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2부)-80화 (499/520)

제9장.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도. (1)

발전시설은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중앙통제실에 전원이 공급되었고, 5분쯤 지난 뒤에는 경보까지 해제되었다.

강찬이 중앙통제실로 올라갔을 때 김관식은 온몸의 진을 모조리 빨려버린 듯한 얼굴로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대화를 좀 나누었습니다.”

솔직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막상 건네놓고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황당한 답변이기도 했다.

잠시 멍했던 김관식은 허탈한 웃음을 먼저 그려냈다.

“자네라면 그랬을 것도 같네.”

그리고는 강찬의 대답을 적당하게 받아들였다.

“차 한잔 하겠나?”

“그러시죠.”

“괜찮다면 바깥으로 나가세. 찬 바람이 그립군.”

아무리 안정되었다고 해도 잠시 지켜볼 필요는 있었다.

김관식은 한쪽에 마련된 냉장고에서 캔커피 세 개를 꺼내 들었다.

살점이 떨어져서 말을 하는 것도 끔찍한 입안에 커피를 부어 넣는 건 아무리 강찬이라도 지금은 사양할 일이었다.

“저는 물을 마시겠습니다. 그리고 밖에 대원들이 있어서 좀 더 가지고 나가고 싶은데요.”

“그럼 저쪽에 박스에 담긴 걸 들고 나가세.”

석강호가 움직여서 캔커피 상자 두 개를 들었고, 강찬이 비닐로 묶인 작은 물병들을 집었다.

문을 나선 세 사람은 통로를 빠져나가서 대원들이 기다리는 옥상의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나섰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바다 특유의 비린내였다.

사람 참 간사하다.

아까는 저 비린내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대원들이 우르르 강찬과 석강호, 김관식에게 다가왔다.

“대강 안정된 모양이다. 상황을 좀 더 보고 그래도 문제가 없다면 출발하겠다. 여기 커피랑 물을 가져왔으니까 저쪽에서 교대로 쉬면서 담배라도 피우고 있어.”

대원 두 명이 석강호와 강찬이 들고 온 커피와 물을 가지고 한쪽으로 움직였다.

“나도 저쪽에 가 있겠소.”

석강호가 김관식에게 고개로 인사하고는 대원들에게 움직였다.

둘만 남았다.

김관식은 캔커피를, 강찬은 물을 마시며 잠시 고성의 하늘을 보았다.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처럼 실감한 적은 없었네. 그리고 문득 그 생각이 나더군. 자네와 저기 있는 대원들은 매 순간 이런 각오를 필요로 할 텐데 어떻게 저토록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견디는지.”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버튼에 손을 올리고서 백만 번쯤 흔들렸던 자신의 속마음이 말이다.

“청장님.”

김관식이 뒤를 돌아본 뒤에 시선을 가져왔다.

“둘이 있을 때는 아버님이라고 불러야지.”

“미영이가 화가 많이 나서 이제는 안 받아줄 것 같은데요?”

강찬의 농담이었다.

꼿꼿하기만 한 김관식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냈다.

“그 녀석, 고집이 나보다 더 세. 그래서 나는 자네가 좀 불쌍하기도 하지.”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 바람에 둘이서 비슷한 얼굴로 웃고 난 다음이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도 충분히 하실 바를 다 하신 겁니다. 자부심을 가지셔도 될 만큼이오.”

“그런가? 먼저 가신 송 청장님을 떠올리게 되더군. 그분이었다면 어떠셨을까, 그런 생각.”

“저는 자랑스러운 모습만 봤습니다.”

“내 속을 봤다면 그런 말 못할 걸세.”

죽음이 코앞을 스쳐 간 뒤라서 그런지 김관식은 평소보다 훨씬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 팀장에게 이곳 상황을 전했으니 청와대에서도 알고 있을 걸세.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될 테니 이만 가보게.”

몸을 돌리던 김관식이 잊은 것이 있다는 것처럼 시선을 가져왔다.

“그리고, 미영이 말이야. 여름 방학 때 시간이 나거든 적당히 어딜 좀 데려가. 한 보름쯤이면 좋겠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김관식의 표정을 보고 나자 제대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어서 뭐라고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래야 그 아이가 또 기다릴 힘을 얻지. 만약 헤어질 생각이라면 그때쯤은 정확하게 선을 그어주고.”

“헤어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다.”

“그럼 여행을 가. 가서 알지?”

강찬의 팔을 다독여준 김관식이 그대로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죽음의 문턱에 다녀오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뭐요? 따귀라도 맞았소? 표정이 왜 그래요?”

김관식이 떠나는 것을 본 석강호가 다가와서 그가 들어간 입구와 강찬을 번갈아 보았다.

“왜요? 미영이 던져뒀다고 뭐라고 합디까?”

