 정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을 느낀 쪽도 그것을 본 쪽도 거의 동시에
미간을 찡그리며 인상을 썼다.
"흐음……. 아깝게도 애 써서 안쪽으로 싸놓은 게 다 흐르는군."
"……."
"다음번엔 마개라도 장만해 그 음탕한 구멍을 막아놓을까?"
"……?"
광해는 난잡한 소리에 싫은 표정을 지을거라 생각한 동이 자신을 돌아보자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답해 보였지만…….
동의 얼굴은 그가 예상한 것과 달랐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재미있을 거 같아서요."
"흐응?"
"퇴근하고 갈테니까 같이 사러 가시겠습니까?"
"하하하하하."
접시가 뒤집히고 쥬스가 쏟아져 엉망이 되어버린 카트를 밀친 동이 무릎을 치며 웃고 있는 광해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로 내가 본 어떤 자와도 비교할 수가 없구나. 예측불허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생물이로군……."
"그런 물건을 파는 데가 이 근처에도 좀 있을 겁니다. 사무실에서 짬이 나면 어떤 물건을 사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으하하하하……."
시간이 촉박하여 광해가 왜 저리도 호탕하게 웃는 것인지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을 수는 없었지만 동은 욕실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광해를 바라보았다. 그의 빈틈 없어 보이는 얼굴이 일말의 불안함을 안고 있었다.
"저기……."
"응?"
"그거……. 해 주실 거죠?"
광해는 어느틈에 곰방대를 입에 물고는 그것을 맛있게 빨아 당기며 흡족한듯 웃었다.
"뭘? 네 안쪽에 질펀하게 싸놓고서 마개로 입구를 틀어막아 주는 것?"
멀끔하고 산뜻한 얼굴을 한 채로 나눌 대화는 아닌 듯 하지만 광해도 제갈동도 보통의 범주는 한참 넘어서는 혹은 한참 모자라는
그런 성품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예. 그거요."
"으하하하하하. 알았다. 알았어."
동은 망설임 없이 나오는 광해의 대답에 만족한 듯 방긋 웃어보이고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용왕은 사랑에 빠졌고, 양아치 악덕 용왕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인간은 그 난폭하고 거침없는 구애를 조금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용왕은 너무도 귀여워서 잡아 먹어버리고 싶은 인간의 몸에 자신의 냄새를 잔뜩 묻혀 놓았다는 것에 만족스러워 했다.
광동 수산의 주방에는 의외로 구석지고 그늘진 곳이 많이 있었다. 널찍하게 여유로운 공간을 쓰다 보니 주방 비품이 들어차 있지
않은 곳은 의례 그렇게 사람 하나 숨길 정도의 어둠을 품고 있었는데 본디 깊은 물이든 얕은 물이든 상관하지 않는 광동수산의
종업원들은 그런 그늘진 곳을 상관하지 않았다.
곰치 영진은 그렇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모하는 이를 훔쳐볼 수가 있었다.
흰 두건을 질끈 동여매고 무식하게 칼질을 하는 그이의 모습을 더러 다른 이들은 모두 살벌하다느니 저것이 백정이지 달리 무엇이라
칭하겠냐느니 살벌한 말들을 하지만 영진의 눈에는 그저 안타깝고 애틋하여 가슴이 사무쳤던 것이다. 금세라도 톡 부러질 것
같은 손목으로 어떻게 저리도 큰 칼을 하루 종일 쥐고 있을 수 있는지. 저 가늘고 유려한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비명횡사할
물고기를 보지 않겠다는 듯 질끈 감은 눈으로 대가리부터 탕! 하고 후려갈겨 주는 것을 보면 그의 심성이 비단보다 곱고 여림을
알 수 있는데 다른 이들이 괜히 입을 모아 허튼 소리를 한다 생각했던 것이다.
요리 보고 조리 보고 돌려보고 뒤집어 봐도 저만한 미색이 어디 있으며 저만한 심성이 또 어디 있을까.
엄청난 껍데기가 둘러쳐 있는 영진의 눈에 그는 다만 아무리 봐도 그립고 그리운 정인일 뿐이었다. 혼자만의 연심이라고 해도
애간장 녹이는 이런 마음을 참지 못해 하루에도 몇 번씩 영진은 광동수산을 찾았다.
'오늘따라 안색이 더 창백해 보이네…….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간신히 북새통처럼 몰아치는 손님을 다 치러내고 조리대에 기대 긴 한숨을 내쉬고 있는 별하의 발 밑으로 꾸물대며 팽준이 다가왔다.
