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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오브블랙필드(2부)-53화 (472/520)

제6장. 지금은 위험합니다. (1)

비행기에 오른 라노크는 가장 먼저 전화기를 들었다.

오늘은 그의 딸 안느와 루이, 늘 충실한 모습의 라파엘까지 앞쪽 자리에 함께 있었다.

신뢰하는 이들만이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전화기를 귀에 댄 라노크는 가면을 쓴 것처럼 감정을 감춘 얼굴이었다.

[알로?]

“라노크입니다, 우즈만. 지금 프랑스에서 출발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노크. 이 늙은 사람의 청을 받아주었군요.]

“결과를 장담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바람결에 좀 더 많은 씨앗이 실려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무슈 강과 같은 인물이 일으킨 바람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비행기의 창을 스쳐가는 구름과 그 사이로 짙은 색의 프랑스가 드문드문 보였다.

“우즈만. 이번 일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나야 이미 살만큼 살았습니다. 마호메드 압살라 쿠흐만이 그에게 더 큰 죄를 짓기 전에 막을 수만 있다면, 그렇지 못하더라도 무슈 강이 나의 이 노력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이든 이의 애잔한 음성 때문이었을까?

라노크가 뒤집어쓴 가면이 스르륵 녹아버린 것처럼 그의 얼굴과 눈빛에 씁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라노크.]

“말씀하십시오.”

[나는 아비부의 사건 때 이미 무슈 강으로부터 더할 수 없는 배려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었던 정보회의, 이스라엘과의 분쟁에서도 그는 나를 가족과 같이 존중해주었습니다.]

에어포켓을 만난 것처럼 쿵하고 바닥이 울렸던 비행기가 힘찬 엔진음과 함께 몸을 들어올렸다.

[쿠흐만의 실수를 내손으로 정리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이번 방문으로 갚으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의 도움이 절실하지요.]

“이미 뜻을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발한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라노크.]

진심이 묻어있는 음성은 분명 알 수 있다.

지금 건너오는 우즈만의 목소리가 꼭 그랬다.

[당신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럼 한국에서 뵙지요.]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혹시 홍차를 필요로 하는가 싶었던지 라파엘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라노크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파엘. 이런 때는 자네도 비행을 좀 즐기게. 와인을 한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저는 늘 홍차가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고집스러운 대답에 가볍게 웃은 라노크가 다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바실리다.]

“대통령의 대답치고는 너무 거친 게 아닌가?”

[농담을 할 여유가 있나?]

어쩐지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받는 느낌이었다.

“우즈만의 요청대로 한국으로 향하고 있다.”

[하!]

놀라움과 불만을 바실리는 정말이지 멋지게 한 단어로 표현해 냈다.

“우즈만의 영향력을 우습게 생각하면 곤란해. 그는 원유생산을 감축시킬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인물이다.”

[그래서 나더러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뜻인가?]

“협조라는 좋은 단어가 있지.”

픽하고 웃는 라노크의 웃음이 바로 들렸다.

[속이 시커먼 프랑스인이 바라는 것이 무언지 먼저 알 수 있을까?]

“나야 늘 같았다. 새로운 세계질서. 지금은 아프리카의 지분쯤 얻고 싶지. 이왕이면 자네처럼 믿을 수 있는 인물과 함께.”

[이봐, 라노크. 이제 나는 한국을 비공식적으로 방문할 수 없는 자리에 있어.]

“공식적으로 오면 되지 않겠나?”

[미국의 라우드가 펼쳐놓은 테이블에 간이 의자를 들고 끼어들란 뜻인가?]

라노크의 눈 끝이 가볍게 올라간 다음이었다.

“자네가 한국과 미국 정부에 요청하는 게 좋겠지. 3자 회담쯤이면 그럴싸하지 않겠나?”

[흠.]

“바실리. 무슈 강이 우즈만을 만나자고 청했다. 아프리카다. 어떤 결정을 해도 좋겠지만, 그전에 그의 닉네임을 떠올리는 게 도움이 될 거다.”

[갓 오브 블랙필드?]

“일이 이렇게까지 올 줄은 솔직히 나도 짐작하지 못했다. 자네는 그가 진정한 아프리카의 절대자가 된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빌어먹을!]

