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에필로그.
흘러가는 잔돌까지 모두 보이는 맑은 계곡이었다.
한낮의 볕이 흩날려 물아래 깔린 돌들을 간지럽히고, 밥풀이라도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송사리 떼가 물가를 이리저리 헤집는 앞이기도 했다.
삐이익!
요란한 휘슬 소리와 함께,
“야! 그거 금에 안 맞았어! 봐! 요기 이렇게 나갔는데 공이 동그래서 금 밟은 것처럼 보이는 거야! 이거 무효야!”
석강호의 불평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일단 나와.”
강찬이 웃으며 말을 건네고서야 석강호는 휘슬을 든 문바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다음은 증평의 특수팀과 대테러 팀의 족구 시합이었다.
삑!
문바키의 사인이 떨어지자 서브가 시작됐는데 그 순간부터 족구 진기명기처럼 멋진 경기가 펼쳐졌다.
“세수 좀 하고 올게요.”
수건을 든 강찬은 석강호, 제라르와 함께 계곡 아래로 걸었다.
“대장! 담배 피울 거면 내가 커피 타 갑니까?”
“제리!”
“왜 졸업하면 담배 피우는 거 괜찮다며!”
제라르가 질문을 던졌고, 미쉘이 바로 눈치를 주었는데, 이미 들을 사람은 다 들었다.
강찬이 입맛을 다시며 아래로 내려가는 뒤에서 석강호가 두 번쯤 눈을 부라리고 그 뒤를 따랐다.
“미쉘! 커피 타서 제라르에게 주고, 미영아! 넌 우리 강 선생님 커피를 좀 타주련?”
오늘 주방 총괄 대장은 엄지환의 노모였고, 보조는 유혜숙이었다.
특히나 엄지환의 모친이 장성에 있는 닭과 오리들을 싹쓸이하다시피 잡아 와서는 커다란 가마솥 열 몇 개에 끓여대고 있어서 주변으로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가득 피었다.
“아빠.”
김미영이 종이컵에 담긴 봉지 커피를 들고 강철규의 옆에 앉았다.
“여행은 언제 가니?”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가평 계곡의 평상에서 강철규가 들고 있는 커피 향만큼이나 잔잔하게 질문을 던졌다.
“찬이가 그런 말을 했어요?”
깜짝 놀라는 김미영이 강대경과 유혜숙을 얼른 보았다가 시선을 가져올 때 강철규는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강 대표님과 사모님도 아신다.”
“예에?”
“그리고 우리 셋에게 다 허락받았어.”
울상인 김미영을 보며 강철규가 전에 없이 넉넉한 웃음을 보였다.
“미영아.”
“예, 아빠.”
“책임감은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못 배운 사람들이 있어. 그럴 기회가 없었으니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얼굴에 햇볕을 받으며 강철규가 입을 열었다.
“찬이에게 하나씩, 천천히 알려주었으면 싶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이 어떤 건지.”
쑥스럽게 웃는 김미영의 등을 강철규가 다독일 때였다.
“부러워서 왔습니다.”
종이컵을 든 강대경이 강철규의 건너편에 앉았다.
“너희 여행 가기로 했다며?”
“아이! 너무하세요!”
강대경의 농담에 김미영이 얼굴을 가렸고, 강철규가 모처럼 커다랗게 웃어댔다.
“그런데 저요. 닭 삶는 일 돕고 싶은데 엄마가 못 오게 하세요.”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인데? 저렇게 건장한 사람들이 잔뜩 있는데 도우면 저 사람들이 도와야지, 왜 네가 그걸 해?”
강대경이 유혜숙을 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오늘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우리와 있을 때는 절대로 그런 눈치 안 봐도 된다. 우리 집은 원래 남자가 설거지해.”
말을 마친 강대경이 햇살이 눈부시게 떨어지는 건너편 산을 바라보았다.
“언제 가세요?”
“아프리카? 글쎄? 일주일쯤 있다가 출발할까 하는데?”
김미영의 질문에 강대경이 답을 한 다음이었다.
“훈련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보름쯤 뒤에 2기 소집입니다. 저도 일주일쯤 뒤에는 출국해서 훈련 계획 세우고, 준비할까 합니다.”
이번엔 강대경의 질문에 강철규가 답을 했다.
아프리카 연합 특수팀 초대 사령관이 강철규다.
