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35)

동은 사실 외근이라는 것을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낙하산 인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제갈동 즉, 현직 외교부 장관의 외동아들에게 외근을 강요할 수 있는 공무원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화이트보드에 쓰여진 안과장의 외근 계획표에서 '광동수산'이라는 문구를 발견하자마자 지끈거리며 

허리가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면서 머리 쪽으로 열기가 뻗쳐 올라가는 듯 

시야가 좁아지자 동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굳이 안과장의 위생 검열에 따라 나서겠다고 하자 의아함이 번지던 사무실 분위기는 지금에 와서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매뉴얼에 따라 시료를 채취하고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와중에도 남자는 시종일관 빙글빙글 웃으며 안과장과 농담 따먹기를 

했던 것이다.

동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남자가 거슬렸다. 마치 지금까지 동의 잠자리로 스며들어 질척하고 음란한 목소리로 되풀이되던

기억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의 태도는 화가 치밀었다. 모른척하는 일은 오히려 자신의 몫이 아니던가.

하지만 남자는 동을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이 오늘 처음으로 만나는 것처럼. 그날의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역시. 광동수산의 회 맛은 어딜 내놔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고등어 회가 이렇게 싱싱하고 비리지 않기는 드문데 말입니다."

안과장의 칭찬은 결코 식사를 접대 받는데 따른 과장된 인사말이 아니었다. 동의 까다로운 입맛에도 광동수산의 회는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주 메뉴인 회 뿐만이 아니라 매운탕도 간이 잘 배어든 무와 싱싱한 야채며 질이 떨어지지 않는 

양념들의 맛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다 밑반찬들도 훌륭했다. 업소용 냉장고 속에 잘 정돈되어 있는 식재료들을 조금 전에 

눈으로 확인했으니 동의 입장에서는 흠 잡을 곳이 없는 만찬이었던 것이다. 그가 기분 나쁜 이유는 밥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태연하게 모르는 사람 흉내를 내고 있는 저 남자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음식을 갖고 횟집을 차린 것입니까? 이 정도면 요정이나 고급 일식집이래도 문제가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박리다매죠. 원래 돈은 사람을 따라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많이 들어야 돈이 모이게 마련이지요."

"하하하. 월급봉투 박한 서민들이야 이런 좋은 음식을 싼값에 먹을 수 있다면 두손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아무리 박리다매라고 

해도 이래서야 남는 게 있겠습니까? 여기 이 해삼만 해도 다른 업소에서는 한 접시 당 이만원은 받는다오?"

"그만큼은 남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럼 식사 하시고 가십시오. 저는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아……. 언제 한 번 직원들과 회식이라도 

오십시오."

동은 너무 싱싱해서 그의 어설픈 젓가락질로는 잘 잡히지도 않는 해삼과 씨름하다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비단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어선 광해는 시종일관 태연하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동은 저 옷자락들이 쓸리는 소리를 

예사롭게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지요. 언제 한번 직원들과 같이 오도록 하죠. 바쁘실텐데 나가 보십시오."

"그럼……."

창호가 발라져 있는 격자문이 가볍게 닫히고 내실에 안과장과 둘만 남겨진 동은 곁에서 떠들고 있는 안과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초조했다. 아는 척을 하며 귀찮게 굴 것이라 생각했던 남자가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순리대로 생각해 보면 사내 쪽에서 그리할 이유라는 것이 희박하다는 사실도 짜증스러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라면 

고관대작 집 외동아들인 자신과의 인연에 기대 뭔가를 바라는 비열한 남자들이 수태 등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실 알게 뭐란 말인가. 제갈동이 이마에 외교부 장관 제갈승민의 외동아들이라 써붙이고 다니지 않는 이상 그는 그저 구청 

위생과의 말단 직원에 불과한데 말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어머니가 지겹도록 경고하던 여우같은 계집이 아니다.

"짜증나 미치겠네……."

"응? 뭐라고?"

"아. 아닙니다. 저 잠깐 손 좀 씻고 오겠습니다."

"그래. 화장실이 어디냐면 말이야. 우리 올라온 계단 맞은 편 복도로 쭉 가면 그 끝에 있어."

"예."

동은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쥐어뜯으며 내실을 나섰다. 탐욕스럽게 고등어 회를 씹어 삼키는 안과장은 이미 그의 안중에 없었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이라 홀은 빈자리가 더 많았다. 그리고 내실이 있는 이층에는 인적이 없었다. 동이 어둡고 긴 복도를 걸어가며 

귀를 쫑긋 세우자 사내의 콧노래 소리가 바로 저만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내가 조금 더 행동을 재게 해서 사라져버렸다면 동은 원래 계획한 대로 공들여 손을 씻고 내실로 돌아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사내가 그렇게 즐겁다는 듯 콧노래까지만 부르지 않았더라면 동은 아쉬운 마음을 접고 사내를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잔뜩 빈정이 상해있던 동은 사내의 콧노래 소리에 확 꼭지가 돌아버렸고, 언제나 생긴 것과 다르게 논다는 잔소리를 

들어왔던 것처럼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계단참에서 사내를 따라잡을 수 있었고 느슨하게 묶은 그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낚아채고는 돌아선 사내의 입술을 물어뜯어 

버렸다.

"읍?"

비단 물어뜯는데서 그쳤다면 덜 창피스러웠을 것을 시원하면서 포근하고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사내의 입술은 동의 이성이 

상습적으로 가출하는 것에 일조했던 것이다.

