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결심을 한 모양이군요. (2)
강찬의 단호한 눈빛과 석강호의 다부진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영국과 이스라엘에서 온 대표 두 명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강찬과 에르완을 바라보았고, 정보국 소속인 테드와 정보총국 요원 테오가 바싹 긴장한 채 바라보는 앞이었다.
“에르완. 아군이 7만 이상이 죽었다. 내가 오해하는 부분을 설명해 봐.”
“부총국장! 이곳에는 우리 말고도 3개 나라의 대표들이 더 있소. 그러니 우리 일은 우리가…….”
“다예!”
철컥! 철컥!
에르완의 말을 뚝 자르며 강찬이 불렀고, 석강호가 번개같이 총을 뽑아 에르완을 겨눴으며, 최종일이 연달아 권총을 뽑아서는 테오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강찬이 미국 국가안전국의 테드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오른손을 들어서 그의 뒤에 있던 요원과 영국, 이스라엘의 부총리를 수행하던 요원들의 행동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좋은 선택이었다.”
“고맙소.”
능숙한 프랑스말 답을 들은 강찬이 다시 시선을 에르완에게 가져갔다.
이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프랑스 정보총국장에게 총을 겨누라고 지시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나.
처음 강찬을 보았던 세 개 나라의 대표들은 이제야 그가 왜 절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인지를 깨달은 눈치였다.
어려 보여서 놀랐고, 날카로운 눈빛과 카리스마에 두 번 놀랐으며, 에르완을 상대로 총까지 뽑아드는 강단에 저절로 마른침을 삼키는 지경이었다.
“마지막 기회다. 에르완. 내가 오해하는 부분은?”
“그건……, 아프리카에서 세계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소.”
테오가 전혀 도움 되지 못하는 상황이고, 더는 시간을 끌지 못한다는 판단이 섰는지 에르완이 급하게 말을 꺼내 들었다.
“만약 외인부대가 개입했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프랑스는 여기에 있는 세 개 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전쟁을 감당해야 했을 거요.”
강찬은 에르완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
“Oui.”
강찬이 불렀고, 테오가 무겁게 답을 했다.
“내 지시를 무시하고 네가 에르완을 따른 이유를 말해봐.”
“죄송합니다만, 총국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강찬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선택은 존중한다. 그렇지만 말이다. 정보국처럼 목숨을 내걸고 일하는 조직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약속을 지키는 신뢰가 필요하다.”
말을 마친 강찬이 에르완을 보며 씨익 웃었다.
“부총국장! 이 문제는 시간을 좀 더…….”
“다예! 두 놈 다 치워!”
타아앙! 퍼억! 타아앙! 퍼억!
석강호가 단박에 에르완의 이마를 뚫었고, 최종일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테오의 이마를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털썩!
에르완이 소파에 뒤로 넘어갔고, 테오가 흐느적거리는 모습으로 바닥에 고꾸라진 직후였다.
“멈춰!”
밖에서 고함이 들렸고,
콰앙! 철컥! 철컥!
문이 열리며 대테러 팀 대원들이 소총을 겨눈 자세로 뛰어들었다.
헬멧에 검은 군복, 얼굴을 가린 두건, 그리고 왼팔에 걸린 태극기와 그들의 날카로운 움직임이 방 안에 있는 이들의 시선을 단박에 잡아끌었다.
강찬이 고개를 돌렸을 때, 바깥의 복도에서도 대테러 팀 대원들과 우리 요원들이 소총과 권총을 뽑아들고 겨눈 것이 보였다.
“부원장님의 안전이 염려돼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바깥에 대기하던 3개국의 요원들이 총을 꺼냈습니다. 지시를 바랍니다!”
강찬은 천천히 테드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는 확실히 눈치가 빨랐고, 강단이 있었다.
“바깥의 대원들은 한국 요원들의 지시에 따라!”
그의 고함이 나오고 나자 방에 들어왔던 대테러 팀 대원들이 조심스럽게 밖으로 움직였다.
달칵.
문이 닫히자 자연스럽게 죽은 에르완과 테오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그나마 테오는 소파에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등받이에 기댄 것처럼 널브러진 에르완은 아직 이마에서 피가 꿈쩍거리면서 쏟아지고 있었다.
강찬이 돌아보자 석강호와 최종일이 권총을 집어넣고 다시 뒤에 섰다.
프랑스 정보총국장과 그 수행 요원을 단박에 사살한 것치고는 너무 태연한 얼굴이라 테드가 확인하는 것처럼 두 사람을 다시 볼 정도였다.
“자! 이제 우리 문제를 풀어보지요.”
