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난 잘 지낸다. (2)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자정이라면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떤 음모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강찬은 전화기를 들어 고건우의 번호를 찾았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다음이었다.
[부원장. 지금 청와대에서 나온 길입니다.]
“원장님. 잠시 뵙고 싶은데 이후 스케쥴이 있으신가요?”
[두 개의 짧은 회의가 있기는 한데 뒤로 미룰 수 있습니다. 지금 어디인가요?]
“사무실입니다.”
가뜩이나 숨통이 막히던 참이었다.
“괜찮으시면 미사리 쪽에서 뵙는 건 어떻겠습니까? 길이 막히지 않아서 금방 도착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하지요. 장소는요?]
“카페에 쭉 몰려가면 영업을 방해하는 꼴이 되겠지요?”
그냥 던진 말인데 참 오랜만에 고건우의 웃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 조정경기장으로 출발하세요. 내가 그쪽에 카페를 알아봐서 가능한 곳이 나오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예. 그럼 미사리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순간에 최종일과 우희승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석강호는 재킷을 집어 들고 있었다.
당연한 일인데 그걸 보면서 강찬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갑갑한 사무실을 나가서 오랜만에 야외에 앉을 수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함께 움직이는 대원들이 승합차 안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그만큼이나 좋았다.
“미사리 조정경기장으로 출발하고, 중간에 목적지가 바뀌면 그리 간다.”
강찬의 지시를 들은 최종일이 무전기에 대고 지하에 대기하던 요원들과 대원들에게 명령을 전했다.
역시나 무전기와 권총을 몸에 건 강찬과 석강호가 사무실을 나섰다.
박진우는 동기와 함께 사거리 횡단보도 근처에 있었다.
강찬이 알려준 대로 7미터 간격을 유지했고, 시계나 전화기를 보는 척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을 살피고,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을 훑었으며, 편의점이나 식당, 그 외에 상점 앞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사람들을 살폈다.
치잇.
“2호 경계.”
VIP로 부르는 국가정보원 원장이 근처에 접근했다는 의미의 무전이 들어와서 박진우는 좀 더 날카롭게 주변을 살폈다.
살면서 대한민국과 태극기, 그냥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군인은 군인대로, 경찰은 경찰대로 적당히 알아서 사는 줄 알았고, 국가정보원쯤 대강 비밀스러운 임무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말이다.
특수 요원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임무를 맡으면서 박진우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유라시아 철도, 국제빌딩 테러, 그 밖에 자살 폭탄 테러 등,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나 보았던 일련의 일들 뒤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국가정보원 현관을 들어서서 정면 벽에 붙어 있는 별의 숫자가 의미하는 바도 분명하게 알았다.
박진우는 선배들이 들려준 강명구 대테러 팀장과 엄지환 선배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마지막까지 좌표를 불렀다는 특수 요원의 전설 엄지환 선배 같은 특수 요원이 되겠다고, 그래서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될 거라고 다짐했다.
그때였다.
치잇.
“VIP 이동이다. 요원들은 각자 지정된 장소에서 이동한다.”
정신이 번쩍 드는 무전이 들어왔다.
박진우는 후다닥 횡단보도에서 골목 안쪽에 있는 승합차로 달렸다.
***
그라펠트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느닷없이 철수했습니다. 당장은 타겟이 어디로 움직였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설마? 그가 이 계획을 눈치챘다고?
그는 책상 한쪽에 놓아두었던 서울의 지도를 책상 가득 펼쳤다.
“위원장은? 위원장의 이동을 확인할 수 있나?”
[그쪽에도 관광 중입니다. 확인되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알았다. 위원장의 움직임을 보고 판단하겠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그라펠트는 지도 위에 다시 A4 크기의 서류를 하나 올려놓았다.
라우드가 방한하기 전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건우 국가정보원장은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아프리카의 계획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거다.
강찬이 알아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 그라펠트는 그걸 계획했고, 바로 직전까지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젠장!”
어떻게 된 인간이 단 한 번을 그냥 얻어맞아 주는 법이 없는 거다.
마음 같아서는 이 밤에라도 확 위성을 작동시켜서 강찬을 제거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리고 치사하게도 이런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이상하게 목이 눌린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힌다. 어쩐지 강찬이 뻗어낸 손이 바로 턱밑까지 다가온 것처럼 말이다.
띠르르르. 띠르르르.
그라펠트는 생각을 뚝 끊고 전화기를 얼른 들었다.
“상황은?”
[위원장도 지금 이동했습니다. 장소는 서울 외곽으로 추측되고, 아무래도 타겟과 접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라펠트는 이를 꽉 깨물었다.
