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결심을 한 모양이군요. (1)
앙증맞고 작은 손으로 종이를 가슴 앞에 든 아이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울고 있었다.
‘갓 오브 블랙필드’라는 닉네임을 알게 된 경위야 두말할 것 없이 정보국의 작업일 게 분명했다.
[이곳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부탁해서 구한 한글로 된 구조요청 문구를 든 주민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갓 오브 블랙필드와 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방송 카메라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의 눈에 담긴 감정은 절대 조작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마와 볼에 하얀 흙가루를 묻힌 여자아이가 가슴을 들썩이며 흐느꼈고, 그 옆에 있는 흑인 남자아이는 눈물과 흙가루가 뒤엉겨 입가가 엉망이었다.
“뭘 그런 걸 보고 있어요!”
리모컨을 뺏으려던 석강호가 강찬의 눈을 보고는 멈칫했다.
“대장! 지금 간다고 해도 늦었다니까요!”
그러면서도 놈은 물러서지 않았다.
“얼른 갑시다. 여기 권총, 대검, 무전기요. 대장!”
숨을 크게 들이마신 강찬이 리모컨을 내려놓고 석강호가 건네주는 무기들과 무전기를 몸에 걸쳤다.
“갑시다.”
약속은 강찬이 했는데 석강호가 더 바쁜 것처럼 보였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승용차에 올랐다.
운전은 이두희가 했고, 조수석에 최종일, 뒷자리에 석강호와 강찬이 앉았다.
“희승이한테는 미안한 말인데, 넷이 다니니까 이렇게 한 차로 움직이는 맛이 있소.”
분위기를 바꾸려는 것처럼 석강호가 되지도 않는 농담을 쏟아냈고, 최종일이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그려냈다.
그런데 농담이 지나고 나서 승용차 안이 더 썰렁해지는 바람에 오히려 분위기를 가라앉힌 꼴이 되고 말았다.
강찬은 말없이 창밖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블랙헤드가 마지막 싸움을 위해 강찬을 꼬드긴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이어서 다시 태어난 강찬을 어떡해서든 죽여서 원래의 에너지를 되찾고 싶어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식.
사람이 생각이 많아지니까 이제는 돌멩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고, 천천히 내쉬었다.
만약에 말이다.
반군 한가운데서 저렇게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아이들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들어가면 죽기 딱 좋은 그런 자리에서 스물이 채 안 된 여자가 먹지 못해 배만 볼록한 아이를 안고 살려달라고 울었다면?
강찬의 시선에 노란 모자를 쓰고 줄줄이 걸어가는 아이들이 들어왔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은 이전의 삶에서 충분히 배웠다.
지금 저 노란 모자를 쓰고 걷는 아이들과 아프리카에 태어난 아이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난 곳에서 살려달라고 우는 아이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해서 아프리카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지진이 일어날 지역에서 살았던 건 아닌 거다.
막말로 전쟁을 계획한 개새끼가 나쁜 거지, 그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던 아이들은 잘못이 없는 거 아닐까?
머릿속이 온통 뒤엉킨 것처럼 복잡했다.
그런데 그 복잡한 생각들 속에서도 울고 있던 아이들과 그 손에 들린 종이만큼은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발바닥이 찢어졌는데도 강찬이 있던 UN 기지로 달려와 살려달라고 매달렸던 여자, 폭탄을 둘렀어도 아이만은 구해달라며 강찬을 향해 딸을 내밀던 아프카니스탄의 여자도 생각났다.
라노크의 병원에 도착하는 데까지 10분쯤 남았다.
그를 만나면 이 고민에 대한 해답을 얻을지도 모른다.
강찬이 그곳에 가지 않아도 될 변명 같은 거 말이다.
“염병!”
달리는 승용차의 뒤에서 강찬은 느닷없이 거친 말을 뱉어냈다. 저런 아이들을 보고도 가지 않을 핑계를 찾는 모습에 짜증이 벌컥 올라와서였다.
계산하는 것은 강찬이 아니다.
이래서 마음에 담기는 사람들을 그렇게 외면했었는지 모른다.
석강호가 긴장한 얼굴로 돌아보았고, 최종일이 빠르게 고개를 돌린 직후였다.
“다예.”
“예.”
석강호가 긴장된 눈으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노크 위원장님을 만나고 나서 바로 출발한다.”
“후우. 결국은 그럴 것 같았소.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쇼.”
전투에 나서기 직전의 눈을 한 석강호가 강찬을 똑바로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나도 가는 거요. 내가 원하는 건 그것밖에 없소.”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료라니.
“고마운 새끼.”
