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쇼가 시작될 시간이군. (2)
프레이져는 타는 듯한 갈증에 물병을 집어 들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게겐 역시 방금 전에 물 한 병을 모두 마시고도 입맛을 다셨다. 그도 게겐만큼이나 계속해서 갈증을 느낀다는 의미였다.
CIA의 계획에 지원했고, 실험을 통과한 전사다.
그 실험을 거친 이후로 세상이 붉은색에 물든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강찬의 근처에 다가가면 이렇게 견디기 힘든 갈증을 느꼈다.
마음 같으면 지시를 무시하고 달려들고 싶다.
강찬의 머리를 부수고, 그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움켜쥐고 싶은 거다.
특수 훈련을 받으면서, 수많은 작전에 나서서도 느끼지 못했던 살인 충동이 강찬의 반경 안에 들어가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다가왔다.
마른침을 삼킨 프레이져가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이번 실험을 함께 거친 대원 네 명이 붉어진 눈으로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성과 의식이 좀 더 흐릿한 대원 넷이다.
당장 프레이져를 물어뜯고서라도 달려가고 싶은 욕망이 그들의 눈과 입 주변에 잔뜩 올라와 있었다.
“크으-!”
심지어 한 놈은 맹수 같이 으르렁대기까지 했다.
얼른 명령이 내려왔으면 싶었다.
남일규를 노리던 대원들을 죽일 때의 강찬을 프레이져는 분명하게 보았다.
가게 밖에서 펄펄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기다린다. 이번은 버린다.]
대원들은 이성이 부족했다.
그만큼 판단도 떨어진다.
방아쇠를 당겼어야 할 그 좋은 기회를 멍청하게 날린 거다.
그리고 강찬이 달려왔을 때 프레이져는 실제로 피가 펄펄 끓어서 몸뚱이가 타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기에 휩싸였었다.
강찬은 그와 게겐, 그리고 대원들을 자극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2조의 승합차에 탄 대원들 역시 프레이져와 비슷한 심정으로 강찬을 노리고 있을 거였다.
한국의 국가정보원 대테러 팀? 특수 요원?
프레이져가 보기에는 애송이 수준이었다.
남일규의 한방에 놀라기는 했다만, 그거 이성과 판단력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프레이져와 게겐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무조건 제거하고 강찬의 목도 땄을 거다.
***
라우드보다 먼저 일본에 도착한 사무엘은 첫날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숙소인 맥시멈 호텔의 특실에 앉았다.
몸은 불에 올려진 치즈처럼 축축 늘어지는데 정신은 물을 맞은 셀러리처럼 말짱하기만 했다.
특실이다.
침실 세 개짜리 방, 거대한 욕조가 있는 욕실과 별도의 화장실 두 개, 거실이 있는 사무엘의 공간을 나서면 다시 바깥에 거실과 수행원과 경호원들이 묵는 방 여섯 개가 있다.
하여간 누구라도 사무엘이 있는 곳에 오려면 경호원과 수행원이 있는 공간을 거쳐야만 하는 거다.
탁자에 있던 태블릿을 든 사무엘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일정표를 펼쳤다.
“미국의 이익에 충실한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그는 마지막에 보았던 라우드의 말과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미국의 이익에 충실한 여행?’
분명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통상적으로 전하던 ‘신의 가호를 바란다.’라거나 ‘좋은 여행이 되길 빈다.’가 아니라, 라우드는 분명하게 ‘미국의 이익에 충실한 여행’이길 바랐다.
일정표에는 이상이 없다.
경호나 안전에도 문제가 보이지는 않았다.
“후우-!”
정장 바지와 셔츠 차림의 사무엘은 등을 뒤로 기대고 소파의 등받이 위에 오른팔을 길게 걸쳤다.
스웨이든과의 접촉까지 알고 있었던 라우드였다.
“멍청한 인간 같으니!”
지금껏 연락조차 없는 걸 보면 그의 최후쯤 사무엘은 짐작하고 남았다.
혹시나 라우드가 자신까지 제거하란 것은 아닌지 염려했던 사무엘은 걱정을 털어내기로 했다.
일본에서의 일정을 마치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면 끝이다.
팔을 내린 사무엘이 태블릿을 탁자에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파앗.
한 줄의 하얀 빛줄기가 가운데를 가로 지르더니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가 화면 가운데 떠올랐다.
사무엘은 어쩐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행은 어떻습니까? 사무엘?]
태블릿의 다음 화면에 나타난 것은 라우드였다.
책상에 앉은 그는 깍지 낀 두 손을 앞으로 올리고 태블릿의 정면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미국은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기축통화를 위협하는 중국의 성장, 유럽의 단일화, 그리고 무엇보다 위협적인 한국의 성장이 그것입니다.]
사무엘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 일인지 경호원과 수행원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거다.
“아무도 없나? 미첨! 미첨!”
[사무엘.]
그의 행동이 못마땅하다는 것처럼 라우드가 사무엘을 불렀다.
