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1)
본능이 심장을 통해 주는 경고였다.
‘염병!’
강찬은 활주로에 가라앉는 비행기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프리카는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를 전쟁터고, 하루가 지나면 미국 대통령이 날아온다.
거기에 한국에 입국하는 수많은 외국인 중 누가 테러리스트인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데다, 영국에서 언제 지진을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인 거다.
이런 상황에서 심장이 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불안할 일 아니겠나.
이쪽의 숨통을 끊겠다고 덤비는 놈들이 바글바글한 판에 지금껏 심장이 조용한 게 오히려 이상한 판이었다.
완벽하지 못했던 마무리 탓에 이런 꼴을 당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완벽하게 뒤처리를 할 생각이었다.
- “우리가 다시 태어난 이유가 있지 않겠소?”
강찬은 석강호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불행했던 과거를 비무장 팀이 모두 지옥으로 짊어지고 간다면, 지금 벌어지는 모든 죗값은 강찬이 모두 짊어지고 간다.
비록 그곳이 지옥보다 더한 곳이라도 말이다.
모조리 죽여서라도 다시는 이렇게 덤비지 못하도록 완벽하고 확실하게 마무리를 해주마.
강찬은 독한 각오를 떠올리고서 활주로에 시선을 주었다.
끼기긱!
요란한 엔진음을 터트리며 활주로에 내려앉은 대형 여객기가 방향을 트는 동안, 이번엔 라노크의 자가용 비행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 4시쯤 되었다.
대형 여객기를 위해 트랩을 등에 업은 트럭이 천천히 다가가는 사이 라노크의 자가용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자가용 비행기는 활주로에 앉기 무섭게 방향을 틀어 강찬이 있는 곳으로 곧바로 다가왔다.
그리고 대형 여객기에 트랩이 닿을 때쯤에는 바로 앞에 도착한 자가용 비행기의 문이 열렸다.
“대사님!”
몸을 숙인 채 내리는 라노크를 향해 강찬은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피곤하시진 않으십니까?”
“이동 중에 내가 어떤 모습인지 위원장은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이번엔 어쩐지 못 주무셨을 것 같은데요?”
강찬의 농담에 라노크가 눈 끝을 늘이며 웃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눈빛은 늘 반갑고 고맙다. 특히나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는 더더욱 더.
“무슈 강.”
“어서 와, 라파엘.”
강찬은 뒤이어 내린 라파엘과도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트랩을 붙이느라 시간을 허비한 대형 여객기는 이제야 문이 열렸다.
강찬은 라노크와 함께 트랩 앞으로 걸어갔다.
우즈만은 아랍 특유의 원피스 차림으로 여객기에서 내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가벼운 포옹과 함께 양쪽 볼을 교대로 마주친 강찬이 한쪽으로 비켜섰고, 부드러운 미소의 우즈만이 라노크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라노크. 별장이 그토록 좋았던가요?”
“언제 한번 초대하겠습니다.”
“그런 기회를 준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날아가지요.”
새벽 4시에 대테러 팀 대원들이 둘러싼 가운데 인천 공항의 활주로에서 만났고, 이렇게 인사를 마쳤다.
“근처에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우선 그리로 가실까요?”
“안내를 부탁합니다.”
답을 한 우즈만이 뒤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수행원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의미였다.
“저분들은 호텔로 바로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답을 들은 우즈만이 수행원에게 짧은 지시를 전했고, 라노크 역시 라파엘에게 비슷한 의미의 말을 건넸다.
“이동한다.”
강찬의 말이 떨어지자 석강호와 최종일이 손짓으로 승합차를 준비했다.
대테러 팀 승합차가 선두, 이어서 강찬과 라노크, 우즈만이 탄 승합차, 그리고 석강호와 최종일 탄 승용차, 다시 대테러 팀 승합차의 순으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20분쯤 달린 다음이었다.
선두를 달리던 대테러 팀 승합차가 도로를 벗어나 낡은 3층 건물로 들어섰다.
원래는 작은 모텔 수준의 호텔이었다.
그걸 국가정보원에서 사들여 안가 형태로 관리했는데, 간판을 모두 떼어내서 외관은 볼품없었지만, 내부는 제법 잘 꾸며놓았다.
1층의 로비로 들어서면 왼편에 방 서너 개를 뜯어낸 크기의 아담한 홀이 있고, 그 안쪽으로 주방이 있는 구조였다.
이런 형태의 안가에 익숙한 라노크와 우즈만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강찬과 함께 홀에 앉았다.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긴 비행이 끝나면 차와 시가가 간절하지요. 어떠십니까? 우즈만?”
“탁월한 판단입니다.”
강찬이 고개를 돌려 “차를 준비해줘.”라고 말을 건네자 요원이 빠르게 주방으로 들어섰다.
2층과 3층, 건물 입구를 무장한 대원들이 경계하고, 석강호와 최종일이 1층 오른쪽에서 요원들과 대기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전이 우선이라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차를 오래 타지 않아도 되는 점이 가장 좋군요.”