“관광객은 전원 비상 대기한다. 타겟이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5분 거리를 유지해라.”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라펠트는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
제라르는 흙길을 가득 메운 행렬이 제대로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기관총을 걸어둔 용병 두 명이 언제고 발사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만약 저 숫자가 일제히 달려든다면 이곳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네로! 이곳에 박격포와 RPG를 준비하고, 대원을 두 명씩 더 배치해.”
“Oui!”
네로가 바쁜 걸음으로 아래로 움직였다.
날카로운 제라르의 눈빛이 절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보총국은?”
“특별한 보고가 없었다는 답이었어요.”
제라르의 질문에 문바키가 답을 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너는 본부로 들어가. 그곳에서 정보총국과 한국의 국가정보원과의 연락을 맡아라.”
망설이는 눈빛으로 답을 하지 못하는 문바키를 제라르가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문바키! 어떤 상황에서도 지시를 받으면 반드시 답을 해라!”
“Oui, capitaine!”
“대강 봐도 40만이 넘는다. 저 인원이 일제히 달려들면 우리는 버티기도 쉽지 않아. 그러니 정보총국에 연락해서 외인부대의 지원을 요청하고, 국가정보원과 대장에게 연락해. 알았나?”
“Oui.”
전투에서 밀려난 것이 서운한 것처럼 문바키는 풀죽은 답을 꺼내 놓았다.
“보고를 마치고 나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곧바로 전투를 지원한다. 그럴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기관총 앞에 대기하던 대원 둘이 고개를 돌릴 정도로 문바키의 답은 다부지게 나왔다.
***
저녁 8시면 통제되는 미사리 조정 경기장으로 승합차, 강찬이 탄 승용차, 요원들의 승용차, 그리고 다시 승합차가 방향을 틀었다.
입구에 세워진 초소에서 대테러 팀 대원이 무전으로 신분을 확인했고, 최종일이 무전으로 답했다.
어지간한 신분증을 내보이는 것보다는 이런 방식이 가장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초소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앞쪽에 있던 승용차에서 고건우가 내리고 있었다.
이두희가 고건우의 승용차 옆으로 차를 세워서 강찬이 오히려 마중을 받는 모양새가 나왔다.
“부원장.”
지친 기색에서도 고건우는 반가움을 한껏 담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이어서 석강호의 손을 잡았던 그가 최종일, 이두희의 인사를 받았다.
“위쪽에 제법 풍경이 괜찮던데 그리로 갈까요?”
“원장님. 괜찮으시면 여기 대원들과 이곳에서 함께 있고 싶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쓰니 부원장에게 늘 인기에서 밀리나 봅니다. 그런 좋은 의견은 한 번쯤 슬쩍 알려주세요.”
고건우가 넉넉한 얼굴로 강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최종일. 대원들 전부 내리게 하고, 돌아가면서 좀 쉬어.”
강찬의 지시에 최종일이 무전기의 마이크를 눌렀다.
주차장에서 계단 서른 개쯤을 올라가면 조정경기장이 내려다보이는 잔디밭이다. 그러나 강찬은 그곳을 마다하고 주차장과 매점 사이에 놓인 나무 탁자에 앉았다.
무엇보다 즉흥적으로 왔기 때문에 강 건너편의 경계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걸 빤히 아는 대원들이 절대 마음을 편히 갖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쩔걱쩔걱.
승합차만 네 대다.
완전히 무장한 대테러 팀 대원들만 거의 40명에 달하고, 정규 요원들 10여 명에 오늘 실습 나왔다는 요원들이 또 10여 명 바깥에 섰다.
어떻게 준비한 건지는 몰라도 최종일이 커피 두 잔과 녹차 한 잔을 가져왔다.
“바람이 좋군요. 얼마 만에 이런 여유를 가져보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하늘과 강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반대편 주차장을 둘러보며 고건우가 던진 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빌딩 사이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상쾌한 공기가 지친 삶을 위로해주는 느낌마저 들었다.
시선을 내린 고건우는 이번에 주변을 둘러싼 대원들과 요원들을 돌아보았다.
“어떤가요? 아프리카나 그밖에 전장에 나가면 이런 식으로 쉬게 되나요?”
“이것보다는 좀 더 자유롭습니다. 적당히 걸터앉기도 하고 담배도 하나씩 피우고. 아무래도 다음 전투 전에 최대한 긴장을 풀어야 하니까요.”
“그럴 때 배고픈 사람들은 씨레이션을 먹기도 하지요.”