[당신의 희생이 미국의 명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중국과 북한을 자극할 것이며, 전쟁을 통해서 다시 강해진 미국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미친 인간이!”
태블릿을 던지다시피 한 사무엘이 거실을 나서는 문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철컥! 철컥!
문은 잠겨 있었다.
쾅쾅쾅쾅! 쾅쾅쾅쾅!
“미첨! 이봐! 밖에 아무도 없나! 이봐!”
고함을 지른 사무엘이 소파 옆 협탁의 전화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그리고 몸을 움직인 직후였다.
[신의 가호가 당신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태블릿 안에서 라우드가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사무엘이 급하게 전화기를 집어드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그의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곧바로 화끈한 열기가 그의 거실을 가득 메웠다.
콰아아아앙!
귀를 찢을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 곧바로 터졌다.
섬뜩한 불덩이가 호텔 12층에서 어두운 허공을 향해 뿜어져 나왔고,
파사사삭!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호텔 앞 도로에는 충격에 놀란 자동차들이 뒤엉켰고, 웅크린 사람들과 쓰러진 사람들이 즐비했다.
위잉위잉. 삑! 삑!
바깥 경비를 맡은 경찰이 주변을 통제할 때는 맥시멈 호텔의 12층에서 피어난 검은 연기가 굵직한 모습으로 외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여자들, 황당한 얼굴의 남자들이 몰려들어 위층을 바라보는 사이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경찰, 소방차, 그리고 경찰 특공대의 차량들이 달려들었다.
***
고건우와 헤어진 강찬은 미사리에서 멀지 않은 삼성동의 호텔로 향했다.
앞과 뒤를 승합차에 탄 대테러 팀 대원들이 지키고, 바로 뒤를 다시 승용차에 탄 요원들이 지켜준다.
강찬은 마른침을 삼키며 창밖을 노려보았다.
하늘을 나는 전투기처럼 빠른 속도로 엄청난 위기가 강찬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거다.
전에 없이 갈증이 날 정도였다.
강찬은 견딜 수 없는 불안함에 전화기를 꺼내 들고서 번호를 눌렀다.
[무슈 강.]
“대사님. 강찬입니다.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도착할 때까지는 객실에서 나오지 마시고, 경호 요원들과 함께 계십시오.”
프랑스 말이다.
그런데도 석강호와 최종일이 돌아볼 정도로 으르렁대는 것처럼 들렸다.
[또 위기를 느낀 모양이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서두르기보다는 무슈 강의 안전을 확인하면서 와 주었으면 싶군요.]
라노크는 강찬을 다독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샹송처럼 부드럽게 전해주는 프랑스 말이 그렇게 느껴졌다.
“대사님. 금방 도착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노크의 부드러운 음성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강찬은 아직 불빛이 꺼지지 않은 빌딩 사이로 시선을 들었다.
아프리카에 병력을 파견해야 한다.
그러나 정보총국장 에르완이 수를 쓴 게 확실한 지금은 강찬의 요청이 먹힐 리 없는 거였다.
‘부탁한다. 견뎌라. 내가 바깥쪽부터 전부 죽이고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에르완의 농간이 아니고는 아프리카의 그 수상한 병력의 이동이 보고 안 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지금 장갑차나 헬리콥터의 지원이 없을 수도 없고.
강찬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어두운 하늘에서 시선을 내렸다.
***
반둔두 기지는 반경이 꽤 넓었다.
제라르가 앞쪽을 지키고 있고, 용병들을 곳곳에 배치했다고 하지만, 용병들 없이 북한군 병력들만 지키는 구역도 많았다.
우르르.
무릎을 꿇은 채로 몸을 숙였던 이들이 다시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먼지를 흩날리며 몸을 일으켰다.
여자들은 검은 부르카를 온통 뒤집어써서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아이들은 회색옷에 짙은 색 조끼를 걸쳤다.
굶주리고 먼 길을 와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들의 짙은 눈썹과 긴 속눈썹이 어쩐지 송아지의 눈처럼 보여서, 한없이 맑은 대신에 언젠가는 도축장으로 끌려갈 미래를 담은 것처럼 슬퍼 보이기도 했다.
북한군은 이들을 처음 본다.
부르카를 입은 여인이 순진하고 부끄러운 기색의 남자아이 손을 잡고 다가오고, 뚜렷하고 짙은 이목구비를 지닌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다가와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고향에 두고 온 아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굶주림과 총에 대한 두려움이 어린아이들의 눈에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멈추라!”
10미터 앞까지 다가온 여자와 아이들을 향해 고함이 날아갔다.
몇몇은 품에 두었던 빵과 과자를 만지작거리기까지 했다.
던져 주면 받을까 하는 순진한 상상까지 했다.
여자와 아이들은 멈추지 않았다.
5미터쯤까지 다가왔을 때 분위기가 묘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투두두둑!