안부와 적당한 덕담을 주고받는 동안, 홍차와 대추야자, 그리고 시가가 나왔다.
“한국에서 대추야자를 즐길 줄은 몰랐군요.”
홍차를 따라준 요원이 물러나고 홀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강찬은 담배를, 라노크는 시가를 들었고, 우즈만은 홍차를 마셨다. 시가와 담배 연기가 뒤섞일 틈도 없이 천장의 환풍기로 빨려 나가고 있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오시는 동안 몇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우선 몇 시간 전에 반둔두를 확보했습니다.”
라노크와 우즈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어쩐지 이 두 사람은 석강호가 아까 차 안에서 먹은 빵의 종류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반응을 살폈던 강찬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홍콩에서 스웨이든과 도이슨을 데려왔습니다.”
이번에 라노크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고, 우즈만은 놀란 눈으로 강찬을 바라보았다.
“도이슨은 핵융합 발전시설 역시 블랙헤드를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이유가 블랙헤드를 얻기 위한 것이었겠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우즈만.”
갈색 피부의 우즈만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도이슨이 또 한 가지를 털어놓았는데 그 장치를 사용하면 에너지 간섭이 일어나 강한 쪽이 약한 쪽의 에너지를 당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에 위원장이 영국을 구해준 적이 있었지요. 그 뒤에도 그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러 가지 실험을 했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지진을 일으키는 장치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 같은데.”
라노크가 강찬의 말에 설명을 보태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미국과 함께 핵융합 발전시설을 공동개발하면서 거기에 과거의 기술을 접목하는 방법으로 지진 발생시설을 완성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추측이라고 하긴 했는데 라노크가 이렇게까지 설명했다면 사실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일이었다.
그때였다.
뭔가 있는데?
뭐지? 도대체 뭐였지?
라노크의 설명을 들으며 강찬은 퍼뜩 떠오른 가물가물한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 두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스웨이든과 도이슨 말입니다.”
그런데 라노크의 질문이 건너와서 생각을 잇지 못했다.
“스웨이든은 확인할 것이 있어서 이동 중이고, 도이슨은 특별한 장소에 있습니다.”
강찬의 답에 라노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견할 생각은 없지만, 한 가지를 조언한다면 도이슨도 빠른 시간 안에 제거하는 게 좋을 겁니다.”
“확인이 끝나면 바로 제거할 생각입니다.”
우즈만은 확실히 연륜이 있었다.
속내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의 그는 마치 옆집 염소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듣고 있는 듯 편안한 태도였다.
“이제 아프리카의 계획에 대해 의논할까요?
라노크가 우즈만을 향해 말을 건넸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강찬의 전화기가 울었다.
“스웨이든이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확인이 끝났을 테니 잠시 마지막 통화를 하고 오겠습니다.”
“얼마든지요.”
라노크가 답하는 옆에서 우즈만은 오른손을 내밀며 전화를 받으라고 권유했다.
강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석강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지금 막 도착했다.]
“다른 일은?”
[아직은 없었다.]
피가 끓는 듯한 오광택의 음성을 들으며 강찬은 간질거렸던 것이 무엇인지 퍼뜩 떠올랐다.
남일규가 당했던 그 자리에 있던 그 새끼들!
블랙헤드처럼 몸에 손이 닿는 순간 강찬의 힘을 쭉 빨아들이던 놈들 말이다.
핵융합 발전 기술이 약한 쪽의 에너지를 빨아들인다고 했으니 그 기술로 그 새끼들에게 에너지를 심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니겠나?
요 개새끼들 봐라?
강찬은 피식 웃으며 석강호와 최종일이 있는 곳의 탁자에 앉았다.
“일규 선배에게 잘 보내줘. 험한 일 부탁해서 미안하다.”
[그런 소리 마라. 일규 형님은 어쩐지 진짜 집안 형님 같았었다. 몽골에서……. 정말 잘 해주셨었는데, 내가 괜히 불러내서 그런 것 같아서.]
울먹이는 음성이었다.
[고맙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으마.]
방금 전 대화에서 울먹이던 놈이 사람 죽여달라는 걸 은혜라고 말하고 있었다.
“힘든 일이다만 부탁한다. 전화 좀 바꿔줘.”
통화내용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던 석강호가 앞에 있던 음료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강찬이 석강호의 음료수 잔 옆에 놓인 샌드위치를 보았을 때, 전화기 너머에서 “받아봐, 이 씨발놈아!” 하는 오광택의 거친 음성이 들렸다.
스웨이든은 산으로 둘러싸인 국도 한쪽에서 오광택이 디미는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굳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그가 거친 욕을 쏟아냈다는 것쯤 충분히 짐작했다.
차들이 지나지 않는 길이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차량의 불빛을 보며 스웨이든은 올라오는 웃음을 침울한 표정으로 덮었다.