일반병이 아니라 특수팀이다.
대우가 워낙 좋았고, 자부심과 명예, 긍지가 어찌나 드높은지 통상 30명을 선발하는 1기에 2만 명이 넘은 지원자가 몰렸고, 이번 2기는 더 많은 숫자가 모인다는 보고도 있었다.
“세상 참!”
강대경이 턱없는 탄식을 쏟아냈다.
대한민국이 아프리카 연합을 이끌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었나.
대한민국 국적을 지니면 전기요금이 없고, 의료비와 대학까지의 학비가 전액 면제인 나라라니.
강대경은 고개를 저으며 돌아가야 할 반둔두를 떠올렸다.
“언제 또 오십네까?”
강한 음성 뒤에 섞인 안철호의 아쉬움이 떠올라서 그는 조용히 웃었다.
이번에 돌아갈 때는 티셔츠와 편안한 옷, 그리고 운동화 몇 개를 챙겨갈 생각이었다.
계곡 아래로 내려온 강찬과 석강호, 제라르는 커피를 옆에 두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찰칵.
“후우.”
살 것 같다.
신발을 벗고 물에 발을 담그는 것도, 이렇게 셋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꿈만 같소. 푸흐흐흐.”
석강호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 다음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제라르가 강찬을 향해 고개를 가져왔다.
“다른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것 같지요?”
“야! 병아리!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
석강호가 확 인상을 찌푸렸는데도 제라르는 여전히 미련이 남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예, 너도 보긴 봤잖아? 드래곤의 가슴을 찢어서 심장을 움켜쥐던 대장을.”
“푸흐흐. 그린베르트의 주신이라니? 하여간 따라다니면 인생 정말 박진감 넘쳐요!”
석강호가 당시를 떠올리는 얼굴로 킬킬거리자 제라르가 고개를 끄덕였고, 강찬은 픽 웃고 말았다.
“아프리카는 언제 갈 거요?”
“상황 봐서.”
“하여간 대장도 대단하우. 전직 대통령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는 거 보면.”
“내가 원했던 게 아니잖아!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냐? 청렴한 아프리카 생각이나 해봤냐? 그리고 난 솔직히 원장님이 더 놀랍다.”
“그러게 말이오. 아프리카 연합의 정보국을 맡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해봤소.”
“대한민국에 기득권을 주고 싶으셨겠지. 그렇지만 우리는 초석만 만든다. 나머지는 앞으로 교육받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끌어나가는 것이 맞아.”
강찬의 말에 석강호와 제라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 하나 더 주라.”
찰칵.
셋이서 또 하나씩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래도 영향력이라는 게 있지. 그게 어디 쉽게 다 넘어가겠소? 벌써 중앙아프리카에서 어느 정도 우리 말이 통하는 것만 봐도 그렇잖소.”
“후우. 그런 게 뭐 중요하냐. 우리 셋이 이렇게 함께 있으면 되는 거지. 이제 일 얘기 그만하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그런데 말이오. 처음에…….”
강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강호가 너무 오래돼서 누렇게 바랬을 아프리카 시절 초창기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고,
“그건 다예 네가 멍청해서 그런 거지!”
제라르가 가세했으며,
“에이, 지겨운 새끼들! 그때 정말 너희 두 놈 다 죽는 줄 알고 좀 놀랐었다!”
강찬이 끼어든 뒤에,
“오! 이건 또 처음 아니오? 뭐요? 망갈라 때 놀라긴 했었소?”
곧이어 셋이서 킬킬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고등학교에서 대장을 딱 본 거야! 나는 그때 바로 알아봤거든!”
“야! 네가 언제 그걸 알아봐? 옥상에서 내가 물어보고 네가 갓 오브 블랙필드라고 답하면서 안 거지!”
“에헤! 거, 병아리 듣는데 그렇게 바람을 빼쇼?”
“돌대가리가 어디서 소설을 써?”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닌데 이상하게 셋이 있으면 이렇게 킬킬거리게 된다.
따사로운 햇살, 주변에 펼쳐진 푸른 산,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곡 앞에서 강찬은 석강호, 제라르와 함께 한참을 떠들었다.
“킬킬킬!”
“에이! 더러운 새끼!”
석강호가 침을 흘려서 강찬이 냅다 욕도 던졌다.
인사말.
