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보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2)
아프리카의 태양은 강렬했다.
양범의 막사를 나선 강찬은 기지 한가운데 설치한 전망대에 올라섰다.
한지에 먹물을 떨어트린 것처럼 조립식 막사들이 늘어가는 데도, 바깥쪽에서는 여전히 중장비들과 지원 나온 인력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프리카는 변한 것이 없었다.
늘 내리쬐던 햇볕이 여전히 대지를 비추고, 바람을 타고 날아든 냄새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녔으며, 그 속에서 흙가루들이 날렸다.
짜각. 짜각.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강찬의 뒤로 김태진이 올라왔다.
“라면을 끓이고 있던데, 같이 가지 않겠나?”
“좋지요.”
내려가자는 말을 했으면서도 김태진은 강찬의 옆에 서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굉장하군. 저 경계병들이 스페츠나츠와 백랑대라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
강찬이 고개를 돌린 앞에서 김태진은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있었다.
“강 선배님 현역 시절에나 겨우 상대했던 부럽고 부러웠던 특수팀들이다. 양동식 선배, 남일규 선배가 피투성이가 돼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적들이 이제는 우리의 지휘를 받는다니.”
올라오는 감정을 꿀꺽 삼키고도 김태진은 자꾸만 볼을 씰룩였다.
“두 분 선배도 그렇고, 먼저 간 최 장군도 이 광경을 봤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으니까요.”
“그렇지! 아차! 라면 먹자고 부르러 와서는! 내가 아무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감정을 추스른 김태진을 강찬이 묵묵하게 보았다.
“대표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 자네가 석 선생처럼 계란을 두 개 넣어달라지는 않을 거고, 그래 뭔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것처럼 김태진이 웃는 얼굴로 강찬에게 시선을 주었다.
“제가 한국에 가 있는 동안, 이곳을 지휘해 주십시오.”
그러나 강찬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에 김태진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곳을? 여기에 자네가 아는 거물들이 제법 있잖은가?”
“양범 씨는 보조 역할에 만족할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중국의 입김이 너무 세지니까요. 물론 나중에 이곳의 실무자를 구성할 때야 들어가겠지만요.”
“후우. 임시직이겠지만, 몽골의 기지와는 다른 느낌이라서 조금은 부담스러운걸?”
강찬은 멀리 있는 지평선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정권이 바뀌면 전 실장님이나 고 원장님도 불러올 생각입니다. 우리만 이렇게 고생하는 건 좀 억울하잖아요.”
“흐흐흐.”
점잖은 김태진이 석강호를 흉내 내는 것처럼 웃었다.
“한국에 들어가 볼 생각인가?”
“라노크 위원장님과 우즈만을 만나볼 생각입니다.”
둘이서 대화를 나눌 때였다.
“대장! 라면 먹읍시다! 김치가 죽여줍니다!”
석강호의 고함이 쩌렁쩌렁 반둔두에 울려 퍼졌다.
***
라우드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회의였다.
좋게 말해서 회의인 거지, 솔직히 표현하자면 아예 청문회 같았다.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해봐.”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투로 라우드가 모인 이들을 쭉 둘러본 직후였다.
“이미 보도 방송에서 의혹들이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지금이라도 주민 대피령을 내려야 합니다.”
토드가 깍지 낀 양손을 책상에 올린 자세로 라우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모든 것들을 밝혀야 하지 않나? 지금은 멈출 수도 없어. 희생을 각오하고 한국을 저지해야 돼. 강한 미국, 우리가 보여줄 유일한 무기는 그것뿐이다.”
라우드가 눈빛을 빛내며 강하게 던진 말에도 회의실의 분위기는 냉담하기만 했다.
“믿을 수가 없군요. 국가와 국민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천만이 넘는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펜실베니아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
“이건 전쟁이다! 앞으로 500년을 결정지을 전쟁! 지금의 잘못된 판단이 미국을 얼마나 구렁텅이에 빠트릴지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열변을 토해내는 라우드 앞에서 토드는 경멸하는 듯한 눈빛과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조국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희생이라면 천만 명이 넘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야욕을 위해서는 단 한 명의 국민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습니다.”
“거창하기도 하군.”
“펜실베니아에서 이유도 모른 채 지진의 공포에 떨다가, 핵폭발로 죽어갈 어린아이의 눈을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미국의 역사가 그런 것 아니었나?”