강찬은 프랑스어로 3개국의 대표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 핵융합 발전시설을 계획하면서 대한민국에 전쟁을 계획하고 테러를 자행했던 인물들에 대한 처벌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테드와 영국 부총리 브래들리, 그리고 이스라엘의 총리 벤그리온이 시선을 주고받은 뒤에 강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일본의 정보국장 가와구치와 미국의 CIA 책임자 스웨이든은 내가 직접 제거했고, 영국의 도이슨은 현재 한국에 구금 중인 것쯤 다 아실 테고.”
강찬은 이스라엘의 총리 벤그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번 일에 가장 깊숙하게 개입한 그라펠트와…….”
뜻을 전한 강찬은 다시 테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라우드는 내놓아야지?”
천장에서 떨어진 듯 한 무거운 침묵이 바닥을 덮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라펠트는 미국의 정보국에서 보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총리 벤그리온이 고자질하는 투로 강찬에게 말을 전했다.
정보국 경력이나 전투 경험이 없는 관리들이 흔히 보이는 얄팍한 모습이어서 강찬이 피식 웃었고, 테드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달았다.
1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테드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라펠트는 몰라도 라우드를 당신 방식으로 처리할 경우, 미국 전체의 반발이 극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1분쯤 지난 뒤에 테드가 어렵게 내놓은 말이었다.
“그렇다면 미국 전체가 나서서 핵융합 발전시설의 폭발을 막으면 모두 해결되겠군.”
말을 던진 강찬은 날카롭게 테드를 바라보았다.
“네 눈에는 라우드 한 사람만 보이고, 지진 현장에서 우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나?”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 내가 나서겠다고 결심한 것이 그 아이들 때문인데? 원한다면 너와 라우드가 이 일을 해결하도록 기회를 주겠다.”
강찬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갓 오브 블랙필드! 우리는 억울하잖소? 원하는 것을 말해보시오. 우리 영국이 가진 것 중에서 당신이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무조건 협조하겠소.”
영국의 브래들리가 급하게 말을 쏟아냈고,
“그라펠트가 미국에 있어서 우리도 어쩔 수 없소. 갓 오브 블랙필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을 말해 보시오.”
이스라엘의 벤그리온도 비슷한 말로 강찬에게 매달렸다.
최악의 상황에 핵융합 시설이 폭파되고 나면 또다시 고성의 차세대 발전시설이 계속 용량을 늘리며 비슷한 폭발을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건 나중 문제다.
적어도 테러와 전쟁을 꾸민 놈을 처벌하지 못한 상태에서 목숨 걸고 저들을 구하러 갈 이유까지는 없는 거다.
역시 욕심 많은 새끼들은 아이들의 죽음 따위 보이지 않는 건가?
결국은 저렇게 죽어 나빠질 거면서?
강찬이 얼굴과 어깨에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뒤로 기대있는 에르완을 슬쩍 본 직후였다.
“펜실베니아의 핵융합시설에서 두 사람을 건네 드리면 어떻습니까? 라우드가 핵융합시설의 폭발을 막다가 사망한 것으로 해준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테드가 결심한 것처럼 조건을 꺼냈다.
끝까지 기득권을 놓지 못하는 얼간이들의 말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테드.”
“말씀하십시오.”
“반성은 조건 없는 사과에서 시작된다. 거기에 조건을 달기 시작하면 그건 협상이지 반성이 아니다. 혹시 다음에 내 앞에 서게 된다면 그 점을 잊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입을 다물고 있는 테드를 향해 강찬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미국이란 이름을 앞세우면 고개 숙이던 한국은 잊어라. 네가 지금 찾아와서 매달리는 게 현실이라는 것도 깨닫고. 한 번만 더 그런 소리를 지껄이면…….”
에르완을 향해 시선을 돌렸던 강찬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울며 매달리던 아이들이 강찬의 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지금 라우드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면 미국은 또다시 같은 모습을 보일 거다.
“갓 오브 블랙필드! 영국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줄 용의가 있소!”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투로 브래들리가 애원하는 투의 음성을 쏟아냈다.
“핵융합 시설은 하나로 묶여있는 겁니다. 내가 영국을 막든, 미국을 막든, 이스라엘을 막든, 하나를 막으면 셋 모두 해결되는 거지요. 물론 실패해서 내가 죽을 수도 있겠지만.”
말을 마친 강찬이 몸을 일으키자 “아아!” 하는 서양 사람들 특유의 과장된 탄식이 들려왔다.
라노크를 만날 생각이었다.
이렇게 된 거라면 그를 만나서 에르완이 제거된 정보총국의 뒷일과 앞으로의 일들을 논의하는 것이 좋았다.
석강호와 최종일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라우드와 그라펠트를 처리하겠습니다.”
