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시작해볼까? (1)
전대극과 김태진은 정확하게 오후 3시에 도착했다.
악착같이 따지면 한 15초쯤 먼저 들어온 수준이었다.
사는 게 뻑뻑해지더니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들의 시간마저 인간미가 사라진다.
“발표가 났으니까 나는 이틀 뒤에 아프리카로 출발하겠다.”
김태진은 마치 보고를 위해 온 사람처럼 커피도 나오기 전에 용건을 밝혔다.
“몽골 쪽에서 필요한 인원 몇 명을 선발했고, 오 대표와 함께 건너갈 거다. 계약은 자원청과 유비캅, 그리고 몽골 현지 법인의 3자 형태로 진행할 예정이고.”
“손해 보는 계약은 하지 마세요.”
“살면서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도 되나 싶은데 대신 가족을 팔아먹은 기분이야.”
말을 건넨 김태진이 씁쓸하게 웃으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하긴, 여기만 해도 기러기 하나에 일주에 한 번 겨우 집에 들르는 이두희가 그나마 가장 자주 얼굴을 마주하는 꼴이었으니 말 다 한 거다.
“차세대 발전시설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으니 최선을 다하겠다. 그럼 바쁠 테니까 먼저 일어나지.”
봉지 커피가 앞에 놓일 때 김태진은 아예 몸을 일으켰다.
“차라도 드시고 가세요.”
“1초가 바쁜데 그런 건 나중에 하지. 떠나기 전에 자네와 실장님은 꼭 보고 싶었는데, 마침 실장님도 이곳으로 오신다고 해서 겸사겸사 얼굴 보기 위해 함께 움직인 거다.”
말을 마친 김태진이 손을 내밀었다.
몽골의 거친 바람에 얼굴이 시커멓게 탄 김태진이 이번엔 아프리카로 향한다.
그의 가족이 안아야 할 외로움과 아프리카의 황량한 환경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에게 과연 돈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강찬은 김태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잘 부탁한다. 자네가 없었다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란 거 알지만, 나 역시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탠다는 각오로 뛰어드는 일이다.”
말을 마친 그가 슬쩍 다가와서는 강찬의 오른쪽 어깨를 안다시피 당겨서 다독였다.
굵직한 김태진의 인사가 나쁘지 않았다.
형식적인 서양인들의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그의 손길에 담겨있는 느낌이었다.
“자! 석 선생!”
그는 석강호와도 악수를 나누었고, 이어서 최종일, 이두희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전했다.
김태진이 돌아간 다음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강찬은 어딘가 매달린 서운한 감정을 봉지커피 한 모금에 담아 마셨다.
“경호실의 배치는 모두 끝났다. 이게 그 자료들이고.”
전대극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두 번 접은 A4 용지를 꺼내 강찬 앞에 놓아주었다.
“공식적인 자리는 공항, 그리고 청와대 만찬, 마지막으로 공동 기자회견이 전부다. 도착은 우리 시간으로 내일 13시, 성남공항이고, 2박 3일의 일정을 마친 뒤 오전 10시 성남공항 출발로 되어 있다.”
“이 중간에 스케쥴은 전혀 통보가 안 되어 있다는 말인 거지요?”
“관례로도, 외교적으로도 엄청난 결례인데 이상할 정도로 일정에 대한 통보가 없어. 이렇게 되면 사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미국 측의 과실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텐데…….”
“실장님. 그럼 우리 대통령과의 면담은 이 세 번이 전부인가요? 공항과 만찬장, 공동 기자회견?”
“지금은 그렇지.”
강찬은 확인 차원에서 A4 용지를 들여다보았다.
이건 뭐, 동선이랄 것도 없는 거였다.
성남 공항에서 장충동의 호텔, 그리고 만찬을 위해 호텔에서 청와대까지의 이동, 그리고 다시 마지막에 공동 기자회견을 위해 같은 코스를 움직이는 것이 전부여서 그렇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경호실 적정 인원과 707을 외곽에 배치하고 혹시 이동이 있다면 통보를 해달라는 편이 훨씬 좋지 않을까요?”
“우리도 그럴 계획이긴 한데.”
말을 하던 전대극이 고개를 비틀었다.
“이상하게 감이 좋지 않거든. 그러니 혹시 프랑스 정보총국이나 다른 곳에서 들어오는 첩보나 정보가 있다면 어떤 것이든 바로 좀 알려주고.”
무언가 더 중요한 당부가 남은 것처럼 전대극은 강찬을 향해 분명하게 시선을 주었다.
“솔직히 말하는 게 좋겠지. 사실은 자네에게 미국의 대통령 경호 전체를 부탁하려고 왔다.”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는 것처럼 전대극은 단 한 번에 말을 꺼내 놓았다.
지금껏 듣고만 있던 석강호,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대기하는 최종일과 이두희가 강찬의 눈치를 살핀 다음이었다.
