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우리를 살려주세요. 코리아. (1)
반둔두의 기지 한중간에 있는 강찬의 막사 앞이다.
강찬을 지키는 것처럼 검은 군복의 대테러 팀 대원들이 쭉 둘러 서 있었는데, 안느는 그들의 분위기를 느끼며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강찬을 위해서라면 죽음 따위 전혀 두렵지 않다는 대태러 팀 대원들의 눈빛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이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안느는 생각을 감추기 위해 얼른 봉지 커피를 마셨다.
“그는 묘한 매력이 있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전투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내 사람을 악착같이 끌어안는 모습을 보게 되면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지.”
언젠가 루이가 꿈을 꾸는 것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 그런 건 아니잖아요?”
“아니. 그와 함께 작전이나 전투에 나선 사람들은 모두 그럴 수밖에 없어. 당신은 그가 희생된 대원을 바라보며 담배 피우는 모습을 못 봐서 그럴 거야.”
“우는 것도 아니고, 고작 담배 피우는 것에 고개가 숙어진다고요?”
루이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절대 눈물 따위로 그런 걸 표현하지 않아. 대신 몸 전체로 그 아픔을 쏟아내지. 말은 안 했지만, 만약 그가 나를 부른다면 나 역시 바로 달려가게 될 거야.”
“당신이요?”
루이가 빙그레 웃는 것으로 먼저 답을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야, 안느. 그의 위치가 높아질수록 대원들은 그를 위해 더욱 충성을 다할 거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
“말도 안 돼요.”
“아프리카의 잠재력을 우습게 보면 안 돼. 그들이 목숨 따위 내던지고 무슈 강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해 봐.”
커피를 내려놓은 안느는 루이가 했던 말을 확인하는 것처럼 강찬을 바라보았다.
강찬은 이전에 그녀가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맞은편에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라노크는 정말 강찬의 이런 모습을 처음부터 알아보았던 걸까?
그래서 아프리카를 그에게 맡기려는 거고?
안느를 지켜보던 강찬이 피식 웃었다.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 빙빙 말을 돌려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무슈 강. 프랑스는 아직 에르완이 필요해요.”
그래서 그녀는 솔직하게 바라는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아버지와 내가 애써준 점을 봐서라도 한 번만 그에게 기회를 더 주었으면 싶어요.”
안느가 용기를 내서 말을 건넨 다음이었다.
“그것이 대사님의 뜻인가?”
강찬의 질문이 바로 넘어왔다.
“아마 같은 생각일 거예요.”
안느의 답이 있고 나서 잠시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저녁에 도착한다고 했었지?”
“예.”
“그렇다면 내가 한국으로 출발하는 시간을 당기겠다. 그러니 그에게 한국으로 바로 오라고 전해줘.”
“아버지와 함께 만나려는 건가요?”
“그게 좋지 않을까?”
“알았어요.”
안느는 얼른 전화기를 꺼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편안한 셔츠와 캐쥬얼한 재킷, 청바지 차림이어서 얼핏 봐서는 절대 정보국 관련 일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충격적인 보도였다.
[이 뒤편으로 보이는 지역에 핵융합 시설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금까지 같은 시간에 지진이 일어난 펜실베니아, 그란섬, 그리고 아라드에도 같은 시설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보도를 전한 기자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언제 폭발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1986년에 있었던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상의 참혹한 사태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화면은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고 있었다.
[펜실베니아 주정부는 주민 대피령을 내렸으며, 인근의 피츠버그, 필라델피아 역시 대피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최소 1,300만 명이 넘는 이주민을 수용할 곳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화면이 확 바뀌면서 가슴 높이에 종이를 든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매직으로 급하게 쓴 글씨들이 그들이 들고 있는 종이에 적혀 있었다.
- 우리 아이를 살려주세요. 코리아. -
적힌 내용은 그랬다.
[펜실베니아 주민들은 이주 대책 전에 미국 전역에 아이들만이라도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갈색 머리칼의 어린 여자아이가 가슴에 종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화면에 올라왔다.
- 우리를 살려주세요. 코리아. -
도화지를 들고 있는 앙증맞은 손이 화면의 양 끝에 애처롭게 올라와 있었다.
[현재 핵융합 발전시설의 폭발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의 차세대 발전시설을 관리하는 연구진과 관계자의 도움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는 화면에 도화지를 든 어린 남자아이가 나왔다.