“말씀하신 투쟁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끝까지 지켜달라고 대통령을 뽑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임무에 대해서 나보다 잘 아는 것 같군.”
“내 손으로 뽑는 직책이니까요.”
팽팽한 긴장감이 회의실을 감돌 때였다.
삐이익.
날카로운 인터폰의 벨이 울렸다.
토드를 노려본 채로 라우드는 스피커폰의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지?”
[펜실베니아에 강도 6.9의 지진이 또 발생했습니다. 사망자를 파악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구조를 위해 투입됐던 주 방위군과 소방대원들까지 희생되었다는 보도입니다.]
회의실에 있던 이들의 눈빛이 라우드에게 달려들었다.
“주변 지역의 주 방위군을 투입하고, 연방 구조대를 모조리 보내.”
[알겠습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답을 하는 비서관의 음성은 어쩐지 풀이 죽어 있었다.
“핵폭발이 일어날 텐데 추가로 인원을 투입하겠다는 말입니까?”
“대통령은 나다, 토드! 내 지시가 못마땅하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서 펜실베니아에 가는 건 어떤가? 일손이 많이 부족한 모양인데?”
라우드와 토드가 서로를 노려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나는 이 길로 방송국에 핵융합시설에 관한 자료를 전부 넘길 테니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를 준비하는 게 좋을 겁니다.”
“부통령마저 없는 미국을 혼란에 빠트릴 셈인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흑인과 백인, 남자와 여자, 젊은 사람들과 노인으로 갈라서 갈등을 야기시키고, 그 분노를 한국으로 돌려야 할 때란 말이다.”
라우드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토드가 바지 주머니에서 검지와 중지를 붙여놓은 듯한 크기의 기계를 꺼내 들었다.
“지금 그 말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보면 됩니다.”
“앉아, 토드. 그리고 그 기계를 얌전히 테이블에 올려놔.”
역시나 테이블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은 라우드가 서 있는 토드를 향해 으르렁거린 직후였다.
토드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밖에 있는 경호원들을 믿는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다윗의 별이 가진 것은 자본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을 필요가 있지요.”
“그라펠트가 그것까지 털어놓았나?”
지금껏 당당하던 라우드가 처음으로 놀란 얼굴을 만들었고,
“경호원만이 아닙니다. 역대 다윗의 별이 남자를 사랑했다는 개인적인 내용까지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연인이 누구인지도.”
“그런 더러운 말로 나를 모함하려 들지 마라!”
픽 하고 웃은 토드가 아예 고개까지 저어가며 회의실을 나섰는데 누구도 앞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다고 그가 핵융합 발전시설의 폭발을 막기 위해 나서줄 것 같은가? 이번 폭로가 자네의 목까지 움켜쥘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돼.”
그러나 바닥에 깔린 듯한 라우드의 음성을 들은 토드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다윗의 별이 가진 돈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미스터 강입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한국을 저렇게까지 발전시키고, 아프리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금이라도 한국을 부수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 이미 날아간 펜실베니아에 묶여서 미래를 날릴 셈이냐!”
말을 뱉어낸 라우드가 빠르게 회의실 안에 앉은 이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그들의 표정이 서 있는 토드와 다르지 않아서였다.
“당신은 미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대통령으로 남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 덕분에 우리는 다음 선거에서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거구요.”
그 말을 끝으로 토드는 회의실을 나섰다.
***
석강호는 확실히 먹는 일만큼은 전문가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게 분명했다.
“얼른 오쇼!”
놈이 포장지에 담긴 사각 형태가 전혀 풀어지지 않게 끓여둔 라면을 강찬 앞에 내미는 것이 그랬다.
“이게 뭐냐?”
“라면 아니오? 그걸 젓가락으로 살살 저으면 멋지게 풀리는 거요. 면이 불지 않게 하려면 그 방법이 최고요.”
강찬의 맞은편에 앉은 김태진마저 감탄한 얼굴로 석강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저어요. 밑에 내가 계란 하나 더 깔아뒀소.”
“어? 석 선생, 그럼 나는 계란이 없는 거요?”
“푸흐흐. 대표님은 한 개, 대장은 두 개, 뭐 그런 차이입니다. 원하시면 하나 더 넣어드리구요.”