“이번 대통령을 모시는 일은 정말 힘들었었지. 자네 덕분에 끔찍했던 두 번의 위기도 넘겼고. 그런데 이번만큼은 이상하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고작 말 한마디를 쏟아낸 것이 전부였는데 그 직후에 전대극은 폭삭 늙어버린 표정이었다.
“바쁘고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더 염치가 없는 부탁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걸 부탁할 사람이 자네밖에 없다.”
최종일과 이두희 앞에서 경호실장이 꺼내기에 어쩌면 너무나 힘겨운 말인지도 몰랐다. 경호에 자신이 없으니 도움을 달라는 요청은 말이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전대극이 찻잔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강찬을 보았다.
“어차피 나설 생각이었습니다. 대통령님의 지시도 있었구요.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이제 늙었나 보다.”
말을 해놓고도 민망했던지 전대극이 가볍게 웃었다.
“이번 임기가 끝나면 아프리카에 자리 하나 만들어주겠나?”
“늙으셨다면서요? 특별히 하실 일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예끼!”
강찬이 픽 웃었고, 전대극은 실없이 웃었으며, 듣고 있던 세 명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하아! 개운하다!”
숙제를 끝낸 사람처럼 전대극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 선생하고 여기 두 명은 함께 움직일 거지?”
“그래야죠.”
“그럼 경호실에 따로 알려둘 테니까 그렇게 알고, 신분증과 총기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처리하자. 코드명은 어떻게 할까? 갓 오브 블랙필드는 너무 길지 않나?”
테이블에서 문으로 걸어가며 전대극은 생각했던 것들을 쏟아냈고, 마지막으로 질문 한 개를 던졌다.
“부원장으로 하지요.”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오늘 그렇게 통보해 놓지.”
문 앞에 선 전대극이 강찬, 석강호와 연달아 악수를 나누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거, 참!”
테이블로 걸어가는 길이다.
석강호는 알아듣지 못할 탄식을 쏟아내며 담배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쌩쌩하던 양반이 한순간에 저렇게까지 기운이 빠지나? 나이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오.”
혼잣말을 뱉은 석강호가 유리창에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였다.
“나는 아직 괜찮은데? 어떻소?”
“욕먹기 딱 좋은 얼굴인데?”
“에이! 푸흐흐흐!”
석강호의 웃음이 테이블에 놓인 식은 커피 위를 훌쩍 뛰어넘어 사무실 바닥에 흘렀다.
***
양범은 주로 보도 채널을 틀어놓은 채, 신문이나 책 등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한국에서 발표된 아프리카 발전 계획을 생방송으로 보았다.
소파에 앉아 방송을 본 지 30분쯤 지나서 기자회견이 시작되었고, 다시 20분쯤 더 진행되었던 발표가 모두 끝났다.
“엄청난 투자를 했던 아프리카를 고스란히 뺏기게 생겼으니 모려휘의 발등에 제대로 불이 붙었군.”
TV 볼륨을 줄인 양범은 혼잣말을 뱉어내고 조금 전까지 보던 책을 집어 들었다.
잠시 책에 시선을 주던 양범이 검지로 페이지를 막 넘길 때였다.
바쁜 걸음으로 모려휘가 들어섰다.
“부장 동지.”
“말해.”
양범은 시선조차 들지 않았다.
“발표를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모려휘의 말이 다시 나오고서야 양범은 귀찮다는 듯 시선을 들었다.
“이 시간부로 부장 동지의 구금이 풀렸으며, 이전의 모든 권한을 부여한다는 주석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양범이 픽 하고 웃는 순간이었다.
모려휘가 바싹 긴장한 눈으로 그를 살폈다.
“모든 권한을 부여한다는 말이지?”
“분명하게 내려온 명령입니다, 부장 동지.”
고개를 끄덕인 양범은 문앞에 있는 백랑대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놈을 끌고 나가서 제거하고, 시체를 백랑대 훈련장 뒷산에 던져!”
쩔걱쩔걱. 쩔걱쩔걱.
모려휘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백랑대 둘이 다가와 그의 양팔을 꽉 비틀어 잡았다.
“부장 동지!”
“정보부의 부부장이란 놈이 인민의 안위보다 개인의 영달을 챙기고, 그것도 모자라 너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한국과의 관계를 최악으로 만든 것에 대해 벌을 받아야지.”
“억울합니다!”
양범이 픽 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보부란 말이다. 개인의 욕심을 내세우는 순간, 국가의 기둥을 갉아먹는 쥐가 되는 거다. 문제는 그 쥐를 가만두면 계속 새끼를 낳는 데 있지. 그러니 너를 어떻게 해야겠나?”
“부장 동지! 나는 그래도 우리 인민을 위해……!”
“지능이 뛰어난 관리가 사심을 품는 건 무식하고 힘센 놈이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해가 되는 법이다. 치워!”