안녕하세요? 무장입니다.
먼저 이렇게 급작스럽게 2부 완결을 알려드리는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짐작하신 독자님들이 많이 계셨던 것처럼, 1부가 종이책 24권 분량이어서 사실 2부에서는 자칫하면 1부를 우려먹는 장면이나 반복된 감정이 나올 위험이 많았습니다.
일반적인 휴식 장면이나 미쉘, 강대경과 유혜숙, 김미영을 만나는 장면을 모두 걷어낸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5권 9장부터 이계로 넘어가서 블랙헤드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돌아온다는 내용을 설정해 두었고, 초고도 작성해 두었습니다만, 오랜 고민 끝에 그 부분을 또 삭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 오랜 기간 마루 권용희 이사, 엠제이 스토리의 김미영 대표와 함께 논의하였는데, 갓 오브 블랙필드의 좋은 모습을 망치지 말자는 뜻에 동의하고 격려해 주었기에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뜻밖의 행운 같은 작품입니다.
갓 오브 블랙필드는 제게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늘 우리 가슴에 담긴 대한민국이란 네 글자와 태극기라는 선명한 그림이 자랑스러운 것이었음을 되새기는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독자님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본권 24권, 외전 3권, 2부 5권을 쓰면서 부족함과 한계를 많이 느꼈고, 만약 여기에서 권수를 더하면 그건 글쟁이의 작품이 아니라 강찬을 팔아먹는 장사꾼이 되는 느낌이어서 차마 더 쓸 수 없었습니다.
지금껏 성원해 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송구한 사죄와 고맙고 감사한 인사를 동시에 올립니다.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는데…….
강찬을 떠나보내면서 가슴이 울렁입니다.
부족한 글쟁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강찬도, 석강호도, 제라르도, 그리고 강철규와 증평의 특수팀, 대테러 팀 대원들이 더 빛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언제고 글쟁이를 벗어나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또 고맙고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에 주신 커다란 성원과 혹여 아쉬운 부분이 나올라치면 도움과 격려 말씀 주신 독자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간에 좋은 말씀을 나누시며 분위기를 이끌어주신 독자님들,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이 글이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도록 밤늦게까지 글쟁이를 도왔던 마루의 권용희 이사, 최상미 교정담당 과장, 업데이트를 위해 애써 준 이소지, 안다희 직원분께 감사드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열과 성을 다해 응원해 준 카카오 황현수 이사님과 전대진 과장, 브리드 문상철 대표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갓 오브 블랙필드를 말씀드릴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동료이자 후배 작가가 있습니다.
‘절대자의 게임’을 완결한 화운 작가입니다.
어려운 고비에서 함께 스토리를 고민해주었고, 그가 가진 천부적인 스토리 텔러로서의 재능을 아낌없이 꺼내어 부족한 제 글 솜씨에 그나마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다음 작품부터 MJ STORY에서 독립하는 화운 작가의 발전을 고대하며 이 자리를 빌려 고맙고 감사한 인사를 전합니다.
엠제이 스토리 김미영 대표, 마라도 작가, 김태형 작가, 기태수 작가, 이한결 작가, 향주향낭 작가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돌이켜 보면 이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어서 그나마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심정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당분간, 후배 작가의 작품 ‘렙업하는 마왕님’의 퇴고를 도와줄 예정이고, 지금 연재하는 ‘형사의 게임’을 단단하게 마무리 짓는 데 전념할 생각입니다.
최근에 작업실을 옮겼습니다.
혹시 엠제이 스토리의 소식지를 올릴 수 있다면 그곳에 작업실 전체 모습과 제가 작업하는 공간을 보여드릴까 합니다.
뒤쪽에 올린 부록은 5권 말미에 이계로 넘어가는 장면의 초고입니다.
독자님들께 송구한 마음에 앞쪽 분량을 올려드립니다.
이런 이야기가 흥미는 있을지 몰라도 강찬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뒷이야기와는 확실히 톤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저 고맙다는 말씀만 또 올리며 길었던 글을 마칩니다.
독자님들의 가정과 하시는 일에 행운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무장 드림.
부록. 또 다른 세상 속으로.
기억하는 것은 붉은빛이 온 세상을 삼킬 것처럼 쏟아져 나온 것과 몸뚱이를 쥐어짜는 듯 한 고통이었다.