“해본 소리입니다. 괜찮아요. 자, 어서 들자고.”
김태진이 강찬에게 권유하고는 면을 입에 넣을 때였다.
석강호가 라면 다섯 그릇을 올려 농은 널따란 판자를 들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뒤쪽에서 대테러 대원 서너 명까지 비슷한 숫자의 그릇을 올린 판자를 들고 있었다.
태극기 달린 군복에 권총과 대검을 찬 배달부라니?
“뭐하냐?”
“제라르 새끼가 냄새를 맡았지 뭐요. 가는 길에 강 선배님과 박 장군님, 동균이, 철호, 쭈르륵 먹이고 오려는 거요.”
강찬이 피식 웃는 것을 본 석강호가 계면쩍은 듯 얼른 식당을 나섰다.
다예루로 살 때는 상상조차 못했었던 배려여서 어쩐지 저놈은 석강호로 태어난 게 더 잘된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 출발할 생각인가?”
“내일 오전쯤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가하게 대화를 나누며 강찬이 막 라면을 집었을 때였다.
치잇.
“안느라는 분이 루이라는 남자와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어떻게 할지 지시 바랍니다.”
대테러 팀 대원의 무전이 들어왔다.
강찬은 목에 걸어둔 무전기의 버튼을 눌렀다.
치잇.
“들여보내.”
치잇.
“알겠습니다.”
강찬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중요한 인물이라서 바로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석 선생에게 말해서 하나 다시 준비해 놓든가 할 테니 어서 나가 봐.”
함께 움직이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김태진은 방해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 걸음 물러선 것이 분명했다.
강찬은 바로 식당을 나섰다.
쩔걱쩔걱.
그리고 그때 석강호와 최종일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강찬의 뒤에 섰다.
강찬이 입구로 나갔을 때는 이미 지프 두 대가 도착해 있었다.
“무슈 강!”
안느가 불편한 다리로 강찬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어서 와.”
안느와 프랑스식 인사를 마친 강찬은 뒤에 있던 루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중년 냄새를 풍기는 루이가 공손하게 강찬의 손을 잡았다.
“불편하게 왜 이래?”
“이번에 정보총국에 소속되었습니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강찬은 두 사람과 함께 막사로 향했다.
“괜찮으니까 병동을 살펴줘.”
“알겠습니다.”
강찬의 지시를 받은 석강호와 최종일이 병동으로 돌아갔고, 강찬은 두 사람과 함께 막사 앞의 나무 탁자에 자리 잡았다.
“이곳은 한국의 커피밖에 없는데?”
“오래 차를 탔더니 단맛이 그리워요.”
강찬이 시선을 들자 이두희가 봉지 커피가 담긴 잔을 두 개 가지고 왔다.
달달한 봉지 커피다.
말하지 않아도 안느는 담배를 꺼내 강찬에게 권했다.
찰칵.
루이가 거절해서 우선 강찬과 안느만 불을 붙였다.
“어쩐 일이야?”
“정보총국장 에르완의 부탁을 전하러 왔어요.”
강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괜찮다면 무슈 강을 만나서 그간의 일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고 싶답니다.”
피식.
강찬의 웃음을 본 안느는 차마 말을 더 꺼내지 못하고 애꿎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쪽에 세우는 탑 보이지?”
“예, 무슈 강.”
“에르완이 장난질 치는 바람에 희생된 7만 명의 위령탑이다. 그놈 모가지가 그 정도의 값어치가 있을까?”
“무슈 강. 그렇더라도 지금은 그가 정보총국장이에요. 이럴 때는 한 번쯤 받아주는 게 어떨까 싶어요.
“안느.”
강찬은 나직하게 안느를 불렀다.
“늘 이런 식이었다. 적당하게 넘어가면 반드시 내 사람을 잃는 일이 생겼지. 다음에 내가 잃는 사람이 라노크 위원장님이나 안느가 될 수도 있어.”
루이가 긴장한 얼굴로 강찬을 바라보는 앞이었다.
“내가 답을 하라고 했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에르완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말을 마친 강찬은 바로 커피잔을 들어 달달한 봉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은 그가 테오와 함께 저녁에 이리 오기로 했어요. 아프리카 연합에 협조할 일들이 많다는 명분이에요.”
그리고 안느의 말이 조심스럽게 강찬에게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