"별하 성. 요즘 사장님 뭔 일이 있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새꺄."
"통 가게에 나오지를 않잖아. 그 덕에 숨통이 좀 풀리는 거 같아 좋기는 해도 요런 심상찮은 분위기가 절대로 좋기만 한 게 아니란
것은 알만하잖소?"
"아 몰라. 몰라! 미친 새끼. 원로원에서 내려오는 맞선 사진만 기백장이 넘는데 본체만체……. 아으으윽! 열 뻗쳐. 대체 날 더러
그걸 어쩌란 말이냐구!----"
영진의 눈에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미쳐 날뛰는 별하의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애틋한 모습으로만 비춰졌다.
그만큼 지극한 짝사랑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신분 고하를 떠나 붕우지기가 되기로 한 광해라고 해도 영진이 아늑한 해저의 굴을 떠나
뭍으로 나오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횟집을 차릴 터이니 함께 가자는 말을 처음에 영진은 일언지하 거절하였다.
그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호기심보다는 안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였다. 하지만 빙글빙글 웃는 얼굴의 광해가 언제 영진의
속내를 훔쳐 보았는지 대뜸 별하를 데려가 주방장으로 삼으련다 했을 때는 안정이고 평화고 깨끗하게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약한 벗이 영진의 마음이 이미 별하에게 가 있음을 눈치 챈 거 같으니 그가 바라는 대로 육지 행에 동행하지 않는다면 오죽이나
별하를 들들 볶으며 괴롭히겠는가. 영진은 광해가 그런 일을 족히 하고도 남을 성품이라는 것까지 잘 알고 있었다.
"별하야. 아직 살아있냐?"
순간 긴 머리로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는 영진의 눈이 살기를 뿜으며 번뜩였다.
"야. 너 미쳤어? 카운터 비워두고 여기 내려온 거 사장이 알면 지랄할 텐데?"
"오번이 보초 세워놓고 왔다. 나도 숨은 돌려야지. 홀에 손님도 없고……."
영성을 지닌 이후로는 문어 가문과 특별히 척을 질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이라는 것은 쉬이 고쳐지는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본디 곰치와 문어가 한굴을 갖고 피 터지게 싸우는 족속들인지라 영진은 광동수산에 저 문어 대가리 녀석이 있는
것만은 결단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저 문어 대가리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별하를 보는 눈길이 수상하기 그지 없으니 짬이 날 때마다 주방까지 내려와
수작을 거는 모양새를 한두번 본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만큼 영진의 암울한 살기는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지만 아직 광동수산의 종업원들은 거기 영진이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미쳐. 돌아! 이 빌어먹을 새끼는 또 어디로 내뺀거야. 사장이면 영업장에 있어야 하는거 아니냐구!-----"
"야. 야. 그만해라. 사실 사장님이 없어야 불쌍한 우리 중생들이 잠시 숨이라도 돌리지……."
"그건 니네 사정이고 내 사정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거든? 당장 원로원에서 이달 안으로 처녀 단자 들어온 중에서 삼인을
간택하여 올리라는데 용왕이라는 놈은 코빼기도 볼 수가 없으니 어쩌란 말이냐고오! 울화병으로 날 죽일 생각인게 분명해.
아우---. 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
별하는 발광하듯 소리 지르며 속 터지는 궁내 시급 현안을 이야기 하다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측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채랑이나 팽준이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제 1 비서관 별하만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빌어처먹을 용왕놈의 연초 냄새를
말이다.
"글쎄다. 별하 네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
소리도 없이 기척도 없이 직원들이 사장의 험담이라도 할라치면 귀신같이 나타나는 광해였지만 유독 별하만큼은 자신의 등장을
알아차린다 생각하며 광해는 길게 연초 연기를 내뿜었다.
"사, 사장니……임."
"채랑아 손님이 뜸하지?"
"그, 그게 말입니다. 물 좀 마시려고……."
"오번이 계단참에서 벌 서고 있다. 너도 그 옆에 가서 손들고 벌이나 서라."
문어 채랑은 사색이 되어 발발 떨면서 뒷걸음질 쳐 주방을 나갔다. 나른하고 조용한 말투로 말하고 있지만 광해의 난폭한
성정을 알고 있는 용궁 백성으로 어떻게 감히 그 말에 토를 달 수 있겠는가. 동쪽 바다에서 광해의 말에 말대꾸 할 수 있을만큼
간이 부은 백성은 자라 별하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별하야."
