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보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1)
전화기를 내려놓은 미국국가안전보장국 국장 토드가 비참한 표정으로 둘러앉은 이들을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그가 단호하게 거절했답니다.”
“말도 안 돼!”
토드가 내용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국방부 정보국장의 비명 같은 외침이 회의실에 터져 나왔다.
“피해가 얼마나 될지 설명이 부족했던 게 아니오? 세 개 나라에서 지진과 함께 핵폭발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고민조차 없이 거절할 수 있단 말입니까?”
토드는 한심스럽다는 듯 입술을 오므리고 국방부 정보국장을 보았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한국은 이미 우리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준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건 그런 문제와는 다르지 않소?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민간인의 숫자만 해도 1,300만 수준이오! 그들이 죽는 것을, 아니, 핵폭발이 일어나면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발생할지 상상도 안 되는 일이오.”
“후우-!”
토드는 아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마이크. 자네가 가서 그를 설득해 보겠나? 한국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고, 그가 가장 아끼는 몇 명을 살해한 나라가 우리 미합중국이란 사실을 기억하고 가는 게 좋아.”
“그거야 우리 전체의 뜻이 아니라……?”
“닥쳐! 제발 좀 그 빌어먹을 주둥이를 닥치고 내 말을 들으라고!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앞에 말한 짓을 했다니까!”
토드의 고함이 쩌렁쩌렁 회의실을 울렸다.
“내 입을 잘 봐! 미. 합. 중. 국. 대통령이 전쟁을 일으키려 했고, 전 CIA 국장이 그가 아끼는 사람을 살해했다고! 알아들었어! 그가 완벽하게 아프리카를 장악하면 당장 우리도 그의 비위를 맞춰야 해!”
“우리에게 있는 핵미사일을 가지고 최악의 사태에는 한국을 겨냥합시다!”
“이 멍청아! 당신 같은 인간이 일을 이렇게 만든 거야! 러시아와 중국, 프랑스가 나서서 우리에게 핵미사일을 발사하면 미국은 여기에서 끝이야! 그걸 모르겠어!”
악착같이 버티던 국방부 정보국장 마이크가 테이블로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그가 멍청해서라기보다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한국과 강찬의 위상을 받아들이지 못해 억지를 부린 느낌이었다.
“결정합시다.”
참담한 분위기 속에서 토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회의실에 있는 시선들이 토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나는 이 사실을 언론에 흘려서 라우드를 탄핵하도록 하는 거요.”
신음과 같은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는데 딱히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남은 한 가지는 핵미사일과 같은 방법은 아니더라도, 함께 죽겠다고 덤비는 수밖에 없소. 우리가 가진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서 아프리카를 공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게 당신의 의견이었잖소?”
“우리의 동맹국들이 아직 있고,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들이 우리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당근을 준비해야겠지요.”
“펜실베니아를 버리겠다?”
“문제는 핵폭발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인데, 체르노빌과 비교하면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대신 그 원인을 한국으로 돌릴 방법을…….”
띠르르릉! 띠르르릉!
토드의 말을 자르는 것처럼 회의실 전체에 커다랗게 벨이 울렸다.
비상회의실에 울린 벨이다.
달칵.
퍼뜩 시선을 돌린 토드가 빠르게 테이블 위에 놓인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펜실베니아에 진도 6.1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다급한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회의실 전체에 울렸다.
“다른 문제는?”
[예?]
“혹시 지진 외에 다른 문제가 있었냐고! 군사시설이라든가, 아니면 방사능이라든가!”
[현재는 지진 소식만 있습니다. 주 방위군이 동원되었고, 재난지역으로 선포할 예정이라는 백악관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긴급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알았다.”
통신을 꺼 버린 토드가 독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라우드는 물에 빠졌다가 보따리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그리고는 잠시 뒤에 거친 말을 쏟아냈다.
다윗의 별이 지닌 조직과 달리 미국이란 나라의 조직은 충성심이 부족했다. 그리고 감히 미국 대통령인 자신을 빼놓고 살길을 찾겠다고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우드는 늘 위기의 순간에 좀 더 크게 성장했다.
