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아직 해결해야 할 적들이 많아. (3)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강찬과 반둔두에 밀려들었다.
르완다, 부룬디, 우간다와 같은 약소국의 대통령들이 연신 강찬을 방문해 당장 해결해야 할 사안들을 늘어놓고 간곡하게 도움을 호소한 것은 그나마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잠비아, 남수단에서의 방문은 순전히 강찬에게 얼굴도장을 미리 찍겠다는 의욕에서 나온 방문이었다.
사람 사는 거, 어디나 비슷한 거 아니겠나.
아무렴 친분을 쌓고, 강찬에게 좋은 인상을 심겠다는 최고 통치자들이 맨손으로 나타나겠나?
반둔두로 엄청난 인력과 아프리카 전체를 탈탈 털다시피 가져온 듯 한 중장비들이 계속해서 몰려오고 있었다.
반두두와 강찬에 대한 관심은 아프리카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기지 방문을 허가받지 못한 보도진들이 시체를 발견한 하이에나 떼처럼 멀찍이서 반둔두를 감싼 채 연신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 모든 일이 단지 하루 만에 벌어진 상황이어서 강찬마저 어리둥절할 지경이니 지켜보는 이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나.
쩔걱쩔걱.
“총통. 탄자니아 국무총리의 방문입니다.”
한국말 능숙하지, 중국어는 모국어인 데다, 프랑스어와 영어까지 능숙한 양범은 완벽하게 강찬의 비서실장 노릇을 맡고 있었다.
“불편하게 왜 그러세요?”
“총통이라고 부른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강찬이 픽 웃자 양범이 기분 좋은 미소를 입으로 그려냈다.
이곳에서는 강찬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양범이 생각하는 미래도 그렇다.
그러니 강찬의 마음속 1번이 대한민국, 2번인 라노크를 제외하면 화이트 울프와 전투기까지 제공한 양범이 3번쯤 되지 않겠나.
양범의 미소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알아서 상대하겠습니다. 대신 20분쯤 뒤에 나와서 악수 한 번은 해주시는 게 좋습니다.”
강찬이 픽 웃자 양범은 답을 얻은 사람처럼 강철규의 병실을 나섰다.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지금 나가면 말이 길어져.”
“총통은 또 뭐냐?”
“아프리카 연합을 만들었는데 아마 내가 연합 초대 총통이 되는 모양이야.”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강철규의 눈가에 자부심과 처음 보는 대견함이 불쑥 올라와서는 습기처럼 옅게 깔렸다.
“일이 많아진다고 했었지?”
“어떤 일이든 하마.”
“이제부터 아프리카에 있는 반군들이 잠이 안 오겠는데?”
강찬의 농담을 들은 강철규가 눈 끝에 웃음을 그려냈다.
잔잔한 감정이 지나간 다음이었다.
“아버지.”
둘만 있는 병실에서 강찬은 나직하게 강철규를 불렀다.
“왜 그런지는 묻지 마. 과거에 아버지가 나나 어머니에게 왜 그랬는지 묻지 않는 것처럼.”
강철규가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강찬은 계속 말을 이었다.
“다시 태어났더니 이런 모습이었어. 그리고 거짓말처럼 몽골에 갈 때 아버지를 다시 만났고.”
짐작했었던 모양이었다.
강철규가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그랬다.
“전쟁터에서 살지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로 살고 싶어. 그래도 괜찮겠어?”
강철규가 힘겨운 얼굴로 무언가를 삼켰다.
“내게 부모님이 따로 계시다는 건 알지?”
말을 잊은 사람처럼 강철규는 또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도 한 번쯤은 남들처럼 살자. 어색하지 않게. 그리고 작은 행복이라도 손에 쥐면서. 괜찮지?”
강철규가 입술을 꾹 다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자요. 그리고 빨리 일어나. 일이 많다니까.”
강찬이 침대 옆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붕대 밖으로 겨우 나온 강철규의 손가락이 강찬의 손을 붙들었다.
“고맙다.”
늙어버린 강철규가, 아프리카에서조차 전설을 그려낸 대한민국 특수팀의 전설이 아들에게 꺼낸 한 마디였다.
강찬은 잠시 강철규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세월의 힘일지 모른다.
아니면 대한민국의 특수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이해하면서 강철규를 용서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떤 이유라도 괜찮다.