설명을 더하고 싶은 것처럼 석강호가 끼어들어서 결국은 전공을 들고 나왔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우리도 전장을 한번 느껴볼까요?”
뜻밖의 말을 한 고건우가 시선을 돌려 요원 한 명을 바라보았다.
“무전으로 인사한 것 같은데? 특수 요원 윤장훈이라고 나와 함께 움직이는 친구입니다.”
윤장훈이 고개를 숙여 강찬에게 인사한 다음이었다.
“우리 좀 편안하게 있고 싶은데? 이럴 때 대원들이 담배도 하나 피우고 라면도 하나씩 먹고 말이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시선을 돌려 강찬을 보았던 윤장훈이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그렇다면 최소 요원만 남기고 말씀하신 대로 휴식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쩐지 최종일보다 직급과 경력이 높아 보이는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편을 향해 움직였다.
“그래. 어쩐 일입니까?”
본론이 나올 차례였다.
강찬은 우선 양범의 복귀와 아프리카의 이상한 징후, 그리고 프랑스의 반응을 순서대로 설명했다.
대원들과 요원들이 근처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물을 마시고 있어서 정말 전투를 마치고 중간에 얻은 짧은 휴식 같은 느낌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무언가 수상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호텔에서 청와대까지 두 번의 이동이 예행연습을 거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고건우는 입을 오므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미국 대통령이 스스로 위험을 자초할 일이 있을까요? 그때는 분명 단독 이동인데요? 더구나 그 외의 일정에 대해 함구하고 있어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도 우리에게 책임을 추궁하기 어렵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갑갑한 상황입니다. 그들의 속을 전혀 알 수 없으니까요.”
고건우가 강찬의 눈을 또렷하게 들여다보았다.
“부원장은 그 두 번의 이동이나 방한 기간 중에 반드시 사고가 있으리라고 판단하는 거군요.”
“만약 아프리카에서 염려하는 이동이 이슬람 반군들이고, 이번 방한에 맞춰 움직이는 거라면 절대로 쉽게 생각해서는 곤란한 일입니다.”
“흠.”
고건우가 쏟아낸 깊은 한숨을 낚아챈 바람이 도망치듯 강을 향해 달렸다.
“솔직히 아프리카의 행렬은 물론이고, 두 번의 이동이 수상하다는 것까지는 생각조차 못 했었습니다. 아프리카 계획을 지원하고, 방한에 따른 협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그는 솔직하게 지금의 상태를 먼저 털어놓았다.
“부원장. 내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그리고는 강찬을 똑바로 본 채 남은 말을 건넸다.
“내일부터 미국 대통령이 돌아갈 때까지 국가정보원 대테러 팀과 특수 요원 전원, 그리고 606과 35여단의 지휘권을 갖고 싶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고건우가 저쪽의 넓은 주차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한 식구들이다.
특수부대에서 함께 훈련하고, 어차피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라 대원들과 요원들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건우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606과 35여단이 서울과 청와대의 경비를 목적으로 창설된 군대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까?”
강찬의 얼굴을 본 고건우가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거기에 국가정보원의 대테러 팀과 요원들까지 부원장이 지휘권을 가지게 되면 막말로 쿠데타를 일으켜도 경호실을 제외하면 그 앞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부원장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어쩐지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고건우가 다시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대통령님의 결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다시 청와대로 가봐야겠군요.”
“주무시지 않겠습니까?”
질린다는 표정을 한 고건우가 짓궂은 얼굴로 고개를 저어서 강찬과 석강호가 픽 하고 웃고 말았다.
“전화를 먼저 해보는 게 좋겠지요?”
아예 보는 앞에서 전화기를 꺼낸 고건우가 번호를 누르고는 잠시 기다렸다.
“나 고건웁니다. 대통령님을 긴급하게 뵐 일이 생겼는데?”
강찬에게 시선을 주었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그 시간에 도착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가 전화기를 통해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간 반쯤 시간이 남는데? 우리 라면이나 먹을까요?”
“푸흐흐.”
고건우가 “우리 먹을 라면이 있을까?” 라고 소리 지르자, 윤장훈이 서둘러 한쪽으로 움직였다.
“부원장. 대통령님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미래는 미래를 짊어질 사람이 결정하는 게 옳습니다. 물러갈 세대가 넘겨줄 것은 경험과 조언밖에 없습니다. 그런 뒤에 책임이 남는다면 그건 지금 이 결정을 찬성한 나의 몫이 될 겁니다.”
이제는 완벽하게 정보국 책임자의 얼굴을 가진 고건우가 정말 멋진 눈으로 강찬에게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