‘그래. 시간을 끌어라, 이 멍청이들아. 그럴수록 네놈들 목이 위태롭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거다.’
대테러 팀 여섯 명이 승합차의 뒤에서 스웨이든을 둥그렇게 둘러쌌고, 눈앞에서 오광택이 눈빛을 번들거리는 앞이다.
스웨이든은 멀리 보이는 차량의 불빛을 확인하고 천천히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1분이면 저 차량들이 이곳에 도착할 거고, 총소리가 울리면 이곳에 있는 이 머저리들은 모조리 시체로 변한다.
“알로?”
강찬일 거라는 확신에 스웨이든은 프랑스 말을 꺼내 들었다.
[스웨이든.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위원장?”
자동차의 불빛이 이쪽으로 향하는 마지막 커브를 돌고 있었다. 대략 30초쯤이면 도착할 거다.
이제는 아무리 강찬이 이곳이 요원에게 전화를 하든, 무전을 날리든, 저 차량이 도착하는 것이 더 빠른 상황인 거다.
“한국은 아직 멀었다. 정보전의 경험도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첨단 장비도 뒤떨어지지. 이곳에 온 멍청한 요원들의 시체를 보게 되면 그 점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는 게 좋을 거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요원들은 프랑스 말을 못 알아듣는 눈치였고, 알아들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자동차의 불빛이 승합차를 비출 정도로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았나? 위원장?”
스웨이든이 한껏 여유를 부리며 강찬을 약 올린 순간이었다.
먼저 픽하는 웃음이 넘어왔고,
[스웨이든. 내가 왜 너를 그 먼 곳에 보냈다고 생각하나?]
이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 전화기를 타고 스웨이든의 귀를 파고들었다.
끼이익! 끼익!
달려온 차량은 모두 다섯 대였다.
그리고 승용차에 안테나를 천장에 매단 승합차 두 대가 가장 앞쪽으로 달려가 멈췄다.
[신호가 약해서 불행하게 우리 디지털 분석팀이 그걸 증폭해줘야 했던 모양인데, 그나마 아쉽게도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스웨이든은 어둠에 싸인 세상이 커다랗게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비행기에서는 그런 신호를 보내지 말았어야지. 모르고 있었나? 비행기가 얼마나 주파수에 민감한지를?]
“위원장!”
[그리고 그런 장비를 달고 다니려면 좀 더 좋은 것이 필요해. 국가정보원의 안가는 도청과 외부 신호를 전부 감지하거든. 물론 그곳에서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스웨이든 미친 듯이 살 방법이 있는지를 떠올렸다.
“미국에 다윗의 별이 감춰놓은 돈을 내가 전부 가지고 있소. 그걸 이용하다면 위원장의 계획이 더욱 완벽하게 이뤄질 거요!”
[이제는 작별할 시간이야, 스웨이든.]
“위원장!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소? 뭐든 솔직하게 답하겠소! 제발 기회를 주시오!”
스웨이든의 표정을 본 오광택이 안 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질문은 이미 했었다. 내가 왜 너를 그 먼 곳까지 보냈다고 생각하는지? 잘 가라. 스웨이든.]
전화가 끊겼다.
“위원장! 위원장!”
그리고 스웨이든이 절규하듯 부르는 모습으로 통화가 끝났다는 것을 주변에 있던 요원들까지 모두 알았다.
스웨이든이 전화기에서 시선을 드는 순간이었다.
터억!
오광택이 대끔 스웨이든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우르르.
그리고 대원 넷이 달려들어 스웨이든의 팔을 뒤로 돌려 타이로 묶었고, 다시 발목을 두꺼운 타이로 꽁꽁 묶어버렸다.
“헤이! 헤-! 읍! 으읍! 읍!”
뒤에서 천이 넘어와 스웨이든의 입을 사정없이 파고들어 입 끝이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묶었다.
“으읍! 으으-읍! 읍!”
돈이다! 돈! 이 멍청이들아!
이곳에 있는 요원들이 상상조차 못 하는 금액을 주겠다고! 스웨이든은 한마디만 들어보라는 뜻을 눈빛과 비명 같은 외침으로 애절하게 쏟아냈다.
“거, 씨발놈! 더럽게 시끄럽네!”
그런데 오광택의 얼굴이 바싹 다가오자 스웨이든은 그만 애절한 소리마저 내지 못했다.
번들거리는 오광택의 독한 눈을 보자 어떤 것을 제시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안 아프게 살살, 천천히 잘라주마.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지랄 떨지 마라. 알았냐?”
스웨이든은 물론 오광택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뒤부터 썰 거야. 그래서 옆으로 갈 거고, 마지막에 앞을 썰어줄 거니까 서울구경 잘하고, 우리 형님 보면 관광 가이드가 오광택이였다고 분명하게 전해주라.”
말을 마친 오광택이 이를 활짝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스웨이든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말을 못 알아들은 게 그나마 다행인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