"왜요!"
그리고 유일하게 별하만이 광해에게 삿대질을 하며 울화를 터트릴 수도 있었다. 그는 광해가 처리해야 하는 일을 모두 일선에서
관장하며 동시에 광해가 손수 해야 하는 일과 자신의 선에서 결정 내릴 수 있는 일을 가려내는 일까지 담당하고 있으니 동해 용왕의
오른팔이나 진배 없는 고위직 관료였던 것이다.
물론, 광해 자신은 그런 별하를 몸종 취급 하며 놀리는 재미로 살고 있지만 말이다.
"지병이 날로 심해지는거 같구나."
"지병이요? 누가 병났어요?"
단순하고 순진한 별하를 어떻게 귀엽다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광해는 지금도 주방 한켠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침이라도
흘릴 거 같은 표정으로 눈이 풀린채 별하를 훔쳐보고 있는 영진의 심정을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울화병에는 용봉탕이 좋다더라. 영진이 더러 자라즙이나 한봉다려 달라 그러지 그러냐?"
"이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지금 나한테 시비 걸어요?"
"응. 시비 거는거 맞거든?"
"아 씨. 진짜! 계급장 떼고 한판 붙을까요?"
울화병이 도지면 앞뒤 생각없이 울컥 소리부터 질러대는 별하와는 달리 간이 콩알만한 팽준이는 산처럼 쌓인 무채를 내팽개친채
수족관으로 달아나 버렸고 주방에는 광해와 별하 그리고 몸을 숨기고 있는 영진만이 남아있었다.
"계급장 떼도 넌 자라고 난 용이다."
"아우---! 내가 진짜!"
"영진이 자라즙은 물 한방울도 안섞는다던데? 효과 직방이라더라. 어떠냐. 내가라도 나서서 한봉지 구해주랴?"
"됐거든요?"
"으하하하하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광해와는 달리 별하는 제 가슴팍을 모질게 후려치며 원통함에 발까지 탕탕 굴러댔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어디서 놀다 왔는지 인간 냄새를 잔뜩 묻히고 돌아온 주제에 뻔뻔하게 제 1 비서관을 놀려대는 용왕의 어디가 예뻐서
공손하게 예를 갖추겠는가. 나름 별하의 입장에서는 광해야 용 아니라 용 할아버지라 해도 계급장 떼고 맞장 뜨자는 말이 절로
나올법도 한 상황이었다.
"원로원의 일은 어쩌실 건데요. 이달 안으로 처녀단자 들어온 것들 중에서 세 명을 간택해 올리래요. 더는 용부인 맞이하는 일을
미룰 수 없다고 재촉하는 게 장난이 아니라구요."
"씹어."
"예?"
"그딴 노인네들 망령 나 할 짓 없어서 벌이는 일에 장단 맞춰줄 생각 코딱지만큼도 없으니까 씹어."
"사장님!"
원로원이 어떤 곳이던가. 도리천의 주인 되시는 제석천께서도 함부로 그 의사를 묵살하지 못하는 대단한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그들이 지금 압박을 가하는 것은 용왕의 자질됨이 아니라 용부인에 관한 일이었다. 어느 용왕도 용부인 없이
치정을 하지 않았고, 용궁의 옥좌에 비어있는 왼편 자리가 바다 살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바다 백성인 별하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원로원의 재촉이 결코 할 짓 없어 거는 시비가 아님이 그처럼 명명백백한데도 저 시건방진 용왕의 입에서는 파렴치하게도
저딴 말 밖에 나오지 않는 거였다.
별하는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 잡아먹기라도 할 듯 광해를 노려보았다.
"진짜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올 거에요?"
"응."
"아 대체 왜 그러는 건대요! 나이가 그만 먹었으면 장가를 가야 할 거 아니에요. 장가를! 세상에 어느 용왕이 용부인도 없이
즉위해요. 그때는 때가 때니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즉위식을 가졌지만 뭐라고 해도 그건 임시변통일 뿐이라구요! 여차하면 원로원에서
광해님 자질시비가 다시 불거지는 수가 있는 거 몰라서 이래요?"