털썩!
그리고 강찬은 느닷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끄으응!”
이를 악물고 팔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킬 때, 엄지손톱 크기의 돌들이 손바닥을 찌르며 달려들었다.
어쩐지 떨어질 때 온몸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더니……?
강찬은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뾰족한 산들이 겹겹이 싸여서 바깥을 가렸고, 소나기가 내리기 직전의 하늘에서는 블랙헤드가 피처럼 붉은색을 뿜어내며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휘이이잉!
바람도 불고, 유황처럼 고약한 냄새도 들렸으며, 서늘한 기운도 분명했다.
염병할!
강찬은 몸의 이곳저곳을 다시 만져보았다.
감각은 분명히 있었다.
죽은 게 아니었나?
블랙헤드가 폭발했었다.
그리고 엄청난 빛줄기가 덮친 것은 기억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정장에 셔츠만 입은 채로 뾰족한 돌산에 뾰족뾰족한 작을 돌 위에 떨어져 있었다.
“하아!”
산의 중턱이었다.
이 삶이 싫으면 언제고 뛰어내리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깎아지른 절벽이 앞에 있었고, 뒤로는 정상으로 향하는 바위가 전부인 그런 산의 중턱 말이다.
강찬은 바위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역시나 어두운 하늘과 그 속에서 높다랗게 떠 있는 블랙헤드가 분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피식 웃은 강찬은 주머니를 뒤졌다.
담배도 있고, 라이터도 있었다.
그렇다면?
허리 뒤쪽과 오른쪽 발목에 권총이 한 개씩, 왼쪽 발목에 대검, 마지막으로 왼쪽 허리 뒤편에 탄창과 무전기도 있었다.
강찬은 담배를 들여다보며 개수를 보았다.
제법 많이 남은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찰칵!
“후우-!”
분명 죽은 것 같지는 않은데 당최 이곳이 어딘지는 알기 어려웠다.
다시 한 모금의 담배를 더 빨아들인 강찬은 이마쯤에 떠 있는 블랙헤드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이게 어쩌면 혼수상태로 병원에 누워서 꾸는 꿈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뛰어내렸을 때, 병원 침대에서 화들짝 뛰어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후우-!”
어쩐지 블랙헤드의 저주 같기도 했다.
강찬이 사는 세상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블랙헤드가 핵융합시설을 이용해 자신의 세상으로 끌어들인 것 말이다.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느닷없이 한국의 엉뚱한 고등학생 몸에 집어넣더니 온갖 고난이 끝나는 마당에 이런 황량한 세상에 홀로 남겨지다니.
은은한 붉은빛의 세상은 어딘지 괴기스럽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커다란 정육점 진열대 구석에 앉은 듯 한 느낌도 들었다.
석강호와 제라르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까? 아니면 엉뚱한 세상으로 던져져서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을까?
어쩌면 죽어 나자빠진 그곳의 몸뚱이를 붙들고 울고 있을지 모른다.
강찬은 고개를 돌려 그림자를 보았다.
검은색의 그림자가 묘하게 의지가 되었다.
“해보자는 거지? 네가 사는 세상에서?”
이제는 이마를 지난 블랙헤드를 보며 강찬은 혼잣말을 뱉어냈다.
강찬이 돌산의 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을 때였다.
자그락.
누군가 잔돌을 밟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사람일 수도 있고, 짐승일 수도 있었다.
스응.
강찬은 발목에 걸어둔 대검을 뽑았다.
그리고 손을 허리 뒤로 돌려 등을 기댔던 돌을 조심스럽게 짚어 가며 몸을 세웠다.
이렇게 일어나면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었고,
자그락.
그 안에서 분명 움직이는 소리가 또 들렸다.
후욱. 후욱.
천천히 흘러가는 세상에서 붉은빛이 만든 그림자가 돌벽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그락.
그리고 잔돌 밟는 소리가 지금은 강찬이 서 있는 왼편 가까이에서 들렸다.
소리가 나지 않는 동안에도 조금씩 움직였던 게 분명했다.
후욱. 후욱.
강찬이 숨소리를 들으며 대검을 거꾸로 들고 노려볼 때였다.
자그락.
이번엔 오른쪽에 느닷없이 돌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두 놈이구나!
강찬이 몸을 움츠리고 자세를 잡은 직후였다.
