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2)
통화를 마친 강찬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건진 건 없는 모양이다.”
“에이, 어쩌면 뒈질 때까지 그렇게 도움 하나 안 되는 새끼가 있는지. 하여간 속은 시원하우.”
도움도 그렇지만 뒈지고 이런 평가 받는 놈도 별로 없을 거다.
석강호의 불평을 뒤로하고 강찬은 라노크와 우즈만이 기다리는 자리로 움직였다.
두 사람은 전화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자리를 비운 결과쯤은 알려주는 게 예의였다.
“스웨이든을 제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강찬이 건넨 말을 듣고도 두 사람은 그렇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위원장.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붙잡는 것처럼 우즈만이 입을 열었다.
“쿠흐만을 살펴보세요. 그가 왕족들을 상대로 핵융합 발전에 투자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눈치였는데, 그렇다면 쿠흐만도 스웨이든과 연결고리가 있었을 겁니다.”
어쩐지 그를 제거해달라는 의미처럼 들렸다.
“쿠흐만 역시 왕족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라노크.”
라노크 역시 그렇게 느낀 모양인데 정작 당사자인 우즈만은 느긋한 태도로 강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뒤를 노리는 친구가 칼을 들고 덤비는 적보다 무섭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아프리카에 건설할 차세대 발전시설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할 생각입니다.”
표정을 읽기 어려운 라노크마저 놀라는 눈빛을 보였을 정도로 우즈만의 의사는 파격적이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면 나 역시 내부의 적을 먼저 제거하고 싶습니다. 쿠흐만이 제거되고, 내가 전 재산을 투자한다면 왕족들 역시 다른 소리를 내지는 못할 겁니다.”
우즈만은 단호하게 뜻을 밝혔다.
단순히 강찬에 대한 신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아랍은 변해야 합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지요. 나는 그 길을 아프리카에서 얻을 생각입니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을 던지고 나서는지 강찬은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강찬의 표정을 읽은 것처럼 우즈만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아랍을 존중해주는 새로운 질서가 서기를 희망하지요. 그리고 나는 위원장이 앞으로 그런 질서를 만들어주리라 확신합니다.”
“나는 지금도 우즈만을 존중합니다. 혹시 원하는 다른 것들이 있습니까?”
“물론 투자에는 이익이 따라야겠지요. 내일 발표회장에 내가 함께 나가도 좋습니다. 대신, 나는 한국이 아프리카에서 차지하는 권한에서 45%의 지분을 원합니다.”
오늘 우즈만은 이전의 모습과 확실히 달랐다.
쿠흐만의 제거 요청도 그렇지만, 강찬이 들어도 과한 지분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위원장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괜찮다면 가능한지의 여부를 확인해 주었으면 싶습니다.”
새벽 5시에 대통령을 깨워서 묻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두 시간쯤 지나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상관없습니다. 그보다는 위원장이 잠시라도 잠을 자두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비행 중에 충분히 쉬었고, 또 오랜만에 만난 라노크와 잠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싶습니다.”
슬쩍 시선을 돌린 곳에서 “최소한의 휴식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법이지요.”하고 라노크가 말을 건넸다.
두 사람만의 시간이 필요한 느낌이어서 강찬은 그러겠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투와 같은 상황이었다.
잘 수 있을 때 자두는 건 전혀 해되는 일이 아닌 거다.
“그럼 두 시간쯤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함께 아침을 드시기로 하지요. 원하시면 2층에 좀 더 편한 장소가 있습니다.”
“이곳도 나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남겠다고 해서 강찬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찬이 홀을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라노크. 당신의 요구대로 모두 된 거겠지요?”
“고맙습니다, 우즈만.”
두 사람이 엉뚱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쿠흐만이 UIS를 지원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하마터면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탄압할 빌미를 제공할 뻔했던 거군요.”
“그는 스웨이든의 꼬드김에 넘어갔을 뿐입니다.”
라노크는 별것 아닌 것처럼 대꾸하며 시가를 입으로 가져갔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그에게 내가 요구한 지분 45%에서 20%를 넘기겠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라노크는 서양 가면의 표정처럼 웃었다.
“무슈 강은 강직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금처럼 당당하게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 바람에 우리 같은 사람도 할 일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그런 의미가 되는군요.”
자리에 앉고 처음으로 웃음이 흐르는 대화가 오갔다.
“러시아는 어떨 것 같습니까?”
“바실리는 조만간 아프리카로 바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모르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군요?”
