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도. (2)
수화기에서 건너온 보고를 듣던 박상식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뭐라 기랬나? 다시 말해보라.”
[중국에서 군대를 파견하갔답니다. 주둔지만 정해주믄, 미 괴뢰의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북조선에 머물 예정이랍니다.]
“보라우! 누구의 공작이야? 그걸 알 수 있갔나?”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 부장 양범의 지시라는 거이 이미 다 알려진 사실입네다! 백랑대의 지휘권까지 이미 양범 부장에게 넘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합네다!]
“기래?”
박상식은 환하게 밝아지는 얼굴을 억지로 눌러 담았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께서 부장님을 찾을 거이 분명합네다. 참고하시라고 연락드렸습네다.]
“계속 과업을 수행하라우.”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상식은 과장되게 숨을 들이마시며 창가에 달라붙었다.
“안철호! 조금만 더 참으라! 내래 못했었어도, 남조선의 전사가 다 해냈어야! 기카니까! 조금만 더 참아서 좋은 날을 맞으라!”
시원하게 말을 뱉어낸 박상식이 커다랗게 숨을 토해낼 때였다.
띠르르릉. 띠르르릉.
전화기가 그를 찾았다.
“말하라.”
[위대하신 최고지도자 동지께서 부장님을 찾으십네다.]
“바로 가갔다고 전하라.”
전화를 끊은 박상식은 기다렸다는 듯 모자를 집어 들고 인민무력부장실을 나섰다.
양범의 전화는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받았다.
“고맙습니다.”
[강찬 씨는 그런 말 안 하는 줄 알았습니다.]
넉넉한 양범의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우선 화이트울프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파병하도록 할 예정입니다.]
“혹시 수송기를 이용할 생각인가요?”
[그럴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 데다, 그쪽 상황이 몹시 심각한 것 같으니까요. 더 빠른 방법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더는 다른 요구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지원이었다.
[강찬 씨. 바실리와 통화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곤란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쯤 도움을 청해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시끄러운 헬리콥터 안에서 강찬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가뜩이나 곤란해 한다면서요? 내가 그에게 어떤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중국이 나섰으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이 정도 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떨 때 보면 강찬 씨와 바실리는 성향이 정말 비슷해 보이는데 지금이 꼭 그렇습니다.]
강찬이 피식 웃은 다음이었다.
[우선 미국을 견제하는 것이 최선이라 북한의 파병까지를 점검하고, 라노크 대사님과 우즈만을 만나볼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도움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 석강호가 묘한 기대를 품은 눈으로 강찬을 바라보았다.
“대강 정리된 거면 이제 아프리카 갈 수 있는 거요?”
강찬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 대화는 헬리콥터의 무전을 이용하고 있어서 함께 이동하는 대테러 팀 전원이 듣는다.
그래서 주변의 헬리콥터에 탑승한 대원들은 강찬의 답을 듣지 못했다.
청와대의 벙커 안이 술렁거렸다.
“다시 한 번 말해보세요.”
[중국은 이미 부대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특히, 완벽한 친한파 인물인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 부장 양범이 백랑대의 지휘권을 확보했다는 사실까지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국가정보원 북경 분실장의 말을 들으며 고건우는 마른침을 삼켰고, 문재현은 마이크를 노려보는 것처럼 굳은 채 잠시 말이 없었다.
“다른 내용은 없나요?”
[정보원들에 의하면 미국이 중국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는 말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정보는 아직 정식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테이블에 양팔을 올리고 마이크에 말을 전했던 문재현이 상체를 바로 세웠다.
“들은 바대로 일단 중국이 움직였습니다. 내 짐작이나 여러분들이 예상하는 것이 옳다면 우리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길 겁니다.”
각 부서의 책임자들이 안도하는 얼굴로 문재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물러나더라도 대한민국은 더 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우리 힘만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문재현이 앉아 있는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인재를 키우고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우리의 미래가 제대로 꽃 필 수 있는 나라, 나는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묵직하게 말을 건넨 문재현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상황을 좀 더 주시하고, 미국의 움직임이나 중국의 북한 파병, 그 외에 러시아의 움직임을 확인할 때까지는 이곳에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진 문재현의 지시가 떨어지면서 벙커 안에 조금씩이나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 라우드는 참모들을 모두 밀어냈다.
