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3)
정말이지 깊게 잠들었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전화기 진동 소리가 일어나라고 칭얼거리는 김미영의 투정처럼 들릴 정도였다.
잠에서 깬 강찬은 소파에 앉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거기 몇 시야?”
[그걸 뭘 신경 씁니까?]
프랑스어로 주고받는 말이었다.
“아프리카에 가더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는데?”
듣기 좋은 제라르의 웃음이 넘어왔다.
“어쩐 일이냐?”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안 됩니까?]
이번엔 강찬이 픽 하고 웃었다.
[문바키는 잘하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이곳 기지를 확실하게 정비하고 이후부터 외곽 지역을 하나씩 차지할 계획입니다. 불편하겠지만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뭐가?”
[그 돌대가리랑 함께 있으려면 대장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니 얼른 내가 가야지요.]
“그걸 다예가 들으면 뭐라고 할 것 같냐?”
[그놈은 또 대가리 굴린답시고 헤딩이나 하지 않겠습니까?]
강찬이 전화기를 붙들고 킬킬거리자 머리가 삐쭉삐쭉 뻗친 석강호 불쑥 머리를 디밀었다가 바로 다시 나갔다.
“다른 문제는?”
[북한군 지휘자의 표정이 이상하긴 한데 이건 짐작뿐입니다. 그 외는 전혀 문제없습니다.]
“조만간 김태진 대표가 넘어갈 거다. 그쪽에 차세대 발전시설 짓겠다는 발표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긴장 풀지 말고 있어.”
[대장.]
강찬의 말이 끝나는 순간에 제라르의 착 가라앉은 음성이 넘어왔다.
[난 잘 지냅니다.]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제라르가 뒷말을 삼킨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그리고 그 말이 예전처럼 불쑥 혼자 사라지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는 것도 알았고.
“헛소리 말고 문바키나 잘 챙겨줘.”
[Oui.]
그 말을 끝으로 제라르와 통화를 마쳤다.
강찬이 거실로 나섰을 때, 이번엔 석강호가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탁자에 올려놓았던 물병을 건네주었다.
이놈은 또 누구와 통화하는 거지?
물병을 입에 문 강찬이 시선을 준 다음이었다.
“갈비 8인분을 구워서 보내주고, 갈비탕 네 그릇이요. 알지요?”
얼마나 주문을 해댔으면 저따위 통화에 주문이 가능할까?
물을 마시는 동안, 석강호의 통화가 끝났다.
“낙지 볶음은?”
“주문했습니다.”
그러고도 놈은 최종일을 향해 주문이 되었는지를 확인했다.
이놈이 이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려는 건가?
강찬의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갈비랑 갈비탕만 먹으면 뭔가 좀 아쉽잖소? 그러니 매콤한 게 조화를 이뤄줘야지요.”
말해 뭐하겠나.
강찬은 그저 주문한 대로 먹겠다는 심정으로 테이블로 걸어갔다. 막말로 매끼 메뉴를 물어보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에 드는 짓이긴 한 거다.
“아까 전화는 누구였소?”
“제라르. 너랑 있는 거 답답하더라도 좀 견디고 있으라던데?”
“얼래? 그게 뭔 소리요?”
“그냥 그러더라구.”
석강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봉지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탁자 앞에 놓아주었다.
달달한 커피 냄새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을 느끼며 강찬은 어쩐지 자기 전에 생각했던 아프리카를 떠올렸다.
어쩌면 일어나자마자 제라르의 음성을 들었고, 이렇게 밥도 먹기 전에 다예가 커피를 가져다주어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그때 강찬의 전화기가 또다시 울었다.
“여보세요?”
[나 전대극인데 오후에 시간 되겠나?]
하여간 말 한마디로 얼마나 바쁘고 힘든 상태인지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거다.
“어디서 뵈면 될까요?”
[태진이와 함께 갈 테니까 자네가 편한 곳으로 하지?]
“그럼 사무실에서 뵙죠. 참 오전 회의는 어떻게 됐습니까?”
[30분 뒤에 우즈만 왕세자와 공동발표인 모양인데, 그 이상은 국가정보원과 비서실 담당이라 나는 알기 어렵네.]
늘 문재현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전대극이 어떻게 내용을 모르겠나. 그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답인 자리에 있어서 그럴 거였다.
[시간은 오후 3시쯤 어떤가?]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삶을 커다란 틀에 넣고 인간적인 면만 있는 대로 쥐어짜서 깻묵처럼 뻑뻑함만 남은 일상의 연속이었다.
