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갓 오브 블랙필드를 만나야 합니다. (2)
전투기의 사다리에서 내린 강찬이 주변을 돌아볼 때였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귀에 익은 음성과 함께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로버트가 요원들 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약속은?”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반 대원들은 두 사람의 정체를 모르고 있어서, 그 점만 양해해 주시면 됩니다. 함께 온 세 명은 따로 지키겠습니다.”
라우드와 그라펠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 함께 온 보조 배터리들이 미국에서 보낸 대원들이라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질까 봐 로버트는 극도로 경계하는 눈치였다.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바로 몸을 돌렸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스펀지를 밟는 것처럼 바닥이 푹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강찬이 그 정도인 거고, 연달아 전투기를 탄 석강호와 부상이 있었던 제라르는 코피가 터지는 바람에 솜을 꽂아넣은 모습으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로버트가 활주로 한쪽에 있던 지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강찬 일행을 기다렸다.
강찬이 조수석, 석강호와 제라르가 뒤에 탔으며, 운전석에 로버트가 올라탔다.
부으응.
로버트의 마음이 얼마나 급한지를 달리는 지프의 엔진음으로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활주로를 벗어난 지프는 막사의 틈으로 난 작은 길로 들어섰고, 가장 안쪽에 있는 막사 앞에 멈췄다.
그린베레 대원들과 요원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어서 분위기는 제법 살벌했다.
“이곳입니다.”
차를 세운 로버트가 잽싸게 운전석에 내렸다.
조수석 문 따위를 열어달라고 기다릴 강찬은 아닌 거다.
강찬과 석강호, 제라르가 지프에서 내리는 동안, 로버트는 막사의 문을 향해 움직였다.
새벽녘의 싸늘한 공기와 부대 외곽을 밝히는 조명, 그리고 멀리에서 보이는 엄청난 숫자의 촛불들을 뒤로 한 채, 강찬은 막사의 문으로 움직였다.
로버트가 문을 안으로 밀었다.
위가 볼록하게 올라온 식빵의 형태인 막사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눈부신 형광등 불빛이 가장 먼저 달려들었고, 이어서 따듯한 내부 공기가 강찬을 맞았다.
그라펠트와 라우드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 놈 모두 바로 뒤에 두 명의 요원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 말고도 넓은 막사의 벽으로 다시 열 명쯤의 요원이 굳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라펠트는 일어섰고, 라우드는 소파에 앉은 자세로 강찬을 맞았다.
“오랜만이야. 그라펠트.”
“무슈 강. 나는…….”
강찬은 그라펠트에게서 고개를 돌려 라우드를 바라보았다.
당혹감, 불안함, 끝내 놓지 못한 자존심, 마지막으로 조건을 내밀겠다는 계산까지, 놈의 눈이 몹시 복잡했다.
“우선 옷을 좀 벗고.”
강찬은 덧입었던 비행 슈트를 벗었다.
검은 군복 상의를 시작으로 팔뚝에 걸린 태극기와 이어서 허리에 찬 권총, 다시 발목에 걸어두었던 권총과 대검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없어서 빨리 해결하지. 그라펠트? 하고 싶은 말은?”
“무슈 강! 나는 미국과 영국의 유혹에 넘어갔었을 뿐입니다.”
“내가 널 살려둬야 할 이유?”
“나는 엄청난 정보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핵융합 시설과 관련한 모든 자료와 미국과 영국이 어떻게 이번 일을 꾸몄고, 어떤 명령체계를 거쳤는지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강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라펠트에게 다가갔다.
터억!
그리고는 왼손으로 놈의 머리통 위를 덮고, 오른손으로 턱을 움켜쥐었다.
“무슈 강……?”
당황한 그라펠트의 눈을 들여다보며 강찬은 피식 웃었다.
“쓰레기 같은 정보로 목숨을 구하려고 하면.”
으드드득!
그라펠트의 머리가 기괴하게 돌아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지.”
털썩.
강찬이 손을 놓자 소파 앞에 엎어진 놈의 시선이 라우드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쩔걱. 쩔걱.
강찬은 곧바로 앉아 있는 라우드에게 다가갔다.
“시간이 없어. 널 살려둬야 하는 이유.”
로버트를 힐끔 바라보았던 라우드가 얼른 시선을 가져왔다.
“이봐. 아프리카를 발전시키겠다는 것도 결국 돈을 벌 목적 아닌가. 내가 그만한 금액을 주지. 그리고 날 다시 백악관으로 보내줘. 미국을 손아귀에 쥐란 말이다.”
그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조건이었는지 말을 뱉어낸 라우드가 긴장된 표정으로 답을 기다렸다.
“중국에서 죽은 4만 명과 이번에 세 개의 나라에서 일어난 지진에 죽어간 사람들은?”
“보상하겠다.”
피식.
강찬은 허리를 숙여 라우드의 얼굴 바로 앞에 고개를 디밀었다.
“죽은 걸 되돌리지는 못하는 거지?”
터억.
그리고는 두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선택이다! 선택! 나를 백악관에 보내면 한국은…….”
드드드득!