거칠게 입술과 입술이 얽혀드는 동안 동은 사내가 웃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웃으라지. 뭐……. 언제부터 그딴 것에 신경 쓰고 살았다고 내숭 떨며 하고픈 일을 참겠는가.

계단 위에 서서 동은 광해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고, 그렇게 비단 옷자락을 움켜쥔 채 제 욕심을 얼추 절반가량 채우고서야 

할딱이며 광해를 놓아주었다.

광해의 입장에서야 얌전히 비늘까지 벗고 밥상위에 올라가 누워주시는 분을 불쾌하다 생각할 이유가 없었고 말이다.

"……거 용왕 상투를 틀어쥐고 흔들 인사일세?"

"왜 모른척 하는 겁니까?"

당돌한 도발이 썩 마음에 들었던 광해는 나지막하게 속삭였지만 모질게 부릅뜨고 있는 고양이 눈은 영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그런 광해를 노려보고 있었다.

광해는 단단히 토라진 인간을 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내가 생전 처음 보는 네 다리를 벌리고 물고 빨 정도의 뻔뻔함은 있지만 아무렴 공사 구분을 못할 거 같은 거냐? 그 정도로 

앞뒤분간 못하는 위인은 아니다."

"그런 겁니까?"

사실 광해도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는 녀석인지 알 도리가 없는 녀석이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기다리지 

않았다고는 말 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리던 녀석이 구청 위생과 직원으로 위생 검열을 나올 줄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이쪽에서 모른척했다며 시비를 걸어오는 녀석 쪽이 모른 척은 더 먼저 하지 않았는가. 새침하게 입을 다물고서 

위생 검열에 관해서만 관심 있는 양 앙큼을 떤 것이 누구인데 이켠이 무심했다며 이리 저돌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광해는 좀 엉뚱하기는 해도 발칙할 정도로 제 바람에 솔직한 동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처음 보았던 그날보다 더 많이 

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네 상관 앞에서 이렇게 했어야 했단 말이지?"

"……!"

이번엔 광해의 손이 뻗어와 동의 어깨를 잡았다. 비단 잡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끌어당겨 품에 안기까지 했다.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와서는 꾹꾹 누르듯 머리통을 매만지는 시원하고 단단한 손가락이 기분 좋아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동이 눈을 감자 광해는 그의 감은 눈꺼풀 위에 입술을 얹고는 혀를 내밀어 속눈썹을 핥았다.

"내게 바라는 게 왜 모른척 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뿐이냐?"

"흐음……."

간지러운 느낌이 화끈한 열기로 바뀌자 동은 거머쥐고 있던 비단 옷자락을 놓으며 자신도 모르게 광해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이렇게 허물어지는 자신이 너무 즉물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남자의 관능적인 손길과 입술을 받고 있노라면 논리적인 생각 

따위는 털끝만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이 그를 엄습했던 것이다.

"아니면 더 뜨겁고 끈적거리는 것을 원하는 거냐?"

"……."

"음탕한 놈."

광해는 그 말을 끝으로 동에게서 완전히 손을 떼버렸다. 달아오르는 암컷을 희롱하는 일은 몹시 흥겨운 일이었다. 특히나 

심술궂기로 유명한 동해 용왕은 애가 닳아 어쩔줄을 모르는 암컷들이 약이 바짝 올라 휘두르는 앙칼진 손톱을 더 좋아한다는 

구설수에까지 올라 있는 자였다. 하지만 오늘 이 귀여운 녀석은 삼충의 부재로 혼란스러웠던 그날에 비해 많이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사돈 남 말하지 마십시오."

"후후후……."

"시간 되십니까?"

"흐응?"

광해의 손에 의해 마구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돈한 제갈동에게서 방금까지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짐작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건너건너 건물에 호텔이 있습니다. 제 이름으로 방을 잡아 둘테니 오실 수 있겠습니까?"

"호텔?"

"제 이름은 제갈동입니다."

"재롱동이."

"동. 입니다."

"알아. 제갈동."

타이까지 단정히 고쳐 맨 동의 얼굴에서 빈틈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광해는 지금 그가 하고 있는 말의 이질적인

괴리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처음부터 광해에게 제갈동이란 인간은 생김새와는 달리 몹시도 파격적인 허술함을 가진 

인간이었으니까 말이다.

"물 나이트 옆에 호텔 말하는 거냐?"

"물 나이트?"

광해는 생전 듣지 못했던 상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을 보며 흡족하게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제법 유명한 곳인데도 

전혀 알지 못한다는 표정을 보면 놀아나는 성품 또한 아닌 것 같고, 생긴 것 그대로 살기는 살았으되 본성은 그렇지 아니한 인간의 

전형이 아니던가.

품에 안으려는 암컷의 정순한 과거는 수컷을 지극히 만족시키는 것들 중에 하나였다.

"아니면 도로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야 하는 호텔을 말하는 거냐."

"도로 안쪽의 사정은 잘 모릅니다. 차를 타고 지나다녀만 봤으니까."

"알았다. 급한 일만 처리 해 놓고 가지."

"그럼……."

한 치의 미련도 없는 듯 말끔하게 몸을 돌려 복도 안쪽의 어둠으로 걸어가는 동의 뒤를 광해의 푸른 연초 연기가 뒤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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