전 다윗의 별이 강찬의 손에 제거되고, 그 뒤를 이은 것도 그런 경우였다.
“아직 안 끝났다! 코리안!”
라우드가 두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띠익.
책상 위의 인터폰이 울리고,
[긴급회의가 준비되었습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수석 비서관의 음성이 그를 찾았다.
***
반둔두는 어제와 또 다른 모습으로 아침을 맞았다.
백여 개에 이르는 조립식 막사는 애교에 가까웠다.
주변을 감싸듯이 늘어선 탱크와 장갑차, 공격형 헬기, 50미터 간격으로 설치된 기관총에, 새롭게 쌓은 담장마다 화이트 울프와 스페츠나츠가 배치되어 외곽을 경계했다.
“이거 좀 보라니까! 내가 언젠가 아프리카에 나라 하나 세우자고 할 때 말을 안 듣더니. 하여간 죽여주는 거요!”
제라르가 마지막까지 버텼던 언덕에 올라와 기지를 둘러보던 석강호가 연신 감탄을 뱉어냈다.
“푸흐흐. 개새끼들이, 지금쯤 정신이 번쩍 들었을 거요!”
“누구?”
“누구긴 누구요? 대장한테 대들던 놈들이지!”
강찬은 픽 웃으며 석강호에게 주었던 시선을 앞으로 가져갔다.
“진짜 좋소! 백랑대에 스페츠나츠가 경계하는 땅이라니! 버너랑 냄비 챙겨와서 얼큰한 라면 끓여 먹으면서 봐줘야 제맛이 나는 건데.”
고개를 젓는 강찬을 보며 최종일이 웃음을 감출 때였다.
멀리서 차량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내려가자.”
“그럽시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분명해서 강찬은 바로 언덕을 내려갔다.
쩔걱쩔걱.
강찬의 뒤로 석강호와 최종일이 따랐고, 다시 호위대처럼 대테러 팀이 완전 무장을 한 채 함께 움직였다.
이런 모습은 솔직히 강찬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양범의 간곡한 당부가 있어서 당장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 하여간 더럽게 번거롭게 느껴졌다.
강찬이 언덕 아래로 내려왔을 때였다.
“김태진 대표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양범이 다가와 차량에 탑승한 이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에서 진도 6이 넘는 강진이 있었습니다. 사상자가 엄청난 것 같습니다. 보도 방송에서는 세 곳의 지진이 특별한 시설과 관련된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양범이 나직하게 건네준 말을 들었는데 솔직히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참고하시라고 전해드린 겁니다.”
“예.”
강찬의 짤막한 답을 들은 양범이 바쁘게 조립식 막사로 움직인 다음이었다.
두 대의 지프와 네 대의 승합차, 그리고 열 대가 넘는 트럭들이 입구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강찬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준 곳에서 마중 나갔던 이두희가 운전석에서 내렸고, 이어서 김태진과 서상현, 그리고 시끌시끌한 오광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찬은 곧장 기지 입구로 움직였다.
“어서 오세요.”
“고생 많았지?”
김태진이 점잖게 인사를 건넸고,
“야! 나는 네가 한자리할 건 알았는데 아프리카 전체의 오야붕이 될 줄은 몰랐다!”
역시나 목청이 커다란 오광택이 강찬을 안다시피 달려들어 반가운 마음을 전했다.
석강호와 최종일, 그리고 서상현 등이 뒤엉켜 인사를 나누는 동안, 트럭에 실렸던 음식들과 생필품들을 대원들이 빠르게 옮겼다.
“커피 한잔 하셔도 되죠?”
“자네와 석 선생을 만났는데 그냥 숙소에 들어가라고 하면 오히려 서운한 일 아닌가.”
“그런가요?”
모처럼 반가운 사람들이 만난 자리였다.
다 함께 강찬이 사용하는 막사 앞으로 움직여서 널따란 나무 테이블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셨다.
“하여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곳에 발전시설을 짓겠다고 할 때 간단하게 듣기는 했는데, 나는 아프리카 연합이라는 거, 십 년은 걸릴 줄 알았거든.”
