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누가 시킨 일 아니다. (1)
바실리는 차가운 미소를 담은 얼굴로 전화기를 들었다.
“매번 잘도 살아나는군.”
[그렇다면 한 번쯤은 반가운 척을 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반가움이 생기지는 않는군. 용건은?”
[양범과 통화했다고 들었다.]
바실리가 눈을 매섭게 뜨자 수행원 한 명이 재빠르게 다가와 홍차 잔을 채워주었다.
[이제 결정할 때도 되지 않았나? 무슈 강이 한국에서 벌어졌을 일들을 막지 못했다면 전화를 했다던 우리의 동료 양범은 정말 제거됐을 거다.]
바실리는 대꾸를 미룬 채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양범이 구금된 것이 내 탓인 것처럼 말하는군.”
[하나만 분명하게 하지. 자네는 무슈 강에게 어떤 도움도 청하지 않았었다. 알아서 하란 뜻이었다면 그건 그를 잘 못 본 거다.]
바실리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를 믿어라. 자네가 외면하는 사이, 양범이 구금되었고, 독일과 스위스가 도움을 주지 못할 때에도 그는 홀로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과 일본을 상대했었다.]
“핵융합 발전시설이 위험하다는 말은 왜 안 하나?””
[자존심 강한 동료 바실리에 대한 나의 예우다. 그런 상황 때문에 무슈 강을 찾기보다는 자네 스스로 그에게 나서 주길 바랐으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예전 위원장 시절에 있었던 감정 담기지 않은 라노크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게 전부였다.
바실리는 대꾸하지 않았고, 라노크 역시 더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감정 담기지 않은 음성과 이어지는 침묵.
라노크의 의미는 분명했다.
이제는 결정하란 통보였고, 어쩌면 이것이 라노크와의 마지막 통화가 될 수도 있었다.
경계를 긋고 그 바깥의 인물은 적으로 간주하는 그런 인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라노크의 뾰족한 눈매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바실리 만큼 잘 아는 인물도 드물다.
짧지 않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잘 있게, 바실리]
얼음을 비벼서 만든 것 같은 차가운 음성이 날아왔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말해.”
바실리가 이를 악물고 뱉어낸 대꾸가 곧바로 나왔다.
밤의 눅눅함이 헬리콥터가 일으킨 바람과 소음, 불빛에 밀려나면서 도시의 불빛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두두두두두두!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지?”
“대략 20분쯤 남았습니다.”
조종사와 대화를 나눈 강찬은 답답한 얼굴로 바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깊은 바닷속에 별이 뜬 것처럼 촘촘히 박혀서 빛나고 있었다.
아프리카가 위험하다.
중국이 병력을 파견한다고 해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그걸 탓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 삼아 힘겹게 버티는 아프리카의 반둔두가 보이는 듯싶었고, 대원들이 악착같이 쏘아대는 소총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한국 공군의 전투기로 가는 것도 고민했었다.
막말로 아예 폭격을 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만약 미국의 전투기와 허공에서 마주친다면, 뒷좌석에 탄 강찬으로서는 답이 없는 일이다.
“후.”
나직한 한숨을 내쉰 강찬은 다시 전화기를 꺼내서 번호를 눌렀다.
[양범입니다.]
“강찬입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중국의 전투기가 아프리카로 직접 이동할 수 있을까요?”
멈칫하는 것처럼 틈이 있고 나서 양범의 말이 나왔다.
[중간급유를 통해서 기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문제는 중간에 걸린 나라들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미국이 막아설 경우에, 전면전을 각오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강찬이 건넨 대꾸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혹시 아프리카에 직접 갈 생각입니까?]
속을 들여다본 듯한 양범의 질문이 있었다.
한편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고.
“그렇습니다. 최단 시간 안에 아프리카에 도착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리비아에 도착했던 것처럼 말이죠?]
급한 마음을 충분히 알 양범이 장난을 칠 리도 없는데?
강찬은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잠시만 전화를 끊고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양범의 요청이 있었고,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
그라펠트는 나름 냉정한 인물이었다.
“상황은 알았다고! 그러니 내가 보고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놔! 대책을! 기술적인 문제를 담당하라고 당신들이 있는 거라고!”
그런 그가 지금은 전화기에 대고 고함을 바락바락 지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펜실베니아와 영국의 그람섬, 이스라엘의 아라드에 지진이 일어나거나 핵융합 발전시설이 폭발하게 됩니다. 근방에 소개령을 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흘의 여유가 있다고 했잖나! 나 역시 그렇게 보고했었단 말이다!”