적이 아닌 다음에야, 대한민국과 강찬을 위해 이토록 애써준 사람이라면 과거의 일들은 이제 묻어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강찬은 일과처럼 제라르의 침대를 향해 걸었다.
“돌대가리야!”
“그냥 주는 대로 좀 처먹어!”
두 놈의 고함이 강찬을 부르고 있었다.
탄자니아 국무총리의 방문을 받은 양범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막사 한쪽으로 움직였다.
일할 사람이 많아지고, 장비가 늘어나자 반둔두 기지에 조립식 막사가 눈에 띄게 늘고 있었다.
“양범입니다.”
[지원이 필요한 것은 더 없나?]
중국의 국가주석 장택민의 전화였다.
아프리카 연합이라는 엄청난 발표는 미래를 내다본 양범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장택민에게 증명하는 계기도 되었다.
결과는 이렇게 중국 시각으로 오전과 밤늦게 한 통씩 전화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혹시 새로운 총통을 만날 수 있을까?]
“주석님. 그 점은 맡겨 주십시오. 이쪽이 정리되는 대로 대한민국 대통령을 제외하면 아시아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총통을 만나는 지도자가 되시도록 애쓰겠습니다.”
[좋아! 정말 좋아!]
중국인 특유의 높은 억양으로 장택민은 연속해서 “하오!”를 외친 뒤에 전화를 끊었다.
일본의 다무라 총리는 한국을 자비로 방문해서 문재현의 면담을 청했으나 이틀째 거절당했다.
치욕스러운 모습이었으나, 다무라는 여전히 호텔에서 묵었다. 그 와중에 일본의 방송들은 그래도 청와대가 시간을 만들기 위해 문재현의 살인적인 일정을 조율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는 소설 같은 보도들을 연이어 내보내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그 시각에 문재현은 고건우, 김관식과 함께 청와대에서 비빔밥을 먹고 있는데도 말이다.
“희한한 일이군요. 오히려 발전 용량이 늘었다니?”
“부원장이 다녀간 이후로 어쩐 일인지 전에 비해 발전 용량이 30% 상승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두 달 뒤쯤이면 전기를 제대로 공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에 담은 비빔밥을 삼킨 문재현이 김관식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 임기 내에 결과를 내겠다는 욕심으로 무리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반드시 안전하고 지속적인 전기 공급이 이루어지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드세요. 드시면서 이야기하시지요.”
문재현의 권유에 김관식이 숟가락을 움직였다.
“전기료를 내지 않는 국가라니? 원장은 상상해 본 적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통신요금 안 내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습니다.”
“저런!”
세 사람이 잔잔하게 웃고 난 다음이었다.
“이번에 희생된 대원들부터 국가적 영웅으로 예우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통해할 가족들에게는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명예로운 희생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밝혀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드십시다. 이러다가 비빔밥 하나를 오후 내내 다 못 먹겠습니다.”
문재현이 거듭 권하고 난 다음이었다.
“일본 총리는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고건우가 넌지시 물었다.
“그는 내 임기 중에 세 번이나 약속을 어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교육 방법 중에 그런 것이 있더군요. 반성하는 동안 벽을 바라보게 한다던가요?”
농담처럼 들렸다.
그런데 말을 하는 문재현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부원장과 의논하겠지만, 나는 이번 아시아 동맹국 회의에서 일본을 제외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외교적인 관례로 볼 때 잔인한 결정처럼 들렸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만한 힘이 있었다.
***
미국국가안전보장국 국장 토드는 비밀리에 모인 각 부서의 국장들을 쭉 둘러보았다.
뱀처럼 차가운 인상을 지닌 그는 왼손에 든 자료를 강조하듯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조사 결과, 스웨이든 전 CIA 국장의 주도하에 건설한 핵융합 발전시설이 실제로 있고, 그 시설이 폭발 직전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스웨이든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국에서 사살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소.”
국방부 정보국장의 질문에 토드가 답을 한 다음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전혀 짐작할 수 없소. 지금 당장 폭발할 수도 있고, 길게 봐서 이틀 정도 여유가 있다는 예상이 전부입니다.”
깊은 신음이 모여 앉은 여덟 명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믿을 수가 없군. 다윗의 별이라는 조직이 행정부를 장악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본토에서 이런 폭발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묵인하는 대통령이라니?”
이미 그라펠트의 증언까지 모두 들은 참이어서 분위기는 정말이지 처참했다.