다섯 살쯤 되었을까?
체격에 비해 좀 큰 듯한 면 티셔츠와 바지를 입었고, 돋보기처럼 두꺼운 안경을 낀 아이였다.
주눅이 들고 겁먹은 얼굴의 아이는 가슴에 ‘제발 우리를 살려주세요. 코리아.’라는 글씨들 들고 있었다.
[펜실베이나에서 루크 샘이 전해드렸습니다.]
비통한 표정으로 기자가 보도를 마친 다음이었다.
화면은 영국의 그린섬 지역으로 바뀌었다.
보도내용은 비슷했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울고 있는 아내와 아직은 어려서 카메라를 위로 바라본 아이들과 함께 종이를 들고 있었다.
- 우리를 살려주세요, 코리아. -
들고 있는 내용 역시 비슷비슷했다.
노동을 통해 살아왔던 것처럼 넉넉하지 옷차림의 남자는 카메라를 보더니 결국 붉어진 눈시울을 소매도 닦았다.
으르르릉.
보도 중에 일어난 작은 지진이었다.
리포터가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았고, 화면이 거칠게 흔들렸다.
“꺄아아-!”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을 부부가 얼른 끌어안았다.
“살려주세요! 코리아! 제발 우리를 살려주세요!”
그란섬에서 살던 덩치가 커다란 영국 남자가 울음을 터트리며 내뱉은 말은 그랬다.
이스라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아라드는 이웃한 요르단과 맞은편의 이집트에도 충분히 영향을 끼칠 거리였다.
무너진 건물더미 속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구조요원과 건장한 남자들이 손으로 잔해들을 걷어내고, 그 위로 계속해서 물을 뿌려대는 장면이 이어졌다.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요르단과 이집트, 그리고 프랑스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각료들이 속속 한국으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폐허가 된 도시 앞에서 기자가 카메라를 보며 보도를 전했고, 화면은 공항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각국 대표들의 모습이 올라왔다.
[한국 정부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구조에 협조할 수는 있지만, 핵융합 발전시설이 한국이 건설한 차세대 발전시설과 구조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파악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당장 폭발을 막을 도움을 주기는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보도는 거기까지였다.
강찬은 석강호와 최종일, 이두희와 함께 한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내일 간다고 하지 않았소?”
“일이 생겼어. 그러니까 저녁에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
“알았소.”
석강호가 답을 했는데, 딱히 준비할 것들은 없었다.
강찬은 먼저 강철규를 찾았다.
그는 벌써 밥을 먹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지고 있었다.
“한국에 다녀올 생각이야.”
“위험한 일이냐?”
“그렇다기보다는 번거로운 일.”
늙어버린 강철규의 얼굴에 어쩐지 아쉬움이 스친 것 같아서 강찬은 얼른 말을 바꿨다.
“사다 줄 것 있어? 필요한 거나 먹고 싶은 거?”
“증평의 내 사물함에 네 구두 하나 사놨다.”
강찬이 픽 웃었고, 강철규가 대꾸처럼 멋쩍게 웃은 다음이었다.
“그 미영이란 아이는 계속 만나는 거지?”
강철규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너는 꼭 나처럼 산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안다. 그렇더라도 전화쯤은 가끔 해주면서 살았으면 싶다. 그리고 혹시 통화하게 되면 내가 보고 싶어 하더라고 전해다오.”
강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강철규의 병실을 나섰다.
이어서 찾은 곳은 박철수의 병실이었다.
왼쪽 어깨를 얼마나 붕대로 감아두었는지 미국축구 선수처럼 보였다.
“오늘 저녁에 한국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박철수는 “알았습니다.”라고 짧은 답을 하고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통증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다른 생각 마시고 일단 몸을 추스르세요.”
많은 희생은 대원들과 동료들의 가슴에도 오래도록 남지만, 지휘관에게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부담으로 남는다.
엄청난 전투에서 승리를 지켜내고도 박철수는 많은 희생이 주는 부담에 짓눌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아프리카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겁니다. 언젠가 아이들의 희망찬 웃음이 나온다면 그것은 박 장군님과 대원들이 이곳을 지켜준 덕분입니다.”
박철수의 침대를 가볍게 다독인 강찬은 옆의 병실로 움직였다. 그리고 차동균, 곽철호, 윤상기를 돌아보았다.
대원들 모두 서운함을 얼굴에 가득 담았다.