양범이 단호하게 지시를 내리자 백랑대 두 명이 모려휘를 거칠게 끌고 나갔다.
모려휘가 문으로 끌려나가자 양범은 책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가장 먼저 담배를 입에 물었고, 불을 붙인 다음 전화기를 들었다.
양범의 복귀는 아프리카 개발 계획 발표가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만약 강찬이 모려휘와 사소한 것 하나라도 협조했더라면 중국 정부는 절대 양범을 다시 올려세우지는 않았을 일이다.
신호음이 서너 차례 울린 다음이었다.
“양범입니다.”
양범은 긴장한 얼굴을 들킬까 힐끔 문 앞으로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푸슝! 푸슝! 푸슝! 푸슝!
밖에서 소음 소총의 발사음이 네 번 울렸다.
“별일 아닙니다.”
양범이 재떨이에 담배를 털어낸 다음이었다.
“제가 다시 복귀했다는 것을 알리는 축포쯤 된다고 생각하시면 맞을 겁니다.”
농담처럼 말을 건넨 양범은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를 보았다.
중국 정부가 복귀시킨 것에 대한 전공쯤 들고 가야 양범은 다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잘 됐군요. 그렇다면 중국과의 채널을 열어두겠습니다. 혹시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염치없지만, 아프리카 계획에 중국의 참여를 일정 부분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양범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본국이 오래전부터 투자했던 부분입니다. 대신 필요한 병력을 어느 정도는 지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강찬 씨의 통제를 받는 수준에서입니다.”
[양범 씨.]
“예.”
강찬이 불렀고, 양범이 바로 답을 했다.
[양범 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중국이 참여하고 싶은 부분과 요구 사항을 정리해서 넘겨주세요. 양범 씨라면 적정선을 나보다 잘 알 거라고 믿습니다.]
양범은 전화기에 들리지 않도록 나직하게 숨을 뱉어냈다.
이런 남자와 한 편인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이렇게 변치 않는 남자와 함께했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양범을 제거하지 않고 두었을 것이며, 다시 복귀시켰을 거다.
“고맙습니다.”
[복귀를 환영합니다. 조만간 뵙죠.]
“정리되는 대로 바로 날아가겠습니다.”
전화를 마쳤을 때 백랑대 대원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역시 생기를 다시 찾은 모습이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여 봐야겠지?”
대원 둘의 눈 끝에 웃음이 달렸다.
“아프리카의 반군을 상대하는 것 정도로 시작해 볼까?”
소총의 앞부분을 꽉 움켜쥐는 대원의 손이 양범의 시선에 들어왔다.
***
전화를 마친 강찬은 석강호에게 통화내용을 알려주었다.
“하여간 삶이 위태위태해요!”
그런데 잘 됐다고 하며 좋아할 줄 알았던 석강호는 엉뚱한 말을 꺼내 놓고 있었다.
“생각해 보쇼. 죽어라 일하다가 너 그만둬, 하는 한 마디에 이게 뭐요?”
“요즘 생각이 많아진다?”
“어허! 머리가 있다니까요!”
석강호가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말을 뱉고는 최종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권총이랑 좀 챙겨 놔. 아무래도 오늘 밤부터 움직일 거 같으니까.”
그리고는 꼭 필요한 지시까지 내렸다.
멋진 놈!
강찬이 감탄하는 눈으로 바라볼 때였다.
“족발하고 쟁반 국수 하나 시켜라. 간식 먹고 조금 있다가 저녁 먹자.”
석강호가 단단한 음성으로 또 다른 지시를 쏟아냈다.
강찬은 굳이 표정을 읽히고 싶지 않아서 빤한 일정표에 얼른 시선을 주었다.
“먹는 것도 자꾸 연습해야 하는 거요. 아침 먹고, 간식! 점심 먹고, 간식!”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어? 뭘 그런 말을 가지고……?”
강찬의 눈을 본 석강호가 말을 자르고 고개를 갸웃했다.
“먹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그래!”
강찬은 다시 일정표에 시선을 주었다.
“이게 좀 이상했었거든. 달랑 공식 행사가 두 개인 거. 이 새끼들 이거 혹시 연습 아니겠냐? 호텔에서 청와대로 첫 번째 이동할 때, 경호 상태를 체크하고, 두 번째에 뭔가를 저지르려고?”
불쑥 머리를 디민 석강호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고 미국 대통령이나 경호원들이 총을 뽑지는 않을 것 아뇨? 거기에 이 동선에는 우리 대통령은 동행하지도 않아요.”
이놈이 정말 진화했나?
인간의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많이 먹으면 진짜 머리도 좋아질 수 있는 건가?
엉뚱한 생각을 털어낸 강찬은 다시 일정표에 시선을 주었다.
석강호 덕분에 웃었지만, 이런 일은 절대 웃음으로 넘겨서는 안 되는 일이다.
죽느냐, 살아남느냐의 문제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