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2부)-89화 (508/520)

제4장. 아직 해결해야 할 적들이 많아. (2)

바실리는 차가운 미소가 서린 눈매로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어쩐 일인가?]

“교활한 프랑스의 구렁이가 마침내 이룬 것을 축하한다.”

[무슨 말인지 당최 모르겠군.]

라노크는 실제로도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이미 아프리카 연합의 실체가 드러났어. 교활한 인간! 별장에 처박혀 있는 척하면서 안느와 루이를 그토록 밖으로 돌리더니 결국, 뒷구멍에서 아프리카를 묶고 있었군.”

[자네도 이렇게 알고 있는데 숨겼다는 건 너무 과한 말 아닌가?]

라노크의 대답에 바실리는 먼저 픽 하고 웃었다.

“아프리카에 깔린 정보총국의 과거 라인을 이용했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정보국의 눈에 띄었을 테니까. 그리고는 별장에 앉아서 시선을 끌다니. 과연 프랑스인의 속은 믿을 수가 없어.”

가벼운 라노크의 웃음이 넘어왔다.

[그래도 마지막에 전투기를 보내준 것은 굉장히 훌륭한 선택이었다. 바실리.]

“덕분에 나도 총통에게 신임을 잃지 않았다는 뜻인가?”

[현재까지는 그렇지.]

“로망에 이어 총국장 에르완의 배신을 그대로 두고, 그 밑에 테오를 붙여서 눈을 가리다니! 안느는 아직 아프리카에 있겠지?”

[연합의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할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후후후! 후하하! 하하하하!”

전에 없이 통쾌한 바실리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라우드의 얼굴이 보고 싶군.”

[충고 하나 해도 될까?]

“기꺼이 받아들이지.”

[아프리카 연합이 정식 발표된 후에 보는 것이 더 극적일 거다. 그때 라우드의 얼굴은 나도 보고 싶으니까.]

둘이서 비슷하게 웃은 다음이었다.

“유럽 정보 위원회를 만들 때도 자네가 이랬었다는 걸 깜박 잊었다. 마지막까지 내게 찾아와 주었던 점에 감사한다.”

[뭐라고 해도 우리는 동료 아닌가?]

“흥! 어쩐지 조연 순서가 또 밀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앞서는군.”

다시 비슷한 웃음이 오간 다음에 전화가 끊겼다.

***

전 세계의 이목은 아프리카와 지진이 일어난 세 곳의 도시에 집중되었다.

[미국의 펜실베니아, 영국의 그란섬, 이스라엘의 아라드에 또다시 진도 5.8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보도 화면에는 흔들리는 땅과 진열된 제품들이 떨어지는 장면, 이어서 도로를 비추는 CCTV, 상점의 유리가 깨지고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이번 지진은 지각판의 연결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인 데다, 연속해서 일어났으며, 세 곳의 발생시간과 강도가 비슷하다는 의문점을 남기고 있습니다.]

TV 화면이 네 개로 나뉘면서 지진이 일어난 세 곳을 보여주었고, 오른쪽 아래에서 리포터가 서서 상황을 설명했다.

[통상적인 여진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있다는 점까지를 고려해 볼 때, 이번 지진에 숨겨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냐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리포터의 모습을 비추었던 화면이 다시 앵커에게로 돌아왔다.

[다음은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가 화면 아래를 바라본 직후에 화면이 바뀌어 회담장으로 들어서는 음부투의 모습이 먼저 올라왔다.

[아프리카의 7개 나라로 출발한 아프리카 연합에 주변국들이 속속 가입 의사를 밝히고 있습니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음부투가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이어졌다.

[아프리카 연합은 현재 콩고 민주공화국 대통령인 음부투가 처음 의견을 제시했고, 곧바로 6개 나라가 동의했으며, 초대 총통으로 한국 출신의 인물을 추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회담장 중간에서 서류를 들여다보는 안느의 모습이 스치듯 지나갔다.

[반둔두에 차세대 발전시설을 설립하는 한국의 계획이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고, 프랑스, 중국, 러시아가 군사적 지원을.]

항공모함과 전투기가 나르는 장면이 화면에 올라왔고,

[그리고 독일, 스위스, 사우디아라비아가 자본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 아프리카 국가들에 확신을 심어준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우즈만이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이 이어서 화면에 올라왔다.

[이번 연합의 초대 총통의 임기는 종신제로 알려져 있으며, 화폐의 통일, 치안, 그리고 군대의 지휘권까지를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이크. 그렇다면 독재와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유럽과 미국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앵커의 질문에 리포터가 한 박자 느리게 답을 했다.