“게다가 핵융합 발전시설의 폭발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 사람을 불러오는 것이라는 말은? 이거야, 주술사도 아니고.”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 다음이었다.
“그가 아프리카 연합의 초대 총통이라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런 지위를 차지한 인물이 미국까지 와서 폭발할지 모르는 핵융합 시설을 막아줄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요.”
“엄청난 희생이 있는데 당연히 나서주어야 하지 않겠소?”
“과거의 미국과 한국의 관계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됩니다. 그는 이전에 우리 CIA와 정부가 어떤 일을 했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토드가 미국의 현재 상황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설명해주었다.
“이스라엘과 영국도 걸려 있다고 하지 않았소? 만약 그가 다른 나라에 먼저 간다고 하면 우리는 그나마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게 아니오?”
“그렇다면 일단 누구라도 아프리카에 보내놓고 회의를 계속해야지요!”
“이미 출발했습니다.”
의견이 쏟아져 나오는 중간에 토드가 둘러앉은 이들을 보며 말을 꺼냈다.
“남은 것은 그의 성향에 맞는 조건을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입니다. 앞으로 다섯 시간 내에 결론을 도출해야 합니다.”
“후우.”
회의실의 분위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로버트 앞에 봉지 커피가 놓였다.
“고맙습니다.”
그린베레 출신 지휘관인 로버트는 못 본 사이 칠 년은 늙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긴 여정에서 생긴 피곤함과 무언가를 반드시 얻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의 금빛 머리칼 한올 한올에 이슬처럼 매달려 있었다.
“양복이 잘 어울리는군?”
“군정보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강찬이 피식 웃자 로버트가 얼른 종이컵을 들어서 봉지 커피를 마셨다.
석강호와 최종일이 검은 군복에 베레모를 쓰고 뒤를 지키고, 역시 같은 군복을 입은 강찬은 두건으로 머리를 묶고 있어서, 얼핏 보면 로버트가 납치되어 온 모습이었다.
“용건은?”
강찬의 팔에 달린 태극기에서 시선을 든 로버트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국의 핵융합 발전시설이 폭발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무것도 모른 채 희생될지 모를 민간인 희생자가 얼마나 나올지 모릅니다.”
“로버트.”
강찬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가며 매달리는 로버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내겐 그런 능력이 없어.”
그리고는 짤막한 한마디를 던졌다.
“무슈 강이 한국의 고성 발전시설을 안정시킨 일을 알고 있습니다. 민간인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가 절반을 넘습니다.”
“웃기는군. 대한민국에서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건 우리 국민이 죄가 있어서 그랬던 거냐?”
다급하게 매달렸던 로버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중국에 일어난 지진으로 희생된 4만 명은?”
“그건 영국이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피식.
“스웨이든이 영국인이었다는 건 처음 들었다.”
강찬의 웃음을 본 로버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미 말이 튀어나온 다음이었다.
“천만이 죽든, 1억이 죽든,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니 더는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조용하게 돌아가.”
“무슈 강!”
다급하게 나온 로버트의 음성이 마치 고함처럼 들렸다.
그러자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석강호가 개를 본 호랑이처럼 눈빛을 번들거렸고, 최종일은 방아쇠에 검지를 걸었다.
“무슈 강!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듣고 싶지도 않다만, 정 하고 싶다면 그냥 이곳에서 해.”
로버트가 석강호와 최종일의 눈치를 살핀 뒤에 결심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라우드를 무슈 강에게 넘길 의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제안을 들은 강찬은 그럴 것 같았다는 투의 눈빛이었다.
“그런 놈 모가지를 돌려서 내가 얻는 게 뭐가 있지?”
“그보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이려는 겁니다.”
이제는 관심도 없다는 것처럼 강찬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후우.”
담배 연기가 퍼져나가는 동안,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돌아가. 그리고 너를 보낸 놈들에게 전해. 미국 대통령을 죽였다는 죄를 내게 얹으려 하지 말라고.”
로버트가 애처로운 시선으로 강찬을 바라보는 앞이었다.
“스웨이든이 한국에서 저지른 테러를 알고 있겠지? 라우드가 한국 방문을 핑계로 계획했었던 전쟁도?”
“사과하겠습니다. 사과하면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피식.
“한 번만 더 같은 말을 지껄이면 너는 죽는다. 그러니 이젠 얌전히 돌아가.”
강찬의 눈빛을 본 로버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