그러나 몸 상태가 따라나서겠다고 우길 정도는 전혀 아니어서 다들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강찬은 마지막으로 제라르의 병실에 들렀다.
그리고 그때부터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나도 갑니다!”
어쩐 일인지 제라르가 말도 안 되는 고집을 계속 피웠기 때문이었다.
“야! 네가 이런 몸으로 나서면 저쪽에 차동균이랑 곽철호까지 모두 따라나선다니까.”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무조건 함께 갈 겁니다.”
처절한 전투를 치르고 난 뒤라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죽음을 코앞에서 느꼈을 때 결심했던 일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외인부대 특수팀 전 사령관이 어릴 적 사진에서 본 듯한 눈을 하고 강찬에게 매달리는 거였다.
저런 심정을 모를 강찬이 아니다.
“후우. 알았다. 준비되면 다시 오마.”
“대장.”
병실을 나서려는 강찬을 제라르가 불렀다.
“고맙습니다.”
“시끄러워, 이 새끼야!”
제라르가 볼을 상처를 우그러트리며 웃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다무라는 명함도 내밀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문재현을 만나겠다고 날아온 굵직굵직한 인물들도 그렇고, 또 관계를 개선해보겠다는 일본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상황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돌아가자니 망신스럽고, 버티자니 부끄러운 꼴이 돼버린 다무라 총리의 사정을 모르는 것처럼 청와대는 분주했다.
문재현은 보도에 나온 것처럼 원론적인 발표를 한 뒤에 입을 다물었다.
막말로 핵융합 시설에 달려들어야 할 사람이 강찬이고, 또 그런다고 해도 폭발을 반드시 막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인 거다.
강찬이 가겠다고 달려들어도 말려야 할 판국인데 문재현이 더 무슨 답을 내놓을 수 있겠나.
영국은 총리부터 아예 각료 전체가 날아오다시피 하고, 미국 역시 상원과 하원의 대표들과 행정부, 군의 대표들이 몰려왔다.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입장을 바꿔서 한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고,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라고 했을 때, 미국과 영국이 과연 목숨을 걸고 차세대 발전시설을 지켜주려 했을까?
발전시설을 부수기 위해 전쟁을 계획하고, 또 암살을 위해 특수한 대원들을 보냈던 것만 봐도 답은 분명했다.
[미국은 상원의원 만장일치로 라우드 대통령을 탄핵했고, 부통령이 없는 상황이라, 존 트레이너 하원 의장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습니다.]
보도 방송은 급변하는 미국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했다.
[나는 핵융합 발전시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야만적인 미국의 행위들을 낱낱이 밝히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의 신뢰를 되찾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화면에 올라온 존 트레이너는 다분히 한국을 의식한 발언을 먼저 꺼내 들었다.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는 물론이고, 우리 미합중국은 그동안 한국에 끼친 피해에 대해 적절한 보상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한국이 핵융합 발전시설의 폭발을 막아주는 것과 별개로 진행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한국에 매달리는 말을 쏟아냈다.
라노크는 한국이 지정해 준 병원에서 지냈다.
말이 병원이지, 거실 두 개와 침대가 놓인 침실이 두 개 있어서 어지간한 호텔보다 시설이 좋았다.
TV의 보도 방송을 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과 이스라엘에서 핵폭발이 일어난다면 프랑스와 사우디아라비아도 당연하게 그 영향권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몰라도 이스라엘은 이번 사고로 더는 국가의 형태를 유지되기 어렵겠군요.”
우즈만의 나직한 탄식을 라노크는 무거운 표정으로 받았다.
“내일이면 무슈 강이 온다니 어떤 결정을 알려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결단코 저곳에 보내지 않을 겁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거친 이웃 때문에 생기는 피해쯤은 감당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 자칫 무슈 강이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우즈만이 말끝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바실리가 이런 엉뚱한 계획에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만약 러시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쉽지 않았을 텐데요. 거기에 일본도 그렇구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꺼내 든 우즈만의 말을 라노크가 묘한 미소를 그리며 받아들었다.
“바실리는 계산이 빠른 인물입니다. 무슈 강의 능력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알고 있지요. 불평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는 절대로 무슈 강의 반대편에 서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우즈만이 계속 이어지는 보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무슈 강을 만날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집니다.”
그러면서 그는 손자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와 같은 표정으로 혼잣말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