“제가 계획한 일은 아닙니다. 바실리와 통화에서 알았는데 라노크 위원장님이 딸 안느와 비밀리에 추진했던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럼 이 아프리카 연합이라는 걸 라노크라는 분과는 의논했었던 건가?”
“제안을 받기 전까지 이런 일에 대해서 말한 것은 없습니다.”
김태진이 참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얼굴로 강찬을 바라보았다.
“선배님은?”
“위험한 건 넘겼는데 아직 움직일 정도는 아니구요. 차동균이나 곽철호도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렇군.”
고개를 돌려 기지를 둘러보던 김태진이 북한군 병사들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군복을 준비하라는 게 저 친구들을 위해서였나?”
“예.”
“남과 북이 하나로 뭉쳐서 아프리카의 한중간을 차지하다니. 이건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냥 심정이 복잡하다는 말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어.”
김태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는데 오광택만 “남과 북을 통합해서 범 강찬파 정도 만든 거네.” 하는 나름의 의견을 내놓았다.
30분쯤 이야기를 나눈 다음이었다.
김태진 일행은 병동으로 향했고, 강찬은 양범의 막사로 들어가 그와 마주 앉았다.
“이곳이 적당하게 정리된 거 같으니까, 저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직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이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시간을 조금 더 보내고 가시는 게 어떨까요?”
강찬의 의견을 들은 양범이 조용하게 뜻을 밝혔다.
“지진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판도가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고 해도 그들이 사력을 다해 달려들면 우리도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양범이 우려하는 바는 분명해 보였다.
어떤 이유를 붙이든 간에, 강찬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사실 총통이란 자리를 받아들인 건 나를 지원해 준 분들과 또 우리나라의 위치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차피 조직이 필요하기도 하구요.”
“생각해 놓은 것이 있으신가요?”
강찬은 잔잔하게 웃은 뒤에 입을 열었다.
“총통이란 불편한 자리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전체를 운영하는 것은 내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그런 일에 묶이고 싶지도 않습니다.”
강찬은 담배를 꺼내 양범에게 하나 권하고 다른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양범이 켠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난 다음이었다.
“총리든 부통령이든, 직책은 상관없습니다. 대신, 아프리카를 실제로 발전시킬 분으로 라노크 위원장님을 모실 생각이고, 남은 일들은 대사님과 양범 씨가 알아서 해주었으면 합니다.”
“이제 강찬 씨를 감당하기에는 내가 많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나라면 절대 그런 생각을 못 했을 테니까요.”
실제로도 양범은 강찬에게 꽤나 놀란 얼굴이었다.
“욕심이 아니라 능력이 필요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나는 라노크 위원장님과 양범 씨를 믿습니다.”
“후!”
강찬의 말을 들은 양범이 담배 연기와는 다른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단순하고 명료하게 일을 처리하시는군요. 한국에 가는 것은 라노크 위원장을 만나기 위해서입니까?”
“보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어쩐지 정말 믿기 어렵군요.”
양범이 농담처럼 말을 던진 다음이었다.
“강찬 씨가 한국에 가게 된다면 임시라도 이곳의 책임자가 필요합니다. 조율할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요.”
그가 진지한 음성으로 강찬의 의견을 물었다.
이런 게 지랄 같아서 높은 자리 질색이었다.
전투를 나서는 거야 살고 죽는 문제라 답이 간단하지만, 책임자를 지정하는 것은 이익이 얽히고설키는 데다, 주변 사람의 입장과 이익까지 배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일수록 돌아가면 안 된다.
“솔직하게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곳의 책임자가 되는 것이 양범 씨에게 도움되는 부분이 있습니까?”
강찬의 질문에 양범이 픽 웃었다.
“지금 그런 자리를 차지하면 우리 정부는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 온 김태진 대표를 이곳의 임시 책임자로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을 한 양범이 강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강찬 씨가 약속했던 지분을 우리 중국에 주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리고 은퇴 후에 강찬 씨를 위해서 일할 자리 하나쯤 바라는 욕심 정도 있습니다.”
강찬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자, 양범이 비슷하게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