그리고도 집무실을 한 번 더 둘러본 다음에야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상황을 다시 말해봐.”
[위성과 영국의 발전시설이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그 외에도…….]
“그 외에 또 뭐가 있다고?”
[미국과 이스라엘에 준비 중이던 핵융합 시설에서도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시설들은 이번에 연결하지도 않았던 거잖아!”
대뜸 목청을 높였던 라우드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겨내려는 것처럼 얼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봐, 그라펠트. 내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자네가 포함되었다는 것은 아나?”
[죄송합니다.]
“자, 다시 제대로, 천천히 보고해 주게. 왜 위성에 연결하지도 않았던 미국과 이스라엘의 발전시설에서 문제가 일어났는지.”
[아무래도 통제를 벗어난 위성이 핵융합 발전시설의 블랙헤드에 에너지 간섭을 일으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돌멩이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것 같군. 그냥 통제를 끊어! 전원을 내려버리라고!”
[이미 전원은 차단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블랙헤드가 계속 반응해서 점점 더 열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더는 창을 바라보아도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라우드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자꾸만 가슴을 들썩였다.
“좋아. 최악의 상황은?”
[미국과 이스라엘, 영국에서의 지진이나 핵융합 발전시설의 폭발입니다.]
“갓……!”
욕을 뱉으려던 라우드가 초인적인 의지로 욕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해결 방법은?”
[현재 에너지의 파장이 한국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장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이 고성의 차세대 발전시설을 중단해 주는 것입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뭐라고 요구할 참인가? 사실은 우리가 에너지를 이용해 미스터 강을 제거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다. 그러니 가동을 중단해 달라? 그러기라도 할까?”
그라펠트는 대꾸가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의 그 핵융합 발전시설이 앞으로 견딜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한다면? 그라펠트?”
[이전에 영국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봐서 사흘 정도 여유가 있을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라우드가 퍼뜩 시선을 돌려서 책상 한구석에 있는 일정표를 보았다.
“한국이나 중국으로 지진을 일으키지도 못한다?”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고성의 시설물을 완전히 부숴버리기 전에는 답이 없다는 말이군. 그것도 사흘 내에 말이지.”
[죄송합니다.]
그라펠트의 답을 들은 라우드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이어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우르르. 우르르.
죽음의 물결이 어둠 속에서 일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멀리서 기지를 감싼 채 엎드렸던 적들이 일어나는 모습은 꼭 그런 느낌이었다.
철컥!
노리쇠를 당긴 제라르가 빠르게 무전기 버튼에 손을 올렸다.
치잇.
“적이 움직입니다. 이제부터 공세가 시작될 겁니다.”
무전기 버튼에서 손을 내려놓은 제라르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문바키.”
“Oui!”
“전투 중간에 내가 신호하면 킨샤사로 가서 외인부대에 지원을 요청해라. 가서 정보총국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지원 병력을 끌고 와.”
문바키가 답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이나 되먹지 않은 반항하지 마라. 이 전투는 이번 공세나 다음 공세에 끝난다. 나는 적어도 부상자나 의무팀을 살리고 싶은 거다. 알았나? 문바키?”
“Oui!”
단호하게 지시를 마친 제라르는 적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바키는 해결했다.
그가 돌아오던, 못 돌아오던 그에게 새로운 미래를 선물한 거다.
적들은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몸을 감추고 기다렸다.
저렇게 일어나서 술렁이다가 한순간에 달려든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부터 저 사이에서도 날카로운 사격이 날아오고 있어서 잠시도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준비는 끝났다.
또다시 지옥을 맞이할 준비 말이다.
제라르가 앞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삐이이융-.
RPG가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고,
콰으으응!
폭발이 있었으며,
투두두둑! 투두두둑! 투두두두둑!
요란한 총소리가 시작되었다.
밤에 터지는 총소리는 공간을 밀어내는 느낌으로 달려든다.