그라펠트의 고함이 잘 정리된 앞쪽 벽에 부딪히며 방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고함은 분명 그가 질렀다.
그런데도 어쩐지 지금은 그가 더 애처롭게 보였다.
“후! 핵융합 발전시설이 폭발한다면? 단순한 시설물 폭발 같은 건가? 아니면 핵폭발 같은 건가?”
씩씩대던 그라펠트가 숨을 가다듬은 뒤에 꺼낸 질문이 전화기를 타고 건너간 다음이었다.
[체르노빌 사태와 비슷한 일이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에서 동시에 일어납니다. 더 끔찍한 것은 그것이 상상하지 못한 지진과 함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답을 듣는 그라펠트의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단숨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핵융합 시설의 내부 온도가 벌써 최고점에 달했습니다. 과거 영국에서 있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반응입니다.]
“이봐. 문제점은 알았다니까. 그러니 이제 대책을 말해봐! 빌어먹을 대책이라는 것을 뭐라도 하나 말해보라고!”
[지금은 미스터 강에게 부탁하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고성의 발전시설을 정상으로 돌려놓은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라펠트는 넋이 완전히 나간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위성을 파괴한다면?”
[반응은 알 수 없습니다. 그 즉시 핵융합 시설이 함께 폭발할 수 있습니다.]
털썩.
책상으로 손을 떨어트린 그라펠트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자본에만 의지했기 때문에 과거 다윗의 별이 당했다고 해서 라우드가 미국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 마당이다.
그렇게 전 세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를 차지했는데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살려달라고 강찬에게 매달리는 일이라니.
피식 웃던 강찬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라펠트는 심장이 서늘하게 식는 느낌마저 받았다.
[여보세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소개령이라도 내려야 합니다!]
책상에 떨어진 전화에서 계속 고함이 들려왔다.
[펜실베니아에서 핵융합 시설이 폭발하면 뉴욕과 필라델피아까지 영향권에 듭니다! 그란섬과 아라드에서 폭발이 일어나면 영국과 이스라엘도 끝장입니다! 희생자가 얼마나 나올지 모릅니다! 여보세요!]
잔인한 예상이 멍하게 앉아 있는 그라펠트의 귀를 계속 파고들었다.
***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바실리가 입가에 미소를 달고 전화기를 들었다.
“구금이 풀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활동이 너무 왕성한 것 아닌가?”
[위원장이 아프리카에 최단시간 안에 도착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하! 전투기를 콜택시쯤으로 알고 있나 보군. 중국에 전투기가 없지 않을 텐데 이렇게 전화한 이유는?”
[이쯤에서 등장해야 보다 멋지지 않을까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몽골에서 함께 지낼 때 배웠던 처세술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바실리가 정말 냉정해 보이는 미소를 얼굴에 그려냈다.
“라노크가 알아보고 있겠지만, 어디, 우리 양범의 의견을 들어볼까?”
[성남공항으로 수호이를 30대만 보내주십시오. 그걸 통해 콩고 민주공화국의 음반다카까지 이동하면 좋겠습니다. 그 외에 30대의 수호이가 대기하고 있다가 함께 이동한다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미국이 막아선다면 그것으론 부족해.”
냉철한 바실리의 음성이 또 들렸다.
[우리가 비슷한 숫자의 전투기를 보내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미국이 함부로 막아서기는 어려울 겁니다.]
“지상군의 파견은?”
[12시간 뒤에 파병이 가능합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조연이 됐더니 이제는 전투기로 택시 영업을 하게 되는군! 위원장에게 계획을 전해! 한국 공군작전사령부에 통지해달라는 요청도 전하고.”
[현명한 판단입니다, 바실리.]
통화가 그렇게 끝났다.
***
물보다 진한 느낌으로 뿜어진 피는 쇳가루 섞인 냄새를 피우며 주변을 적신 다음, 곧바로 말라붙는다.
그렇게 고인 피가 말라붙으면 그때부터 끈적거리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고약한 비린내를 풍겨낸다.
그 피가 사람의 몸뚱이, 장기에서 나는 역한 냄새와 뒤섞인 순간부터 비위가 약한 사람은 구토를 일으킬 정도로 끔찍한 냄새로 변하는데, 지금 반둔두 주변이 그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죽음처럼 쩍쩍 군화에 달라붙는 느낌이나 코를 파고드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바로 앞에서 터지는 화약 냄새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투두두둑! 퍼서서석! 투두두둑! 퍼버버벅!
담벼락에 떨어졌던 적의 사격이 곧바로 소총을 겨누던 북한군 병사의 머리를 터트렸다.
털썩!