띵동.
“밥이 왔나 보우.”
기쁜 얼굴로 일어서는 석강호가 없었다면 진짜 더럽게 힘들기만 한 일상이었을 거다.
***
혼이 쏙 빠져나갈 만큼 몰려드는 일들을 처리하던 그라펠트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척 늘어트렸다.
세상을 돌리는 힘은 돈이다.
그래서 권력은 결국 돈으로 향하고, 돈은 더 큰 권력을 가능하게 만든다.
돈이 없는 세상에서는 어땠을까?
그라펠트는 입술 한쪽을 늘이며 웃었다.
그때도 잡아먹을 공룡이 많은 땅과 과일이 많이 나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죽고 죽였으며, 이긴 쪽이 정복한 땅에 살던 사람들을 거느렸던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라펠트가 양손을 들어 뒤통수에 붙이고 상체를 한껏 뒤로 젖힐 때였다.
띠르르르. 띠르르르.
책상 한쪽에 두었던 그의 전화기가 울었다.
“그라펠트입니다.”
[준비는?]
“마지막 검토 단계에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자, 당대 다윗의 별인 라우드에게 그라펠트는 분명하고 자신 있게 답을 전했다.
[스웨이든의 바보 같은 계획이 이토록 소중하게 사용될 줄은 몰랐다만, 그렇다고 우리까지 엉뚱한 짓을 해서는 곤란하다.]
“바실리와 우즈만, 그리고 라노크는 이미 동선에 들어왔습니다. 국가안전국과 국방부 정보국 요원들, UIS 전사들 역시 스탠바이 상태입니다.”
[영국에서 통제하는 위성은?]
“도이슨이 한국에 구금된 상태여서 오히려 완벽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블랙헤드의 에너지를 발사한 위성이 영국 소유로 밝혀진다면 더는 손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계획을 점검하는 라우드에게 그라펠트는 자신감 가득한 답변으로 보고했다.
[중국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쉽군. 이번 기회에 영국과 함께 침몰해준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한국의 정리가 끝나면 중국에 모든 힘을 기울일 예정입니다.”
[에너지를 생산하는 보석이라니? 누구라도 욕심을 낼만 한 일이긴 하지. 그러나 분에 넘치는 것을 욕심냈던 한국의 최후가 어떤 모습인지, 모두에게 교훈이 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집중해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전화기를 책상에 내려놓은 그라펠트는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깍지 낀 양손을 뒤통수에 붙였다.
그가 시선을 준 맞은편 벽에는 손바닥 두 개 크기의 액자들이 걸렸고, 그 속에 사진들과 몇 가지 증명서들이 담겨 있었다.
물론 프랑스에서 있었던 정보 교육 과정의 수료증 따위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도 그라펠트는 그 액자들을 보며 강찬의 모습을 떠올렸다.
절대로 물러나지 않는 강인함, 단둘이 붙어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전투 능력, 그리고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결정하는 순간 바로 제거해버리는 단호함까지.
만약 이번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과연 미국 대통령인 라우드를 제거할까?
그라펠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위성에서 발사하는 블랙헤드 에너지로 강찬은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거기에 이미 UIS 전사들이 완벽하게 준비 중이고, 스웨이든이 보내놓은 요원들이 있으며, 국가안전국과 국방부 정보국의 요원들까지 한국에 잠입한 상태인 거다.
계획은 미국이 짜고, 행동은 UIS 전사들과 스웨이든이 심어놓은 요원들이 이뤄내는 멋진 계획이었다.
하늘이 도와주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의 시체를 보게 된다면……?’
그라펠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살아있어도 상관없다.
대신, 그의 생존은 죽음보다 끔찍해질 것이 분명했다.
“후우.”
숨을 뱉어낸 그라펠트는 다시 책상의 서류로 상체를 기울였다.
***
사격을 가르치는 조교처럼 석강호는 진지했다.
“봐! 구운 갈비를 요 매콤한 낙지 볶음과 함께 먼저 먹고.”
놈이 낙지 볶음 함께 커다란 고기를 입에 넣고는, 다시 밥을 말아놓은 갈비탕을 바로 쑤셔 넣었다.
“이렇게 하면!”
“야! 그냥 좀 먹어!”
밥풀이 튀는 바람에 강찬이 타박을 던지자, 석강호가 “푸흐흐.” 하고 웃었다.
그런다고 숟가락을 놓을 강찬도 아니고, 밥을 포기할 석강호는 더욱 아닌 거다.