광해는 시퍼런 식칼을 휘두르며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있는 별하를 재미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겁기만 한 용왕 자리를
탐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비록 그가 전전대 용왕의 의중에 없었던 용정이라고 해도 용왕의 자리에 올라 무거운 관을 머리에 쓰고
책임과 의무에 치여 사는 것 보다는 구천을 떠돌면서 제멋대로 삶을 즐기는 것이 광해에게는 더 어울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언제든 버릴 용왕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이와 혼인하고 그를 용부인의 자리에 앉히느니 차라리 지금 당장이라도 이
무거운 면류관을 벗어버릴 생각인 광해의 입장은 처음 별하의 손에 이끌려 용궁에 당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치의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자르고 싶으면 자르라고 해. 무서운 거 하나도 없으니까."
"광해님!"
별하는 갑자기 싸늘하게 굳어버린 용왕의 얼굴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장가는 내가 가는 거다. 내가 혼인하고픈 이와 안타까운 연심으로 마음 졸이다 남은 평생을 함께 하겠노라 하늘과 땅, 산 것과
죽은 것들에게 맹세하는 거다. 마음에도 없는 자와 혼인하고 아끼지도 않을 자손을 남기느니 이대로 바람같이 구름같이 살다 가는 게
나한테 어울리는 일이다. 더는 닦달하지 말어라. 난 볼 일이 있어 나간다."
"……."
흐느적거리며 신선노름을 하는 것 같지만 가끔 별하의 눈에 쓸쓸한 광해가 비춰졌다. 분명 그가 용왕의 아들이고 선대 용왕의
아우님 되시지만 그는 용궁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궁의 법도를 배우지도 못했다. 어미가 누군지도 모르는 용정이 저만큼 장성한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자라인 별하와는 종족이 다르니 그 삶의 길이가 같을 수 없겠지만 별하의 열배는 나이가 많은
광해라 해도 어린 시절은 다 같지 않겠는가.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하루도 살아내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연약한 그의 어린 시절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죽일 놈 살릴 놈 욕을 하고 원망을 해도 결국 별하가 광해의 편이 되어 지금껏 용왕의 자질을 운운하며 그를 험구하는 이들에게
맞설 수 있는 것은 그가 아주 가끔 보여주는 저런 쓸쓸한 모습 때문이었다. 광해가 살아내었을 고통스럽고 외로웠을 과거를
생각하면 용왕의 자리에 앉아서도 백성에 대한 사랑은커녕 바다살림에 대한 관심조차 없는 그의 지금 행동이 마치 그 시절에 대한
분풀이처럼 보여서 원망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어서였다.
"하아……. 미치겠네 진짜."
조용히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은 별하는 기운이 쑥 빠져버린 어깨를 늘어트린 채 난감하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어디 저 양반 허허로운 마음을 위로해줄 좋은 처자 하나……. 으악!"
별하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시커먼 그림자에 저도 모르게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며 조리대 쪽으로 물러섰다.
대체 저 화상은 어째서 매번 소리 소문도 없이 나타나 자라 간이 콩알만해 지도록 만드는 것일까. 전생에 무슨 원한이 졌는지
모르지만 그림자만 봐도 심장이 발랑거리는 곰치의 등장은 별하를 사색이 되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이거 먹어……."
"왜. 아, 아니……. 어디서. 아니! 대체 언제부터 거기……. 거기 있었던 거에요?"
시커먼 머리카락으로 얼굴 절반은 가리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곰치 영진의 등장은 여간해서
기죽는 일이 없는 자라조차도 충분히 말더듬이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영진은 큰 눈을 끔뻑이며 하얗게 질린채 자신을 보는 별하의 손에 그의 체온으로 데워진 파우치 하나만을 남긴채 후다닥
주방을 나가 버렸다.
언제나, 매번 이런 식이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나 자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게 만들고는 또 용건도 용무도 없이 후다닥 사라져
버린다. 별하의 입장에서는 고단수의 괴롭힘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영진의 행동은 워낙에 나쁜 평판에 더해져 별하를 질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꼭 이렇게 손에 쥐어주고 가는 것이.
"아아악!"
자라 엑기스이니 별하의 입장에서는 시비 붙자는 걸로 생각되는 게 당연했다.
"곰치 저 씨발 새끼가 지금 나하고 한판 붙자는 거야 뭐야! 진짜……. 이씨!"
자라 건강을 염려하여 자라 엑기스를 먹으라고 갖다 주는 것에 대해 순수한 호의와 정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라가 세상 천지에
몇이나 되겠는가.
노여움으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별하의 손에서 야멸차게 자라 엑기스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