그렇게 죽어도 지금 당장은 누가 돌아볼 틈도 없었다.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기며 차갑게 식어가는 병사를 대신해 또 다른 병사가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이 월등히 급했기 때문이었다.
투두두둑! 투두두두둑!
“간나 새끼야-!”
저렇게 바보같이 죽어버린 놈도 원망스럽고, 죽인 놈도 원망스럽다.
기지를 감싸고 휙휙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며 북한군 병사들은 완전히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 같았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이곳에서의 이 처절한 살육은 전투로만 기억되고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만 기록으로 남는다.
삐이이이융-. 콰으으응!
또다시 담벼락 위쪽이 터지면서 병사 셋이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아아아악! 아악! 끄아아아!”
둘은 죽었고, 하나는 살아서 고통을 이기지 못한 비명을 질러댔는데 그 병사를 향해 용성부대원 한 명이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꽈아아-악!
북한군 병사가 용성부대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괜찮아! 내가 어떡해서든 치료할 거니까 견뎌! 알았어!”
“끄아아-!”
“야! 야, 이 인마! 견디라고!”
모르핀을 꽂아넣는 용성부대원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목덜미와 가슴과 배가 시커멓게 타버린 대원이 비명을 지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라우-. 허억! 헉!”
모르핀 덕분인 모양이었다.
부상당한 대원이 그나마 씹듯이 말을 뱉어내는 것은 말이다.
“북조선은 몰라도 말이지. 남조선은, 남조선의 전사래 우리를 이케 버리지 않갔지? 허억! 허억!”
“야! 야, 인마!”
“내래 고마웠어야. 허억! 헉! 이케 대우해준 거 말이지.”
“야! 정신 차려! 잠들면 안 돼! 야!”
용성부대원이 눈을 감는 북한군 병사의 뺨을 때리는데도 그는 묘한 미소를 그려냈다.
“오고 있구만. 역시 남조선 전사래 대단해. 이곳에 땅을 차지한 것도 기렇고.”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적들이 뒤엉킨 틈이다.
회색의 군복을 입고 뛰어든 강철규는 마치 사람 사이에 떠 있는 피를 뒤집어쓴 귀신처럼 보였다.
꽈악! 핏! 핏!
그는 적의 목을 당겨서 옆구리를 갈랐고,
피윳-!
반드시 목을 깊게 그었다.
그는 그렇게 피를 뿜어내는 적의 몸뚱이를 방어벽처럼 돌려가며 밀고 나갔다.
휙! 피윳! 핏! 핏!
강철규의 존재를 알아챈 적들이 방아쇠를 돌렸을 때,
꽈악! 핏! 핏! 피윳-!
그는 이미 또 다른 적의 목을 잡고 주변을 흐트러트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투두두둑! 퍼버버벅! 투두둑! 퍼버벅!
미친 듯이 강철규를 노린 사격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의 주변에 있던 적들이 무더기로 쓰러져 나갔고, 그때쯤 강철규는 그 자리에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을 지키라!”
북한군 소위의 고함이 아니어도 담벼락에 매달린 대원들은 그를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헉헉! 헉헉’
강철규는 평소보다 팔이 느려진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꽈악!
움켜쥔 적의 목이 제대로 안 잡힐 때도 있었다.
핏! 핏! 피윳-!
그래도 멈출 수가 없다.
저격수가 바로 저 앞에 있어서 저놈을 제거해야 한동안 기지가 안전한 거다.
부슈-웅! 퍼억!
앞을 막아 세웠던 놈의 가슴이 잔인하게 터져나갈 때, 강철규의 왼쪽 어깨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쏟아져 나왔다.
핏! 핏! 피윳!
멈출 수 없다.
이곳에서 멈추면, 후배들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영토인 반둔두를 지킬 수 없다.
조국이 원하는 땅이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이 땅에서 대한민국은 새로운 역사를 그려낼 거다.
부슈-웅! 퍼억!
강철규는 이를 악물고 새로운 적의 목을 움켜쥐었다.
핏! 핏! 피윳-!
그리고는 자살 폭탄을 두른 사람처럼 앞으로 밀고 나갔다.
저격수가 놀란 눈으로 강철규를 보고는 옆에 두었던 소총을 집는 순간이었다.
와락! 푹! 푹! 푹!
번개같이 달려간 그는 저격수의 목덜미에 세 번의 칼을 찍어 넣었다.
투두둑! 퍼버벅!
그의 오른쪽 어깨가 터져나갈 때였다.
투두둑! 투두두둑! 투두둑!
“선배님!”
“선생니-임! 여깁네다!”
곽철호와 북한군 소위가 미친놈들처럼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