“아프리카에서의 주연 3을 빼앗기지 않을 마지막 기회다.”

마치 바람 빠지는 듯한 바실리의 웃음이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들었다.

***

남일규는 곱게 빻은 유골로 그의 삶을 마쳤다.

벽에 머리를 처박고 꺽꺽 울어대는 오광택이 아니었다면, 놈이 김태진의 품에서 “형님!”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없었다면, 몹시 서러울 마지막이었다.

강찬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오광택이 남일규의 영정을 들었고, 김태진이 유골함을 들고 나설 때도 그 뒤를 따랐다.

화장터 주변을 국가정보원 대테러 팀이 지켰고, 남일규가 그토록 좋아했다던 인제로 가는 길을 35여단이 경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런 길을 지키느라 후배들의 고생이 너무 많아요.

부원장님.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남일규의 말이 귀에 들리는 듯 했지만, 강찬은 인제의 산까지 함께했다.

점심때를 지나서 버스가 인제에 들어섰고, 거기에서 다시 40분을 달렸으며, 마지막에 한 시간을 걸어서 올라갔다.

사방이 훤히 보이는 정상이었다.

저 멀리 남일규가 젊음을 받쳐 지켜낸 땅이 보이는 곳이었다.

오광택과 최종일, 우희승이 달려들어 구불구불 가지를 뻗어낸 나무의 아래를 파냈다.

“형님!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오광택이 침을 흘려가며 흐느끼다가 김태진이 다독인 후에야 남일규의 유골함을 구덩이에 넣었다.

날씨가 터무니없이 좋았다.

이런 날은 비가 내려도 좋을 텐데 말이다.

사과 몇 개, 배, 그리고 포를 깔아놓은 앞에 술을 따르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다 끝났다.

서울과 다르게 서늘한 바람 속에서 강찬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후우-!”

외로운 곳이다.

사람의 왕래가 부족한 곳이기도 했다.

담배 연기를 처음 봐서 신기한 어린아이처럼 바람이 연기를 단박에 흩뿌려놓고 달아났다.

석강호가 강찬의 반걸음쯤 뒤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고, 아직 눈이 벌건 오광택까지 담배를 물었다.

“고생했어.”

김태진이 강찬의 곁에 서서 말을 건넨 직후였다.

정말 다 끝내고 돌아가려는 그 순간에,

두근두근. 두근두근.

강찬의 심장이 위험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 몰라.’

일부러 생각한 게 아니라, 신기 있다는 사람들처럼 퍼뜩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남일규가 알려준 것인지 모른다.

그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떠나는 마당에 안간힘을 쓴 것인지 모르는 거다.

염병할! 이번엔 또 누구냐!

미국 대통령의 방한까지 이틀 남은 날 오후였고, 우즈만의 방문도 있었다.

강철규는 침대에서 상체를 들어 먼저 바늘을 뽑았다.

바늘을 뽑은 자리에서 피가 쭉 나왔는데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로 기계들마저 잡아뗐다.

삐이이-.

대원들이 겨우 일어날 새벽이 갓 지난 시간이었다.

기계음에 놀란 것처럼 군의관이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강철규는 이미 침대에서 다리를 내리고 있었다.

“응급 수술이었습니다. 이 상태로 또 수술한 자리가 벌어지면 그때는 정말 위험합니다.”

“고맙다.”

진심으로 염려해주는 군의관의 어깨를 툭툭 쳐준 강철규는 바로 의무실을 나섰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그의 심장이 전에 없이 강하게 위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아프리카다.

그것도 반군 기지의 진입로를 점령한 상태에서 본거지를 향해 움직이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언제 출발할지 모른다.

그러니 한 시라도 빨리 이 위기를 알려주어야 했다.

강철규가 막사로 들어서자 차동균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차 대위.”

“예.”

차동균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강철규의 눈빛이 적을 마주한 것만큼이나 강렬하게 빛나고 있어서였다.

“부원장과 작전에 나갔을 때 혹시 경고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나?”

“예?”

“본능이 주는 경고 같은 건데, 느닷없이 위험하다고 하거나, 조심하라는 경우 말이다.”

강철규의 눈을 본 차동균이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있었습니다.”