화아악!
그와 동시에 오른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사람!
콰악!
강찬은 달려든 놈의 목을 움켜쥐기 위해 왼손을 뻗었다.
터억!
상대가 강찬의 손목을 쳐내는 순간이었다.
강찬은 놈의 옆구리를 노리는 것처럼 움직이다가 느닷없이 왼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와락!
있었다.
강찬의 움직임에 당황한 것이 분명했는데도 왼편의 덩치는 나름 재빠른 몸놀림으로 강찬을 향해 달려들었다.
휘익!
강찬은 달려드는 덩치를 향해 팔꿈치를 날렸다.
“대장!”
그때 걸걸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핏빛 아래에서 석강호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서 제라르가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셋이서 바위산에 등을 댄 자세로 앉아 사이좋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석강호, 강찬, 제라르의 순서였다.
“너희는 벌써 사흘이나 이곳에 있었다는 거지?”
“그렇다니까요. 지랄 맞은 토끼에 깨물려서 여기 살점이 이렇게 뚝 떨어진 거 아니요?”
석강호가 바지 아래를 걷어서 정강이를 보여주었다.
“토끼가 무슨 개냐?”
“야! 제라르! 말 좀 해봐.”
강찬은 고개를 돌려서 제라르를 바라보았다.
“이번은 다예 말이 맞습니다. 저 돌대가리가 토끼를 잡아먹자고 가서 냅다 발로 찼는데 그놈이 펄쩍 뛰더니 다예 다리를 깨물었습니다.”
강찬이 기가 막혀서 고개를 저을 때였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토끼들이 떼로 달려들어서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대검이랑 권총 있었을 거 아냐?”
“그게, 들판을 시커멓게 덮은 채로 달려들어서 일단 튈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끼가 시커멓다고?”
“까만 토끼요!”
석강호가 분하고 억울한 것처럼 툭 한마디를 던져 넣었다.
“그럼 사흘 동안 뭐 먹고 지냈냐?”
“뭐, 첫날은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서 그냥 굶었고, 둘째 날은 녹색 돼지를 한 마리 잡아서 먹었소.”
“하아!”
녹색 돼지란 말에 강찬은 이상하게 한숨이 푹 나왔다.
“생긴 게 돼지지, 이건 또 요만한 거요.”
석강호는 좀 큰 사이즈의 돼지저금통 정도로 손을 벌려 보였다.
“우리 죽은 건 아니겠지?”
“죽었다면 셋이 이러고 있겠소? 배도 고프고, 깨물리면 아프고, 돼지 잡아서 먹기도 하고.”
“그건 그렇네.”
강찬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여긴 나무 하나 없는데 어쩐 일로 왔냐?”
“저 돌대가리가 또 토끼 건드렸다가 뛰어왔습니다. 이쪽에서 뭔가 움직이길래 혹시 돼지 아닌가 싶어서 양쪽에서 몰았던 거구요.”
제라르의 답을 듣는 사이, 강찬은 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비볐다.
“아래쪽에는 물이나 나무가 있고?”
“저리로 쭉 올라가면 금 쫙 그어놓은 것처럼 녹색이 펼쳐집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토끼 세상이요. 우리도 그 이상은 못 가봤어요.”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막말로 말도 안 되는 곳에 느닷없이 떨어진 참이다.
토끼가 개처럼 물어뜯고, 사흘을 먼저 이곳에 떨어진 것 정도는 그냥 애교 수준이었다.
“블랙헤드가 지랄 떤 거 같지?”
“지금은 밤이요. 낮이 되면 저게 세 개 떠서 환해집디다.”
“염병.”
강찬의 말에 제라르가 픽 하고 웃었다.
“왜?”
“그래도 이번엔 셋이 같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습니다.”
그건 또 그렇다.
강찬이 픽 하고 함께 웃자 석강호가 “푸흐흐.” 하며 따라 웃었다.
“아무튼, 핵융합 폭발 때문에 이곳에 떨어졌다면 어떡해서든 저 빌어먹을 돌멩이를 터트려야 다시 돌아간다는 뜻 아니겠냐?”
“하늘에 달린 걸 무슨 수로 터트립니까?”
석강호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든 다음이었다.
부슥. 부스슥. 부슥. 부슥.
묘한 소리가 강찬의 귀에 들렸다.
“어?”