테드의 애절한 음성이 강찬을 붙들었다.
애새끼들이! 이상하게 한 번씩 버티다가 오히려 고개를 숙이는 꼴을 보인다.
번거롭게 말이다.
강찬은 무거운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빨리 진행하지. 미국의 그라펠트와 라우드를 내가 미국에 도착할 때 넘겨. 그리고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랩터 50대.”
“말도…….”
강찬의 눈치를 살핀 테드가 “안 돼.”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
“아프리카를 제대로 지키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지. 내 목숨값이기도 하고. 혼자 결정하기 곤란하다면 얼른 전화해서 답을 듣는 게 좋지 않을까?”
테드가 급하게 전화기를 들어서 대통령 권한 대행인 하원의장과 통화를 시작했다.
“물론 의장님께 그런 권한이 없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이 없다면 미국은 폭발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남은 일은 국가안전국에서 모두 처리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테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이를 악물며 답을 했다.
그 엄청난 것들을 받는데 저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내가 출발하기 전에 발표가 있어야 하고,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인계를 확인하는 공식문서가 한국 정부에 전달될 수 있도록. 할 수 있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답을 들은 강찬은 이스라엘의 총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자 지구의 모든 권리를 사우디아라비아의 우즈만에게 넘겨야 합니다. 동의합니까?”
벤그리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스라엘 정보국이 가지고 있는 다윗의 별에 대한 자료와 권리 전체를 한국의 국가정보원에 넘기세요.”
“흠.”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처럼 침통한 표정으로 그가 답을 했다.
“우즈만이 옆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이 방을 나서는 순간, 그를 찾아서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공식 발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우즈만이 옆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벤그리온은 순순히 답을 했다.
이번엔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던 영국의 브래들리 부총리의 차례였다.
“영국 정부가 가지고 있는 채권과 금융권 지분의 30%.”
“우리는…….”
무언가 다른 말을 하려던 브래들리가 “전화를 먼저 해도 되겠소?”라고 질문을 던졌고, 강찬은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브래들리가 황급하게 전화를 꺼내 번호를 누른 뒤에 3분쯤 지루한 통화가 이어졌다.
그런 뒤에 통화종료버튼을 누른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강찬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당신의 요구를 수용하겠소.”
이로써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오산 비행장에서 전투기로 움직일 예정이니까 미국 펜실베니아의 핵융합 발전시설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을 지정해 주고.”
테드가 짧게 고개를 끄덕여 강찬의 지시를 받았다.
“내가 오산에서 출발하기 전에 지금 약속했던 것들의 발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엔 브래들리와 벤그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강찬은 조용하게 숨을 뱉어냈다.
즉흥적인 요구여서 나중에 아쉬운 부분이 많을지 모르지만, 제법 많은 것을 얻어낸 느낌이어서 그랬다.
특히, 늘 가자지구를 아파했던 우즈만에게 좋은 선물을 준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바람결에 씨를 뿌린다는 그의 말은 아마 이런 의미일 거다.
강찬을 알게 되면서 할아버지처럼 늘 인자하게 웃는 낯으로 요구하는 것들을 거절하지 않았던 우즈만, 그가 뿌린 씨앗이 결국은 가자지구의 평화를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방을 나서 복도를 걸으며 강찬은 라노크의 방을 그대로 지나쳤다.
출발하기로 한 참이다.
공연히 시간 끌 것 없고, 무엇보다 가자지구의 권리를 손에 쥔 기쁨과 강찬을 보내야 하는 슬픔을 동시에 받아야 하는 우즈만의 아픈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라노크가 있는 방 앞을 지나면서 강찬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요원들과 대원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이었다.
병원 현관에서 승용차에 오른 강찬은 바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어디로 갑니까?”
“사무실로 우선 가자. 옷 갈아입고 출발할 수 있게.”
“알겠습니다.”
답을 한 강찬은 우선 김형정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김형정입니다.]
“팀장님.”
강찬은 전화로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요구조건에 대해 알려주었다.
늘 침착하던 김형정이 얼이 빠진 소리로 조건을 확인할 정도였는데 특히나 항공모함과 전투기에 관한 것은 세 번이나 다시 물어볼 정도였다.
“두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오산에 전투기를 일곱 대 준비해 주시고, 전에 삼성동에서 생포했던 특수복장 입었던 테러범, 그놈들을 오산으로 데려다주세요.”
[부원장님. 우주복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헬멧을 잘못 벗기는 바람에 두 명이 사망해서 남은 인원이 세 명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전투기는 다섯 대면 되겠네요. 사무실에 도착했다가 바로 비행장으로 출발할 예정이니까 서둘러주시고, 준비되는 대로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복잡한 느낌의 음성으로 김형정이 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