날카로운 새끼!

그나마 상상력이 이만하길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

양범은 중국 국가 주석 장택민과 마주 앉았다.

“자네가 왜 구금이 되었는지를 잊어서는 곤란해.”

“한국을 위해 공군을 이용한 것 때문이라면 저를 다시 구금하거나 해임하시면 됩니다.”

장택민은 날카롭게 시선을 드는 것으로 불편한 심정을 표시했다.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꼴입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면 그 이득은 고스란히 미국으로 돌아갈 테니까요.”

“확신이 없잖나?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산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신뢰란 결정적인 위기에 조건 없이 내미는 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범은 삶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아프리카에 투자한 몫을 찾는 일입니다. 정보국의 수장이라는 직책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한국은 앞으로 50년간 성장합니다. 모두 그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자네의 말을 어떻게 신뢰해야 하지?”

“그것이 훗날 평가될 주석님의 능력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장택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은 이번 미국의 공격을 홀로 막아낼 힘이 없어. 그리고 강찬이라는 그 인물도 언제 제거될지 모르고.”

“주석님의 결정이면 상황이 바뀝니다.”

장택민의 볼이 씰룩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새로운 파트너의 손을 잡을 것인지, 이번 위기를 넘기면 더욱 위치를 확고히 할 강자를 상대할 것인지는 주석님께서 결정하시기 나름입니다.”

“흠.”

고민 가득한 한숨이 터져 나온 다음이었다.

“한국이 성장하면 세계정세는 더욱 단단하게 균형 잡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한국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기축통화국이 될 수 있습니다.”

양범의 말에 장택민의 볼이 또 한 번 씰룩했다.

“정말 한국이 그렇게 성장하리라고 생각하나?”

“아프리카에 발전시설이 건설된다면 그 이후쯤은 주석께서도 짐작하시지 않습니까?”

장택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흠칫 양범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본 강찬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인가?”

“조조의 판단력, 장비의 용맹함, 유비의 인품을 지닌 인물입니다.”

“흥!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을 모두 뭉쳐놓았군.”

잠시 탁자에 놓인 찻잔을 노려보던 장택민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좋아! 이왕이면 크게 보여주는 게 좋겠지. 북한에 50만 파견과 아프리카에 50만, 그리고 함정 30척, 전투기 100대, 수송기와 연료 공급기, 백랑대 전원의 명령권을 부여하겠다.”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양범이 다부지게 답을 한 다음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그를 한번 볼 수 있겠나?”

장택민이 짧은 요청을 건넸다.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가 그 책을 읽었기를 바라지.”

양범의 난처한 표정을 본 장택민이 그럴 것 같았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

치잇.

“10분 정도 간격입니다.”

적들의 공세가 한순간에 그치고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를 때, 제라르의 무전이 들어왔다.

이곳에서 제라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10분쯤 된다는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기 위해 부상병을 뒤로 끌어냈고, 사망자를 한쪽으로 옮겼으며, 무너진 곳에 흙자루를 쌓았다.

부르르릉!

또 그 틈을 이용해 트럭이 달려와 씨레이션과 물을 상자째로 바닥에 던지고 바쁘게 달렸다.

“빨리들 먹으라우!”

북한군 소위의 고함이 아니어도 적이 들이닥치기 전에 먹어야 한다는 것쯤 다들 알았다.

씨레이션 박스를 급하게 뜯어 던지고 건네는 동안, 이번엔 용성부대 대원들이 달려왔다.

“저쪽을 먼저 치료해.”

다들 급했다.

어깨에 총을 맞은 강철규와 옆구리와 팔뚝을 다친 곽철호는 병동에서 나온 상태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허벅지가 뚫려 움켜쥔 북한군 병사와 배를 감싸 쥔 채 옆으로 쓰러진 북한군 병사에게 의료팀을 보냈다.

“식사하십시오! 선생님!”

비무장왕이다.

북한군에게는 이가 갈릴 정도로 나쁜 기억을 남겼던 비무장지대의 전설인 거다.

그런데도 대원들은 강철규에게 존경심을 내보였다.

“고맙다.”

“별말씀을 다하십네다.”

미치는 것은 나이가 어릴수록, 그리고 전투경험이 부족한 병사일수록 진심으로 존경하는 눈빛과 태도로 대한다는 것이었다.

“물을 빠트리믄 어쩌자는 거네?”

그 와중에 북한군 소위가 물병을 들고 슬쩍 다가왔다.

“보라우! 날래 와서 식사하기요!”

곽철호를 향해 고갯짓을 하는 그의 목과 어깨, 옆구리, 허벅지에도 칼에 베여 피가 엉겨 있었다.

힘겹게 다가오는 곽철호 역시 목에 감은 붕대에 피가 잔뜩 배어 나온 모습이었다.