북한군 지휘관이 허공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어둠 속 총구 끝에서 불꽃이 피어났고, 둔탁한 소총 소리가 침묵을 찢어댔다.
“멈추라우! 더 가까이 오면 갈기갔어!”
말뜻은 몰라도 의미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쭈뼛! 쭈뼛!
그래도 여자와 아이들은 멈추지 않았다.
투두두둑! 투두두둑!
“멈추라지 않네!”
고함이 다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쪽을 책임진 지휘관은 여자아이의 눈에 매달린 눈물을 보았다.
치잇.
“경고 사격 후에도 다가오면 사살하라우! 시간 끌지 마라!”
두 번의 총소리를 들었는지 안철호의 무전이 바로 들어온 직후였다.
화아악!
여자가 아이를 밀치고는 단박에 앞으로 달려들었다.
“알라후 아크바르!”
찢어지는 듯한 여자의 외침이 크게 울린 다음이었다.
콰으으응! 콰으응!
두 번의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고,
삐이이이융! 삐이융!
알라의 요술봉이라는 RPG가 연달아 그곳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으응! 콰아아앙!
담벼락이 커다랗게 부서졌고, 눈과 귀에서 핏물을 흘리는 북한군 병사들의 몸뚱이가 이곳저곳에 흩어졌다.
“와아-아!”
투두두둑! 퍼버버벅! 투두둑! 퍼서석!
반둔두 기지를 향해 물밀 듯이 적들이 달려들었다.
총소리와 동시에,
삐이이융! 콰으으응! 삐이이잉! 콰아아앙!
RPG가 연달아 날아왔고,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다당! 터엉! 삐이이-.
언덕을 지키던 용병들의 기관총 소리와 박격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푸슝! 퍼억! 푸슝! 퍼억! 푸슝! 퍼억!
증평의 대원들이 위기에 몰린 지역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으며,
투두두둑! 퍼버버벅! 투두두두둑! 퍼버벅! 투두둑!
북한군 병력이 여자와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총구를 돌려가며 방아쇠를 당겼다.
삐이이이융! 콰으으응! 삐이이융! 콰으으응!
RPG가 날아들 때마다 벽이 커다랗게 터져나갔고, 서너 명의 북한군 병사들이 하늘로 높게 떠올랐다가는 바닥에 처박혔다.
“간나 새끼들!”
투두둑! 퍼버벅! 투두두둑! 퍼버버벅!
눈이 뒤집힌 안철호가 연신 방아쇠를 당겼는데 그의 총구 앞으로 둑이 무너진 것처럼 적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삐이이-. 콰으으응!
저 멀리서 박격포가 터졌고,
타다다다다당! 타다다당!
기관총이 연신 떨어졌다.
삐이이이융! 삐이이융!
그리고 그 언덕을 향해 RPG가 연신 날아갔다.
투두둑! 퍼버벅!
부르카를 뒤집어쓴 여자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몸뚱이가 뒤로 휙 날려갔으며,
“꺄아아-!”
돌고래 같은 비명과 함께 다이너마이트를 안은 아이들이 달려왔다.
투두두두둑! 퍼버벅! 콰으으으응!
총을 맞은 아이가 널브러지고, 품고 있던 다이너마이트가 거칠게 터지며 주변을 휩쓸었다.
푸슝! 퍼억! 푸슝! 퍼억!
증평의 특수팀이 저격수 역할을 대신하며 악착같이 RPG를 막았고, 죽은 동료들을 당겨낸 북한군 병사들이 담벼락에 매달렸다.
회색의 옷들이 이리저리 몸을 감추었다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다이너마이트를 품에 안은 아이들이 함께 달려들었다.
박철수는 뒤쪽에 있었다.
전투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 밀리는지를 확인해서 병력을 지원해야 했고, 유독 RPG 공격이 많은 지역에 증평의 대원들을 보강해줘야 해서였다.
강찬은 늘 아프리카의 전투를 모른다고 말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지옥이라는 표현을 달기도 했었다.
아이가 다이너마이트를 달고 뛰어오고, 여자가 부르카 안에 RPG를 감추고 달려드는 곳, 그런 여자들이 찢어질 듯한 “알라후 아크바르!”라는 외침과 함께 아이를 총알 앞으로 들이미는 곳, 아프리카의 전투가 정말 이런 것인 줄 박철수는 처음 알았다.
이런 지옥 같은 전투를 겪고도 과연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치잇.
“차동균! 3번 초소를 지원해!”
박철수가 유독 밀리는 지역을 확인하고 무전을 마친 순간이었다.
“그곳엔 내가 가겠습니다.”
익숙한 음성이 붙들어서 박철수는 고개를 돌렸다.
강철규와 곽철호, 그리고 병동에 있어야 할 대원들이 완벽하게 무장을 갖추고 서 있었다.
“장군님.”
강철규가 단단하게 불렀고,
치잇.
“차동균! 3번 초소는 이쪽에서 따로 지원하겠다.”
박철수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무전기에 지시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