[다만, 아프리카 전역에 퍼진 반군의 소탕, 그리고 아프리카를 관통하는 도로의 건설 등에 따르는 불협화음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권한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초대 총통으로 추대된 한국인에 대한 정보가 있나요?]

[오늘 오전까지 반둔두에서 벌어졌던 반군과 한국군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박철수 장군이라는 설과 정보국 소속의 인물이라는 설이 돌고 있습니다.]

[정보국의 인물이라면 윤곽이 나올 정도가 아닙니까?]

[갓 오브 블랙필드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인물이 있기는 합니다.]

[아프리카의 절대자라는 뜻입니까?]

앵커의 질문을 듣느라 잠시 기다렸던 리포터가 역시나 한 박자 느리게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한국에 정통한 인물들에 의하면 그가 초대 총통일 거란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가 이제 22세에 불과해서 그 나이에 종신제인 총통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건 아무래도 신뢰가 떨어지는군요.]

[그렇습니다.]

화면이 다시 앵커에게 돌아오며 뉴스는 런던의 선물 거래소 소식으로 넘어갔다.

***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지원해 준 인원들이 빠르게 반둔두 기지 주변을 정리했다.

반군의 시체들은 5킬로미터 바깥에 커다란 구덩이들을 판 뒤에 그 안에 나눠 넣고는 위를 흙으로 덮었다.

사람을 한꺼번에 많이 묻으면 가스 때문에 땅이 들썩인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참 잔인해서 그 시체들이 있는 주변으로는 1년 뒤부터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초원이 생겨서 근처의 동물들이 잠시나마 행복한 삶을 누리기도 한다.

강찬은 희생된 북한군 병사들과 우리 대원들을 별도로 예우해서 한쪽에 두었다.

2차로 오는 중국군에게 그들이 조국에 돌아갈 때까지 잠들어 있을 관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숫자였다.

7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보관할 시설이 부족한 데다, 아프리카 특유의 날씨에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식을 차린 안철호가 강찬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안철호입니다.”

그는 강찬을 처음 본다.

아직 어린 나이인 것에 놀라는 눈치였지만, 주변에 서 있는 우리 대원들의 태도를 보고는 그런가 보다 하며 넘어가는 센스를 보였다.

“우리 병사들은 이곳에 묻어주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위령탑? 그런 것을 하나 만들어주셨으면 싶습니다.”

강찬을 마주한 안철호는 어색한 억양으로 바른말을 사용하며 뜻을 밝혔다.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강찬은 안철호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서서 듣고만 있었다.

“우리 병사 중에서 귀순 의지가 있는 병사들을 강찬 선생님이 좀 받아주시라요.”

어쩌면 굴욕적이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안철호는 북한 사투리를 불쑥 사용했고, 마지막에는 시선을 침대의 발 쪽으로 떨구고 말았다.

“안철호 소좌.”

강찬이 불렀고, 안철호가 시선을 다시 들었다.

“북한에 아프리카의 지분을 일정 부분 넘기겠다. 핵미사일을 우리가 관리하는 것과 이곳에 있는 병력을 우리가 원할 때까지 계속 사용하는 조건이다.”

안철호는 멍하니 강찬을 보았다가 잠시 뒤에 숨을 훅 토해냈다. 지금 말한 조건이 받아들여지기만 한다면 이곳의 병사들은 배신이 아닌 거고, 박상식도 안철호의 귀순에 책임질 일이 없게 된다.

“고맙습니다. 강찬 선생님.”

안철호를 향해 피식 웃어준 강찬이 몸을 돌렸다.

“남조선이래 정말 용이 났구만.”

안철호는 차동균과 곽철호가 왜 그렇게 강찬을 믿고 기다렸는지도 깨달았다. 그러면서 이런 전사라면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것처럼 머리를 눕힌 그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문재현은 청와대 뒤뜰에 서 있었다.

강찬이 아프리카 초대 총통이 된다.

한국의 인재가 세상으로 나가더니 대륙의 주인이 된 거다.

자꾸만 저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고 싶고, 무언가를 크게 외치고 싶어서 문재현은 주먹을 꼭 쥐고 기다랗게 숨을 토해냈다.

잠시 뒤에 다가온 고건우와 전대극 역시 흥분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얼굴이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정보망에서 넘어온 소식입니다. 이번 아프리카 연합은 라노크 전 대사가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흠. 그렇군요.”

문재현은 라노크 같은 인물이 부럽기는 했다.

아프리카에서 그런 준비들을 남몰래 할 수 있는 인물이 대한민국에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시기하거나 비방하려는 세력들을 누르고, 지금은 우리 부원장에게 모든 힘을 쏟아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 사람이 비슷한 표정으로 각오를 다졌다.