“한국이 아프리카 중앙을 차지한 오늘이 분수령이 될 겁니다. 앞으로 한국은 무기, 장비, 그 외에도 자체 생산으로 조달하기 어려운 것들을 산더미같이 필요 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요.”
“한국과 손을 잡기 위해서는 무슈 강의 승인이 필요해집니다. 대통령인 된 바실리는 그런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망설이게 된다면, 그 시장을 프랑스와 독일이 독차지하게 될 테니까요.”
우즈만은 탄복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직후에 그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린 얼굴로 라노크를 보았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떻습니까? 우리 위원장과 관계가 틀어졌다고 들었는데요?”
“당연히 양범 씨가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즈만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웃었다.
“위원장이 과연 그 모든 것을 계산하고 아프리카를 차지했던 걸까요?”
라노크는 시가를 입에 문 채로 잠시 뜸을 들였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당연한 듯 무슈 강을 중심으로 돌아가지요.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뜻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즈만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조만간 북한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겁니다. 한국의 앞으로 6개월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라노크가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것처럼 말을 던졌다.
***
북한군이라고 왜 보고가 없겠나.
반둔두 점령이 있던 밤이 지나고, 그 다음 날 새벽에 안철호는 용성부대가 준비해준 커다란 장비에 전화기를 연결했다.
남한이 제공해 준 통신시설이다.
그래서 이런 전화는 간략하고 기본적인 보고만 했었다.
이마와 목덜미에 거즈를 붙인 안철호가 정해진 번호를 누른 뒤에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신호음이 제법 길게 이어진 다음이었다.
[나야.]
인민무력부장 박상식의 음성이 중간에서 메아리치는 것처럼 울려서 넘어왔다.
“안철홉네다. 반둔두 점령에 성공했습네다.”
[기렇군.]
박상식은 그 흔한 ‘고생했다’거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보고를 받아들였다.
“건강은 어떠십네까?”
그를 누구보다 믿어주고 끌어주었던 사람, 냉혹한 북한 사회에서 사상 검증을 보증 서 주었던 사람, 그리고 안철호에게는 아버지 같은 사람.
그런 박상식이 안철호의 질문에 답이 없었다.
“여보시라요?”
[흥. 간나 새끼. 남조선 병사들하고 지내더니 자본의 단물이 듬뿍 들었구만.]
그리고 뜻밖에도 섬뜩한 질책이 건너왔다.
“아닙네다! 이 안철호! 위대한 수령 동지의 명을 받아 당이 주신 과업을…….”
[개소리 집어치라.]
멈칫했던 안철호가 얼른 입을 열었다.
“부장 동지. 자본주의에 물든 점은 돌아가는 대로 자아비판을 통해…….”
[간나 새끼야! 돌아오믄 너는 바로 숙청이야. 자본의 단물을 맛본 너를 당이 그대로 두갔네?]
안철호는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안철호.]
잠시 뒤에 착 가라앉은 박상식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울리며 넘어왔다.
[내래 남조선이 파병 요청을 했을 때 가장 먼저 너를 떠올렸어. 원산의 일로 나는 이미 당에 찍힌 기야. 기카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박상식이 인민무력부장이 되고 나서 이렇게 따듯한 음성으로 말을 건네준 건 처음이었다.
[전향하라우. 내래 그 소식을 들으믄 더 바랄 것이 없갔어. 알갔네? 전공을 세우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자본의 단물도 느끼고, 맛난 것, 기깔난 것 걸치고 살아보라우.]
“부장 동지-이?”
안철호의 부름을 박상식은 픽 하고 웃는 소리로 밀어냈다.
그는 이미 무언가를 짐작했고, 그래서 결심을 세운 눈치였다.
[외화벌이가 좋아서 당은 너희를 불러들이지 못해. 기카니까 앞으로 보고 따위 하지 말라우.]
안철호가 마른 침을 삼킨 직후였다.
[건강하라우.]
허공에서 울린 듯한 음성이 들리고는 전화가 뚝 끊겼다.
앞쪽에 있던 위성 장비에서 빨간색 불빛이 사라졌는데도 안철호는 한참을 멍하니 그 앞에 있었다.
***
두 시간을 자고 난 강찬은 곧바로 고건우에게 우즈만의 의사를 전해주었다.
긴말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불과 10분 만에 문재현은 라노크와 우즈만을 만나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는 뜻을 알려왔다.