“그 보라. 기케 다칠 거믄서 어째 그리 뛰어나왔네?”

“죽을 걸 살려놨더니, 차라리 죽게 놔둘 걸 그랬나?”

“뭐이라?”

“시끄러. 얼른 앉아서 먹어.”

강철규와 곽철호의 중간에 앉던 소위가 문득 생각난 게 있다는 것처럼 홱 고개를 들었다.

“기카고 자꾸 한 살 가지고 뭐라 하갔나?”

곽철호는 대꾸 대신 피식 웃고 나서 손으로 주무른 비빔밥을 입에 넣었다.

우걱우걱.

길게 이야기할 시간 없다.

바쁘게 넣어야 한다.

흙자루도 쌓아야 하고, 무기와 탄약도 챙겨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었다.

1분쯤 지났을 때 라면봉지 크기의 비닐팩에 담긴 비빔밥을 다 먹었다.

“얼른 하나 더 먹어.”

곽철호가 옆에 두었던 씨레이션 하나를 더 집어주었다.

“내래 길거지가 아니야.”

“부상 때문에 못 먹어서 그렇지, 평소라면 나도 세 개는 먹는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하나만 먹으면 대원들이 눈치 보느라 더 못 먹어. 그러니까 배가 찼어도 너는 더 먹는 게 맞아.”

“기래?”

“얼른 먹으라니까.”

곽철호가 건넨 비빔밥을 받아든 소위가 급하게 수저를 놀렸다.

“형밖에 없지?”

“에이!”

거친 말을 쏟아내려던 소위가 강철규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강철규가 짓는 미소를 처음 보았다.

경험의 차이다.

죽은 동료들, 죽어가는 동료들 틈에서 살아있는 자가 배불리 먹는 죄책감을 덜어줄 수 있는 능력은 오롯이 경험에서만 생겨난다.

강철규는 이제 후배들을 믿을 수 있다는 만족감에 미소 지었다.

‘일규야. 이제 정말 우리의 꿈이 이루어졌나 보다.’

물을 마시는 척하며 강철규는 남일규가 있을 어두운 하늘 저 끝을 바라보았다.

“동식이 녀석은 잘 있더냐?“

어쩐지 양동식의 뻔뻔한 웃음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제라르는 대원들과 함께 산의 언덕 중간에 있었다.

비스킷과 초콜릿, 압축 포장된 샌드위치로 식사를 마쳤고, 의료팀이 건네준 약품으로 상처를 대강 감았으며, 중상자들을 의료팀 차량으로 후송했다.

엄청난 전투였다.

이렇게 앉아서 비스킷을 먹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기적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후우.”

바위에 등을 기댄 자세로 앉은 제라르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낼 때였다. 식사를 마쳤는지 문바키가 물병을 들고 다가왔다.

녀석의 눈에 담긴 독기를 보며 제라르는 추억이 잔뜩 묻어난 미소를 그려냈다.

언젠가 죽음을 직감한 강찬이 제라르를 떠나보냈던 날쯤의 추억이었다.

다른 사람 아닌 강찬이다.

전투에 빠지는 것을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외인부대 특수팀을 지휘하며, 그는 별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며 악착같이 제라르를 밀어냈었다.

죽을 줄 알고 그랬던 거였다.

강찬이 지닌 특유의 감각이 그에게 알려주어서 그랬던 게 분명했다. 매달리고 매달렸던 제라르를 보낸 강찬은 다예를 데리고 죽음의 전투를 택했다.

왜 그랬을지 수도 없이 생각한 끝에 얻은 결론은 바로 병아리와 문바키였다.

외롭고, 어딘가 빈 눈빛을 볼 때면 제라르 역시 마지막 순간에는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단이 늦어서 병아리는 먼저 떠났고, 문바키는 아직 이렇게 남았다.

“물 드십쇼.”

제법 전투 대원 말투를 흉내 내는 문바키를 보며 제라르는 말없이 물병을 받았다.

“나 지금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만 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잘하는 대원으로 보였을 거다.”

어디서 묻혔는지도 모를 검댕이를 볼과 이마에 잔뜩 묻힌 문바키가 기쁜 얼굴로 웃었다.

“나중에 대장을 만날 때 당당한 대원으로 서고 싶습니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아라. 그때는 분명 그렇게 돼 있을 거다.”

물을 마신 제라르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강찬이 그리웠다.

잠시 뒤에 다시 시작될 이 지옥 같은 전투라도 그와 함께할 수 있다면…….

대장.

UIS 틈틈이 특수부대원 놈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다음번 공세는 어찌 넘겨도 두 번은 못 견딜 겁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도 한국에서 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대장 곁에 있었으면 싶습니다.

제라르의 시선에 걸린 어두운 하늘이 잠시 뒤에 있을 죽음을 숨죽이며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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