***

더는 시간을 끌 여유 따위 없다고 판단한 그라펠트는 결국 자리를 비웠다.

차세대 발전시설이 원인이 돼서 세 개의 나라에 지진이 일어난 거라고 밀어붙이고, 그 핑계로 결국 한국을 치겠다는 라우드의 생각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결국 핵융합 시설이 지진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오래지 않아 밝혀지게 된다. 게다가 놀랍게도 강찬은 아프리카의 절대자로 격을 높인 마당이다.

이제 어지간한 핑계로는 강찬과 한국을 건드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 되는 세상이 느닷없이 펼쳐지고 말았다.

남는 것은 세 지역을 핵으로 뒤덮는 일이다.

체르노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방사능이 이스라엘 전역을 덮을 거고, 영국을 파괴할 것이며, 미국의 한 지역을 오래도록 죽음의 땅으로 만들게 된다.

그라펠트는 빠르게 뉴욕의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공사장에 있을 것 같은 엉성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다윗의 별이란 원래 자본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다.

라우드는 이번 핵융합 발전소의 폭발을 각오하면서 파생상품으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익을 기대했을 것이고, 엄청난 투자를 펼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덜컹.

거친 움직임으로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에 도착하자, 입구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두 명의 요원이 다가와 그라펠트의 앞을 막아섰고, 그 뒤로 세련된 조명과 완벽한 보안을 바탕으로 미국국가안전보장국 특수기획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팔을 든 그라펠트의 몸을 수색한 요원이 안쪽을 고개로 가리키며 몸을 비켰다.

자동문을 지났고, 다음으로 두 번에 걸친 보안 게이트를 지나자, 마침내 날카롭게 생긴 요원이 다시 그라펠트의 앞에 나타났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라펠트는 굳은 표정으로 요원의 뒤를 따랐다.

“이곳입니다.”

요원이 문을 열어주었고, 그라펠트가 안으로 들어섰다.

일반적인 정보국 수장의 방과 비슷하게 오크 색으로 벽을 둘렀고, 무거워 보이는 나무 책상이 중앙에 있었다.

“어서 오시오.”

뱀보다 차갑게 생긴 40대 초반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앉으시죠.”

그는 책상 앞에 놓인 고급스러운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당신이 제보한 것이 사실이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상대는 압박하듯 그라펠트에게 으르렁거렸다.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 지진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이 지진은 엄청난 방사능을 퍼트리게 됩니다.”

“다 좋습니다. 당신의 직책, 능력으로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는가? 그런 것이겠지요?”

상대는 고개를 모로 끄덕여 보였다.

알고 있으면 얼른 말을 해보라는 의미였다.

“이번 일은 한 사람만 책임지면 됩니다. 이 일로 미국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대신, 나를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지진을 막을 방법은 알고 있습니까?”

“막을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지요.”

그라펠트는 마지막 기회를 부여잡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 말을 건넸다.

***

뜨거운 열기, 이따금 부는 바람, 냄새, 그리고 하얀 구름, 바삐 돌아가는 세상과는 다르게 아프리카는 늘 일정하게 시간이 흐른다.

강찬은 제라르가 정신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병동으로 향했다.

침대 옆으로 움직인 강찬은 힘겹게 눈을 뜨고 있는 제라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정신이 들어?”

“대장이 보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프랑스 말이었다.

속삭이는 듯한 제라르의 프랑스 말이 나쁘지 않았다.

“멋진 전투였다.”

“또 대장이 피를 넣어준 겁니까?”

엉뚱한 대화가 오갔는데 나머지는 눈을 통해 충분히 의견을 주고받았다.

강찬이 제라르의 침대 옆 의자에 앉은 다음이었다.

“애새끼가 하여간 약해 빠져서는!”

석강호가 툴툴대며 제라르에게 다가섰다.

“시끄러워, 돌대가리.”

“얼래? 좀 살아났나 보네?”

“죽을 줄 알았냐?”

“다 죽게 생긴 걸 살려놓으니까.”

대꾸할 힘이 모자라서 참는다는 것처럼 제라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바키도 안심할 정도고 네로? 그 친구도 무사하다.”

“다행입니다.”

“제라르.”

“예, 대장.”

강찬이 불렀고, 제라르가 답했다.

“얼른 일어나라. 아직 할 일이 많아.”

좋았다.

제라르가 볼의 상처를 우그러트리며 웃는 것을 보는 것이.

“좀 더 자둬.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자. 셋이서.”

“돌대가리는 필요 없지 않을까요?”

“에이, 개새끼!”

옆에서 듣고 있던 석강호가 불쑥 욕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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