강찬이 피식 웃자 석강호가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서 “푸흐흐”하고 웃었다.
후련했다.
그리고 머릿속이 이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리고 그때 전화기가 울어댔다.
“강찬입니다.”
[바쁠 텐데 미안해. 혹시 통화가 가능한가?]
“예. 말씀하세요.”
김관식의 무거운 음성을 강찬은 그나마 편안하게 받았다.
고민을 털어내자 마음이 가벼워져서 그런 모양이었다.
[자네가 다녀가고 나서 전력 발생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혹시 이유를 알고 있나?]
“발생 비율이 높아진다는 게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가요?”
강찬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처음엔 15% 정도로 전력이 더 생겼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19%로 그 비율이 높아졌다. 다른 문제는 전혀 없는 상태고.]
빌어먹을 돌멩이가 꼼꼼하게 수를 쓰는 걸까?
강찬 때문에 한국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지만, 그렇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 비율이 50%를 넘으면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네. 모든 것이 안정적인 상태에서 비율만 늘어가니까 우리 수준에서는 다른 조치를 취하기도 어렵지.]
“알겠습니다. 혹시 방법이 있을지 생각해볼게요.”
[보도는 나도 봤어.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자네라면 훌륭한 선택을 할 거라 믿네. 쓸데없는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에이, 개새끼가!”
“어? 김관식 청장 전화 아니었소?”
“뭐라는 거야? 너 혹시 내가 청장님께 욕했다고 생각한 거냐?”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으며 강찬은 지금 있었던 김관식과의 통화 내용을 석강호에게 알려주었다.
“어쩐지 돌멩이가 나를 부르려고 마지막 발악을 하는 거 같아서 나온 욕이다.”
“거 참. 못 봤다면 모를까 대장 옆에서 다 봤으니 다른 말을 하기도 그렇고.”
“가자. 이번에 가서 완전히 끝내자.”
강찬은 다부지게 마음을 먹었다.
저토록 끈기 있게 덤비는 적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숨통을 끊어주는 거다.
“어차피 가기로 했던 거잖소. 갑시다. 가서 그 징그러운 돌멩이, 아예 부숴버리고 옵시다. 여차하면 가루를 내서 물에 타서 먹어버리든가. 에너지가 많다니까 몸에는 좋을 거 아니오?”
석강호의 말이 끝났을 때 강찬이 타고 있던 승용차가 병원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들어서는 강찬을 무장한 대원들과 요원들이 빙 둘러쌌다.
그렇게 5층으로 올라간 강찬이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다렸던 라노크와 우즈만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확실히 경험과 연륜은 무섭다.
“결심을 한 모양이군요?”
강찬과 인사를 나눈 라노크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꺼낸 첫마디가 그랬다.
“예. 다녀올 생각입니다.”
“무슈 강다운 결정입니다. 나나 여기 우즈만이 말려도 소용없겠지요?”
강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라노크를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일단 앉읍시다.”
우즈만이 권했고, 셋이서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았다.
“늘 그랬지요. 몽골에 가서 동료를 구한다고 할 때도 그랬고,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아프리카에 가겠다고 할 때도 무슈 강은 그런 눈빛이었습니다.”
말리겠다던 라노크가 어쩐지 후련한 얼굴로 말을 건넸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우즈만이 말을 받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무슈 강은 바람 같은 사람입니다. 씨앗을 멀리 보내는 바람 말입니다. 이러니 내가 무슈 강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찬이 답을 한 다음이었다.
“모처럼 라파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에르완과 함께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에서 온 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전화를 먼저 하고 식사를 했으면 싶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내가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라노크가 전화기를 들고서는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강찬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번호라는 의미였다.
“미국, 영국, 이스라엘의 대표에게 전해라. 무슈 강이 특별하게 기회를 줄 테니 내가 묵는 병원 5층으로 오라고. 정보총국장 에르완과 함께 만나는 일이라는 언질도 주도록.”
할 말만 마친 라노크가 곧바로 종료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해야 나중에 내가 저들에게 한 번쯤 큰소리를 칠 수 있지요. 호랑이 뒤에 숨은 여우쯤 해볼 생각입니다.”
누구인지를 밝히기 싫은 라노크가 건넨 농담이었다.
“얼른 식사를 합시다.”
그러면서 그는 입구 왼편에 있는 공간을 손으로 가리켰다.
40분이면 프랑스식 만찬은 허겁지겁 먹은 꼴이다.
강찬을 위해서인지 라파엘은 빠르게 요리들을 내왔고, 라노크와 우즈만도 그 속도에 맞춰 음식을 먹었다.
유쾌한 40분이었다.