로버트가 움찔할 정도로 거친 소리와 함께 라우드 역시 앉은 자세에서 뒤편의 요원들을 바라볼 정도로 머리가 돌았다.
털썩.
죽으면 이렇다.
엄청난 부를 지녔고, 미국 대통령이더라도 목이 완전히 돌아가면 아프리카에서 죽어버린 반군과 다를 바 없는 꼴이 전부인 거다.
강찬이 고개를 들었을 때, 요원들은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분할 거다. 억울하기도 하고.
라우드가 어떤 죄를 지었던 간에 그걸 강찬이 처벌하는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는 게 맞다.
강찬은 권총을 뽑아서 먼저 라우드를 겨냥했다.
“시체만이라도 온전히 거두게 해주십시오.”
타앙! 퍼억! 타앙! 퍼억! 타앙! 퍼억!
로버트의 간청에도 강찬은 라우드의 머리와 심장, 그리고 반대편 가슴을 뚫어버렸다.
타앙! 타앙! 타앙!
다음은 아직도 라우드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지그펠트의 몸뚱이에 세 개의 구멍을 내리 뚫었다.
끝이다.
이래도 살아난다면 뭐 그건 뭐, 인정한다.
권총을 꽂은 강찬이 돌아섰고, 로버트가 말없이 문을 향해 걸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던 나라의 요원들이라 충격이 크겠지만, 세상이 다 강한 놈 마음대로인 거 아니겠나.
밖으로 나온 강찬과 석강호, 제라르는 다시 지프를 타고 이동해서 헬리콥터로 옮겨탔다.
“무전기와 도면입니다!”
앞자리에 탄 로버트가 제법 커다란 크기의 도면을 세 장 건네주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이곳에서 20분이면 도착합니다.”
기지를 지키는 외곽 불빛 주변으로 촛불과 휴대전화기를 켜서 흔드는 불빛이 가득한 가운데,
두두두두두두두.
헬리콥터가 곧바로 몸을 띄웠다.
TV의 보도 채널에서는 강찬의 이동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멀리서 잡은 공군 기지에서 일곱 대의 헬리콥터가 하늘로 치솟는 장면이 화면에 올라왔고, 수송용 헬기가 두 대, 호위용 헬리콥터가 다섯 대라는 기자의 설명도 들렸다.
[20분 뒤면 핵융합 시설에 도착하게 됩니다. 시간이 촉박해서인지 전투기가 도착하고, 10분 만에 헬리콥터가 이륙하고 있어서 피로도가 걱정될 정도입니다.]
전 세계가 이렇게 보도 프로그램에 집중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시청률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
강찬이 도면을 거의 외웠을 때였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느닷없이 위험을 알려주었다.
당연한 거다.
다시 태어날 때부터 줄곧 강찬을 노렸던 최후의 적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심장이 차분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일이다.
‘또 그런 거요?’
표정을 알아챈 모양으로 석강호가 번들거리는 시선을 주었고, 강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두두두두두두.
아직 해가 뜨려면 시간이 제법 남았다.
달은 구름 속에 잠들고, 도시의 불빛에 밀려난 어둠이 헬리콥터를 더욱 진하게 감싸서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절망에 깊게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바란 적 없다.
그냥 세상일이 꼬여서 이렇게 살게 된 거지, 블랙헤드의 에너지 빼낼 마음도 없었던 거다.
돌멩이 주제에 에너지를 돌려달라고?
그럼 강찬이 죽어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다음은 앞에서 눈을 번들거리는 석강호의 차례가 된다.
강찬은 헬리콥터의 앞에서 달려드는 어둠을 노려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둘 중 하나가 포기해야 한다면?
강찬은 두근거리는 심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무조건이란 말에 담긴 진정한 뜻을 알려주마.
지금은 지켜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럴 수밖에 없거든.
두두두두두두두.
강찬의 생각을 자르는 것처럼 헬리콥터가 아래로 내려갔다.
“저곳입니다.”
로버트가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고, 그 순간에 높이를 알리기 위해 설치한 붉은 등이 반짝였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좀 더 강하게 경고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블랙헤드에서 뿜어지는 붉은빛이 아직껏 보이지 않았다.
“혹시 시설을 폐쇄한 건가?”
“폭발 위험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에 바로 시설 전체를 폐쇄했습니다.”
로버트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헬리콥터의 앞에서 시설물이 윤곽을 드러냈다.
꼭대기에서 빨간 등이 반짝이는 높다란 철탑을 제외하면 누가 봐도 핵융합 시설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닥에 둥그렇게 솟아오른 돔이 전부였다.
“왼편으로 돌아!”
로버트가 헬리콥터의 조종사에게 방향을 가리켰다.
“앞에 보이는 착륙장에 내린다!”
두두두두두두두!
강찬이 탑승한 헬리콥터가 방향을 크게 틀면서 경호를 위해 따라온 아파치 헬기들이 날렵하게 주변을 감쌌다.
가벼운 진동과 함게 헬리콥터가 바닥에 내려섰다.
허리를 숙인 자세로 강찬은 헬리콥터를 빠져나왔다.