푸슝! 푸슝! 푸슝!
제라르는 끝없이 달려드는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아프리카에서의 전투다.
언젠가처럼 혼자 감당하는 그런 전투였다.
강철규는 담벼락 앞의 발판에 올라가 소총을 걸었다.
푸슝! 퍼억! 푸슝! 퍼억! 푸슝! 퍼억!
그는 주로 RPG를 들었거나 자살 폭탄 테러를 위해 달려드는 적들의 이마를 노렸다.
투두둑! 투두둑!
그리고 그의 주변에 유독 북한군 병사들이 몰려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다.
지금 강철규는 뚫린 벽을 지켜내는 상징 같은 인물이었다.
투두두둑! 투두둑!
“그쪽 둘! 저 바깥을 지원해!”
“알갔습네다!”
강철규의 지시를 받은 북한군 병사들이 사명감 넘치는 얼굴로 달려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푸슝! 퍼억! 푸슝! 퍼억!
방아쇠를 당기는 강철규의 이마에서 또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흐른 피는 미간을 타고 흘렀고, 코 옆을 지나 이번에도 눈으로 들어갔다.
푸슝! 퍼억! 푸슝! 퍼억!
강철규는 쉬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면서 강찬을 떠올렸다.
철컥! 철커덕!
탄창을 교체한 그가 다시 적을 향해 총구를 돌렸고,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푸슝! 퍼억! 푸슝! 퍼억! 푸슝! 퍼억!
방아쇠를 당기면 압축된 공기를 던지는 것처럼 뭉툭한 충격이 강철규에게 다가온다.
‘최선을 다했다만, 여기까지일지 모른다.’
푸슝! 퍼억! 푸슝! 퍼억!
두 명을 쓰러트린 강철규가 총구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부슈-웅! 퍼서석!
섬뜩한 총소리와 함께 강철규가 의지했던 벽의 앞이 터져나갔다.
제라르가 경계하던 훈련받은 적의 사격이었다.
떼거리로 달려드는 적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어서 저들을 단번에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쪽에서 용감하게 나선 병사들이 먼저 타켓이 되는 바람에 사기마저 뚝 꺾인다. 그리고 지금 대검을 들고 앞을 막겠다고 나서면 무조건 저격수의 표적이 된다.
사격을 하던 강철규는 슬쩍 몸을 내려 담벼락에 기대고 앉았다.
“선생님!”
혹시나 해서 부르는 북한군 병사들에게 괜찮다고 손짓도 해주었다.
스으응.
그러면서 강철규는 어깨에 걸어두었던 대검을 뽑았다.
비무장지대와 다를 거다.
나무와 풀이 무성한 곳이 아니라, 적들이 바글바글한 지역을 뚫고 나가야 하니까.
그러나 누군가는 저 저격수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와아아-!”
콰으으으응!
강철규가 기댄 담벼락 옆이 커다랗게 터져나가며 파편이 훅 달려들었다. 이것 역시 저격수 때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눈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눈물과 섞여 흘러나왔다.
스윽.
강철규는 팔등으로 눈가를 닦은 뒤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담을 따라 걸었다.
투두둑! 삐이이융! 콰으으응! 투두두둑!
담벼락에 매달려 있던 병사 두 명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군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담벼락에 기대 배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증평의 특수팀 대원도 보였다.
배에 총을 맞았다.
“끄아-아!”
그런 그가 고함을 질러가며 다시 소총을 들고, 담벼락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도 분명하게 보았다.
이곳이 대한민국이라 그렇다.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우리 땅이라서.
이렇게 피로, 눈물로, 그리고 의지로 지켜야 하는 우리 땅.
꿋꿋하게 걸어간 강철규는 전투가 벌어지는 중간 지점의 담으로 움직였다.
통증 따위 없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다시 눈으로 들어가 세상이 온통 붉게 보였는데 그런 것쯤 전혀 상관없었다.
터억! 휘익!
담벼락을 짚은 강철규는 대뜸 몸을 날려 적들 사이로 날아들었다.
그가 봐둔 저격수를 향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