석강호와 제라르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바위 뒤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대장! 얼른 일어나요! 토끼요! 토끼!”
그리고는 정말 다급한 음성으로 강찬을 재촉했다.
토끼가 온다고 저렇게 놀라다니!
어쩐지 실감 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석강호와 제라르가 저럴 정도라면 일단 믿어주는 것이 맞다.
강찬은 빠르게 몸을 일으켜 제라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랐다. 진심으로.
시뻘건 블랙헤드의 불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산 뒤편의 들판을 시커먼 토끼가 온통 뒤덮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강찬은 분명하게 보았다.
중간 중간에 주둥이를 움찔거릴 때마다 보이는 그 날카롭고 뾰쪽한 이빨들을 말이다.
가장 선두에 선 놈들과의 거리가 대략 20미터쯤 남았다.
강찬이 고개를 돌리자 제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려요! 대장!”
와락! 와락! 와락!
셋이 달리기 시작했고, 제라르의 고함을 들은 것처럼 토끼들이 일제히 속도를 내서 쫓아왔다.
찍찍찍! 찍찍! 찍찍찍!
커다란 들쥐처럼 묘한 소리를 내며 토끼들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헉헉! 헉헉!”
셋이서 악착같이 달렸는데도, 거리는 벌써 10미터쯤으로 줄어있었다.
“저기요!”
석강호가 앞쪽을 가리켰다.
척 봐도 낭떠러지였다.
“뛰어요!”
찍찍찍! 찍찍찍! 찍찍!
막말로 안 뛰었다간 토끼 밥이 되게 생겼다.
화아악! 화악! 화아악!
셋이서 낭떠러지를 힘차게 뛰었다.
섬뜩한 강이 저 아래로 보였는데,
터억! 턱! 턱!
7미터쯤 되는 거리를 뛰어넘은 강찬과 석강호, 제라르는 건너편 난간에 매달렸다.
그리고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토끼들이 우수수 물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보였다.
사람 참!
살다가 토끼들이 까마득한 강으로 떨어지는 게 통쾌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허억! 허억!”
개 같은 돌멩이 새끼!
사람을 이런 곳에 데려와 죽이려고 해?
낭떠러지에 매달린 강찬이 기를 쓰고 몸을 올려 허리까지 올라간 다음이었다.
부스스.
제라르가 붙잡고 있던 곳의 돌들이 하나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잡아! 제라르! 잡으라고!”
강찬이 고함을 질렀는데 돌이 무너지는 게 더 빨랐다.
찍찍찍! 찍찍!
토끼들이 분하다는 것처럼 울부짖는 소리를 배경으로 강찬은 제라르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부슷스스스-!
무너지는 돌들에 밀려 아래로 떨어졌다.
“대자-앙!”
석강호가 팔을 내밀어 강찬의 목덜미를 잡는 순간이었다.
휘이익!
제라르가 떨어졌고, 이어서 강찬이, 그리고 강찬의 뒷덜미를 잡은 석강호가 줄줄이 아래로 떨어졌다.
돌멩이! 두고 보자!
첨버-엉!
강찬은 붉은빛을 받으며 도도하게 흐르는 강 속으로 깊게 가라앉았다.
첨버-엉!
물에 빠지면 사람 다 똑같다.
물 먹어야 하고, 악착같이 위로 떠오르려고 애쓰는 거 말이다.
“푸후-!”
강물은 정말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잠기는 순간에, 뿌연 강물과 자잘한 돌들이 보였고,
“푸후-!”
억지로 위로 올라갔을 때는 양쪽의 절벽이 보였다.
꼬르륵!
강찬은 물속에 가라앉아서도 악착같이 눈을 뜬 채 붙잡을 무언가를 찾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시커먼 덩어리도 보았다.
다예나 제라르일 거다.
강찬이 강 위로 몸을 들려는 순간이었다.
터억!
강찬의 허리와 배를 무언가가 걸듯이 감았고,
“푸후-우!”
거짓말처럼 강 위로 몸이 불쑥 올라갔다.
“캐액! 캑!”
그런데 뭐에 걸린 거지?
비참하게 가쁜 기침을 뱉어낸 강찬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
크르르르.
빌어먹을 블랙헤드 새끼!
강찬은 태어나서 용을 처음 봤다.
그것도 서양 놈들이 생각하는 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