“비벼 드시겠습니까?”
“차라리 그게 낫겠어.”
최종일의 제안에 강찬이 얼른 밥을 내밀었는데 석강호는 언제 챙겨두었는지 새로운 밥공기를 하나 더 디밀었다.
전대극과 김태진이 오기로 한 시간에서 2시간쯤 여유가 있었고, 문재현의 발표까지는 20분쯤 시간이 있었다.
한쪽 벽에 켜놓은 TV에서 이런저런 뉴스를 보내는 동안, 강찬은 낙지 볶음에 비벼놓은 밥을 먹었다.
뜨끈한 갈비탕 국물과 딱 좋았다.
하여간 모처럼 사람 사는 것처럼 밥을 먹은 다음이었다.
커피와 담배를 준비해서 다 같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TV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발표는 바로 나왔다.
우즈만과 함께 등장한 문재현은 두 개의 단상 중에서 화면에 보이기에 왼쪽에 섰다.
원고를 살피는 것처럼 시선을 내렸던 그가 마침내 화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를 향해 연달아 쏟아지는 플래시 불빛이 이번 발표에 쏠린 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아프리카에 파병한 우리 군은 우리 시간으로 오늘 새벽 중앙아프리카 최대 반군 기지인 반둔두에 진격하여 반군을 완전히 소탕하였습니다.]
촤자자자자자작! 촤자자자자자작!
[대한민국은 앞으로도 반군에게 고통받는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할 것이며, 그들의 경제적 발전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촤자자자자자작! 촤자자자자자작!
잠시 고개를 돌려 우즈만을 바라보았던 문재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프리카의 발전과 경제적 지원을 위해 우리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손잡고, 반둔두 지역에 차세대 발전시설을 건립하는 것을 포함한 경제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얼마나 플래시가 강렬하게 터지는지 문재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번 계약을 통해 차세대 발전시설 설립과 기타 사회 간접 시설을 설립하는 비용 전액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제공하며, 건설과 관리는 대한민국 자원청이 주관하기로 하였습니다.]
플래시 소리 사이에서 기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동안, 문재현은 상체를 틀어 우즈만을 바라보았다.
[보도문이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시통역의 음성으로 보도해 드리겠습니다.]
방송국 진행자의 속삭이는 듯한 말이 끝나고 아랍어 억양이 그대로 살아있는 우즈만의 영어 발표가 TV를 타고 들여왔다.
“확실히 사람이 저렇게 나오면 뭔가 달라 보이는 거요.”
방송을 보던 석강호가 담배를 집어 들며 툭 하고 말을 뱉어냈다.
“새벽에 공항에서 봤던 양반하고, 지금 TV에 나오는 양반하고 전혀 달라 보이는 거 같지 않소?”
“똑같아 보이는데?”
“흠.”
석강호가 큼큼거리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솔직히 발표회장에서 문재현을 경호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르던 내용을 듣는 것도 아니어서 TV를 시청하는데 어딘가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더 TV를 지켜보던 강찬은 기자들의 질문이 있을 때쯤 볼륨을 줄여놓았다.
오늘 발표로 아프리카 연합을 만들 준비가 확실하게 시작된 것과 같았다. 그리고 한국을 향했던 시기와 질투의 눈길을 아프리카로 돌리게 되었다.
이제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끝나면 한국에서 급한 일정은 거의 마무리 되는 거다.
식은 커피를 마시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던 강찬은 맞은편 빌딩을 보며 피식 웃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또다시 커다랗게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입을 동그랗게 말고서 코끝에 바람을 불어대는 듯한 불안함이 강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이러다가 느닷없이 조용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당장에라도 강찬이 있는 건물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경고를 던지기도 한다.
강찬은 천천히 테이블에서 일어나 창을 짚고 서서 저 아래에 있는 도로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이럴 때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전생의 마지막처럼 목이 뚫려 죽게 된다면 그전에 꼭 한 번은 보고 싶은 얼굴들, 강대경, 유혜숙, 김미영, 그리고 강철규, 제라르 같은 이들 말이다.
그래도 이번 삶은 제법 잘살고 있는 거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강찬은 왼팔로 창을 짚고 선 채로 고개를 하늘로 들었다.
불안함, 본능이 주는 경고?
피식.
다 죽여서 보내주면 되는 거지?
다시는 그런 생각 따위 못하게?
유리를 통해 달려든 햇살이 네모난 모양으로 사무실 바닥에 갇혀서 강찬의 그림자를 또렷하게 그려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