마지막에 홍차를 준비해 준 라파엘이 테이블의 가운데에 재떨이와 시가, 담배를 놓아주었다.
병실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나름 본받을 만한 구석이 있다.
“에르완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시가의 끝을 자른 라노크가 정보국의 냉정함을 뒤집어쓴 모습으로 질문을 던졌다.
“에르완은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날렸습니다. 만약 제가 핵융합 시설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는 분명 대사님과 우즈만을 위험하게 만들 인물입니다.”
우즈만이 강찬과 라노크를 번갈아 본 다음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정보총국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대사님. 만약 제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대사님께서 정보총국을 맡아주십시오. 문바키도 아직 성장해야 하고, 한국 역시 차세대 발전시설을 홀로 지키기는 어려울 겁니다.”
라노크의 경고를 강찬은 당부로 받았다.
“그걸 알면서도 가겠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라노크의 말이 끝나고 5분쯤 함께 차를 마셨다. 그리고 아쉬운 시간을 마치라는 것처럼 에르완과 3개국의 대표가 함께 있다는 전화가 있었다.
“이제 일어나야겠군요. 나를 다시 현역으로 복귀시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거의 동시에 식탁에서 일어나 함께 문으로 걸었다.
“선물로는 블랙헤드를 가져옵니까? 이번엔 정말 그걸로 반지를 만들어서 하나씩 나눠 가져야겠습니다.”
웃음이 달린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눈은 이상하게 슬퍼 보였다.
“대사님.”
문 앞에 선 강찬은 나직한 음성으로 라노크를 불렀다.
“대사님이 아니셨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많은 것을 양보하고, 가르쳐주신 대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처음이었다.
라노크가 붉어진 눈으로 강찬을 바라보는 것은 말이다.
죽을 뻔 한 순간에도, 중국대사관에 납치되었을 때에도, 로리암의 지하에서도 늘 한결같았던 라노크가 처음으로 완벽하게 가면을 벗어던진 얼굴로 강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내가 남자와 남자의 관계를 질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라파엘?”
“저는 이전부터 계속 비슷한 질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즈만과 라파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라노크는 빠르게 감정을 추슬렀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먼저 라노크와 프랑스식 인사를 마쳤고, 다음으로 우즈만을 안았으며, 악수를 위해 손을 내미는 라파엘을 안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라노크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강찬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각국의 요원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다예. 최종일과 함께 들어간다.”
강찬이 지시하자 석강호와 최종일이 강찬을 따라 걸었고, 다시 그 뒤를 무장한 대테러 팀이 따랐다.
에르완과 세 나라의 대표들이 기다리는 방은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 앞에 무장한 대원 네 명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가기로 한 마당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빨리 이 자리를 정리하고 1분이라도 일찍 출발하는 것이 맞다.
강찬이 들어서자 에르완과 테오가 가장 먼저 일어섰고, 처음 보는 인물들이 줄줄이 몸을 일으켰다.
“이 분이 여러분들이 기다리던 갓 오브 블랙필드입니다.”
강찬을 처음 보는 이들이 테오의 소개를 듣고 놀라움을 드러냈다가 바로 감췄다.
“이쪽은 미국 국가안전국 책임자 테드, 이쪽이 영국 부총리 브래들리, 그리고 이스라엘의 총리 벤그리온입니다.”
강찬은 테오가 소개해 주는 사람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앉으시죠.”
거창한 1인용 소파였다.
둥그런 테이블을 중심으로 강찬이 앉자 에르완과 세 나라의 대표들이 자리에 앉았다.
석강호와 최종일이 뒤에 선 것처럼 테오와 정보총국 요원 한 명이 에르완의 뒤에 섰고, 이것은 다른 세 나라도 비슷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은 다들 아실 테니까 빠르게 정리하겠습니다.”
강찬의 말에 에르완을 포함한 네 사람이 마른침을 삼켰다.
“조건이 맞으면 바로 핵융합 시설을 향해 출발하겠습니다. 그러나 조건을 내놓기 전에 우선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 일을 먼저 처리하겠습니다.”
프랑스 말로 양해를 구한 강찬이 시선을 돌렸다.
“총국장. 왜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반둔두 전투에 개입한 거지?”
“그건 오해요, 부총국장.”
세 나라의 대표와 테오를 의식했는지 에르완이 불쾌하다는 얼굴로 답을 꺼내놓았다.
피식.
강찬이 웃은 다음이었다.
“다예.”
“예.”
“지금부터 반항하는 새끼들은 모조리 쏴버려.”
“알았습니다.”
한국말로 내린 지시에 석강호가 다부지게 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