거센 프로펠러의 바람을 피해 조금 멀찍이 선 다음이었다.
석강호와 제라르가 강찬의 뒤에 섰고, 뒤따르던 수송 헬리콥터에서 그린베레 대원 셋이 보조 배터리 셋을 데려왔다.
쩔겅. 쩔겅. 쩔겅.
손과 다리에 수갑과 족쇄를 채우고, 다시 그것들을 쇠사슬로 연결해 놓았는데 몸에 기력이 다한 모양인지 대원들이 밀고 와도 반항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카드를 저기 보이는 입구의 안전장치에 대면 문이 열립니다. 시설물 안은 나도 본 적이 없습니다만, 문을 들어서면 안이 한눈에 보인다고 들었습니다.”
카드를 받은 강찬이 석강호와 제라르에게 고갯짓을 했다.
두 사람이 보조 배터리의 뒤로 가 목덜미를 움켜쥔 것으로 준비가 끝났다.
“돌아가!”
“행운을 빕니다!”
한마디 말을 남긴 로버트와 그린베레 대원들이 바람을 뿜어내는 헬리콥터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강찬과 석강호, 제라르가 몸을 띄우는 헬기의 바람을 피해 고개를 비틀었는데, 우주복 같은 옷을 입은 보조 배터리 셋은 헬멧 덕분에 그럭저럭 견디는 모습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잠깐 사이에 헬리콥터의 불빛이 저 멀리에서 반짝이고, 대신 밀려났던 어둠이 삽시간에 강찬의 주변으로 달려들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었다.
강찬이 돔을 향해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대장.”
석강호의 음성이 강찬을 찾았다.
“우리, 막 담배 하나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오?”
“그놈들은?”
“이놈들 완전히 힘 빠졌소. 그리고 묶어놔서 달리지도 못해요. 바로 옆에서 피우는데 뭐 그런 걸 걱정해요?”
강찬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이런 놈이 옆에 있는 건 크나큰 행운이구나 싶은 말이었다.
“멋진 놈.”
“푸흐흐흐.”
석강호가 담배를 꺼내서 하나씩 돌렸고, 강찬이 라이터를 꺼냈다.
찰칵.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이상하게 셋이 동시에 라이터에 머리를 디밀었다.
주황색 불빛이 상처 입은 제라르와 독이 바싹 오른 석강호, 무조건 이겨야 하는 싸움을 앞둔 강찬을 비춰주었다.
“후우-!”
아무리 어두워도 담배 연기는 제대로 보인다.
셋이서 함께 피우는 담배였다.
하고 싶은 말이 무언가 있는데 입을 열면 엉뚱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잠자코 피우는 담배였다.
“내가 살면서 제일 좋았던 건 다시 태어나서 대장을 만난 거였소.”
그리고 그때 석강호가 나직하게 말을 뱉었다.
“누군가 의지할 사람도 있고, 마음 가는 사람들도 무지하게 생겼고, 대장이랑 별별 곳을 다 다니며 싸워도 봤고, 난 더 바라는 거 없소.”
이놈이 없었다면 이번 삶이 얼마나 허전했을까?
강찬은 픽 웃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난 대장을 몽골에서 만났을 때가 제일 좋았어요. 그때는 엄청나게 당황했는데, 다예를 보자 확신이 들었지요.”
“내가 좀 특별하긴 하지?”
“너 같은 돌대가리가 세상에 또 있겠냐?”
제라르가 툭 하고 말을 건넨 다음이었다.
“푸흐흐흐. 병아리 새끼.”
벌컥 화를 낼 줄 알았던 석강호가 웃으며 대꾸를 던졌고, 제라르가 씨익 웃었다.
이제 정말 시작할 시간이었다.
“가자.”
강찬이 돔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자 석강호와 제라르가 보조 배터리의 뒷덜미를 잡고 앞으로 밀었다.
쩔겅. 쩔겅. 쩔그렁.
쇠사슬 소리를 울리며 돔을 향해 걸었다.
회백색 시멘트로 지은 모양인데 3층 건물 높이였다.
“후우.”
입구가 10미터쯤 남았을 때 강찬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문을 여는 순간, 두꺼운 시멘트벽 안에 있던 블랙헤드가 어떻게 달려들지 모른다.
굶주리고 성난 맹수의 우리를 맨몸으로 여는 느낌이 아마 딱 이럴 거다.
5미터쯤 다가갔을 때, 석강호가 강찬을 힐끔 보았고, 2미터쯤 앞에서는 제라르가 시선을 주었다.
“문을 열 거다. 혹시 문을 여는 순간에 내게 문제가 생기면 이놈들을 한 놈씩 던져.”
“그냥 문을 닫으면 어떻겠소?”
“한번 시작하면 그렇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여차하면 강력한 지진을 만들 기회를 줄 수도 있고. 그냥 들어가자. 삼성동에서처럼 어떡해서든 견뎌볼 테니까.”
그때를 기억하는 석강호와 강찬의 눈빛을 읽은 제라르가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후욱. 후욱.
강찬은 카드를 꺼내 출입구에 한쪽에 달린 장치에 앞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