“청와대에서 아침을 함께하고 싶으시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질문 하나에 답 하나로 일정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아침 식사에 강찬을 부르지 않았는데 강찬이 그런 걸 서운해할 사람은 아닌 거다.
대테러 팀이 둘러싼 가운데 라노크와 우즈만이 청와대로 향했고, 강찬은 석강호, 최종일, 이두희, 요원들과 함께 사무실로 향했다.
새벽 시간이라 길이 그렇게 막히지 않았다.
“아후! 살 것 같소.”
아닌 게 아니라 사무실에 들어서서 낯익은 탁자와 회의실의 소파를 보자 푸근한 마음마저 들었다.
“이런 게 사는 재미는 더럽게 없는 거요.”
“뭐가?”
“정보 세계라는 거 말이오. 머리 써야 하고, 저 개새끼가 뭔 짓을 하려는 건지 짐작해야 하는 거 말이오. 그냥 총 들고 뛰어다니고 말지. 이건 원.”
툴툴거리면서도 석강호는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내일은 또 미국 대통령이 온다는데 오늘이라도 잘 먹어둬야 하지 않겠소?”
“어련하겠냐.”
강찬이 고개를 저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전화가 울리고 오광택의 번호가 떠올랐다.
“여보세요?”
[뒷정리까지 깨끗하게 하느라 좀 늦었다. 괜찮으면 여기 대원들하고 아침 먹고 출발할 생각이다.]
“고생했다.”
[가서 보자.]
짧은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라노크와 우즈만도 무사하고, 스웨이든의 꼼수는 맥이 빠질 정도로 허탈하게 끝나버렸고, 반둔두도 이상 없는 거다.
그럼 심장은 왜 뛴 거지?
그것도 비행기가 내려앉는 그 시간에?
석강호가 무언가를 잔뜩 주문하는 소리를 들으며 강찬은 테이블에 앉아 늘 보던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염병.
언제부터인가 정말 사는 게 재미없어졌다.
늘 요원들과 대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우리 쪽의 누군가가 죽고, 또 저쪽의 누군가를 죽인다.
강대경, 유혜숙은 미쉘과 함께 외국을 떠돌고, 김미영은 만나지도 못하는 데다, 심지어 제라르의 목소리를 들은 게 언제인지도 모르는 삶이라니.
찰칵.
“후우.”
담배에 불을 붙인 강찬은 담뱃갑 위에 라이터를 올려놓았다.
석강호의 말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살 바엔 아프리카의 태양 아래에서 그날그날을 악착같이 살아가던 날이 오히려 속 편했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살다가 아프리카에서의 삶을 그리워할 줄은 정말 몰랐다.
강찬은 두 손을 탁자에 올리고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창 아래로 보이는 길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을 짐작이나 할까?
생으로 담배가 다 타버려서 조심스럽게 담배를 끄고 났을 때였다.
주문했던 음식이 도착해서 넷이서 함께 밥을 먹었다.
식사야 원래 어지간해서는 10분을 넘기지 않는다.
후다닥 먹고서 탁자로 돌아온 다음이었다.
석강호가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요?”
“뭐가?”
“표정이 다르잖소?”
하여간 이럴 때 보면 이놈은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닌 거다.
“메뉴가 마음에 안 드는 거요?”
생각이 짧은 놈일 수는 있겠다.
“대장도 지친 거요. 전에는 부모님이 있어서 위로받았지만, 지금은 늘 이 생활이니까 충분히 그럴 때도 됐소.”
“기러기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어허! 나는 그저 그런 기러기가 아니잖소?”
“기러기에도 종류가 있냐?”
대답이 곤란했던지 석강호가 “푸흐흐.”하고 웃었다.
“우리 낮에 잠깐 나갔다 옵시다.”
“어딜?”
“미사리에 가서 커피를 마셔도 좋고,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사도 좋고. 또 식당에 가서 제대로 된 음식도 좀 먹고 그럽시다.”
강찬은 픽 웃고 말았다.
정말이지 그러고 싶다.
그런데 가뜩이나 힘겨운 상황에서 요원들과 대원들 우르르 이끌고 고작 백화점이나 식당에 가서 밥 먹는다는 건 정말이지 할 짓이 아닌 거였다.
“한숨 자두는 게 좋지 않겠냐? 내일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럴까요?”
답을 한 석강호는 벌써 엉덩이를 들고 있었다.
저런 놈이 밖에 나가자고 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마 석강호와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이 좀 풀린 강찬은 좀 더 자기 위해 식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잘 수 있을 때 자두는 게 현명한 일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