“내가 그런 것을 느낀다고 하면 믿겠나?”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믿습니다.”

차동균의 단단한 답이 있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위기가 뭔지는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모르는 위기가 있다.”

“대장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석 팀장이 어디인지 모르겠냐고 물었을 때, 무당이냐고 답한 적도 있습니다.”

숨을 들이마신 강철규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일단 장군님과 의논하겠습니다.”

답을 한 차동균이 피가 배어있는 강철규의 붕대를 보았다.

“그러니 우선 치료를 받으시고…….”

“이 정도는 괜찮아. 그보다는 함께 박 장군을 만났으면 싶은데 가능하겠나?”

강철규의 눈을 보며 차동균은 강찬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런 눈빛일 때 그가 물러선 적이 없다는 것도.

“잠시만 계십시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부탁한다.”

고개를 끄덕인 강철규가 간이 탁자의 의자에 앉았다.

거침없는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에 맺힌 땀이 그가 얼마나 힘겨운 상태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

스웨이든은 마침내 도이슨의 손을 잡았다.

홍콩 양화의원 옆의 안가였다.

“앉읍시다.”

스웨이든이 중국식 탁자의 건너편을 가리키자, 도이슨이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에 자리했다.

안가의 입구와 넓지 않은 마당, 현관, 그리고 거실을 정장 차림의 양측 요원들이 손을 앞으로 잡은 자세로 지키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워주겠나?”

스웨이든의 요청에 거실에 있던 요원들이 일제히 마당으로 움직였다.

“사무엘 부통령이 내일 일본에 도착합니다.”

요원들이 나가기 무섭게 스웨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미 라우드 대통령을 두 번이나 면담했소.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나와 약속했던 내용을 털어놓았을 거요.”

“역시 예상대로군요.”

“그가 나와의 약속을 지킬 정도였다면 지금쯤 대통령으로 있었겠지요.”

고개를 끄덕인 도이슨이 품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태블릿을 꺼냈다.

“위성의 움직임이 이곳에 표시됩니다. 그 외에 다르미 코프와 드미트리가 장비를 준비했고, UIS 대원이 잠입해 있습니다.”

스웨이든이 바라보는 앞에서 도이슨은 태블릿의 화면을 엄지와 검지로 확대시켰다.

한반도의 모양이 바로 서울로 확대되었다.

“위성에서 파악한 이동경로가 이곳에 완벽하게 표시됩니다.”

“그렇군요. 아프리카는 어떻게 되었소?”

“서울과 같은 시간에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거요. 그쪽은 서울과 비교도 안 될 무기들이 건너갔기 때문에 그의 꿈도 이쯤에서 마무리되리라 믿소.”

스웨이든이 만족한 얼굴로 태블릿에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았다.

***

서울로 향하는 길에서 강찬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강찬입니다, 대사님.”

[지금 서울로 비행 중입니다. 우즈만이 도착할 때쯤이면 나 역시 인천공항에 도착할 겁니다.]

약속이 없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심장이 위험을 알리는, 그것도 가까운 누군가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는 마당에서 라노크가 느닷없이 방문한다는 거였다.

[서운합니다.]

“대사님. 지금은 위험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우즈만 역시 그 정도의 위험은 감당할 각오를 하고 있지요.]

도대체 강찬이 모르는 위기와 위험을 어떻게 안다는 거지?

“위험하다니요? 혹시 짐작하는 일이 있으십니까?”

[미국의 대통령이 방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전에 미국 NSA(국가안전국)과 DIA(국방부 정보국)에서 바실리에게 한국의 도움과 계획에 협조하지 말아달라는 청을 한 사실도 있지요.]

강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프랑스 정보총국이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런데 왜 바실리는 입을 다물었을까?

[상황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나직하게 말을 건넨 라노크가,

[강찬 씨.]

친근하게 강찬을 불렀다.

[바실리가 공식 방한을 요청할지 모릅니다.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개인적으로 하는 마지막 부탁이 될지 모릅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왜 하필이면 마지막 부탁이란 말을 했고, 왜 그 순간에 잠잠하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건지.

“대사님. 위험할지 모릅니다. 제 본능이 이번 방문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위기에서 한결 같은 사람만이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강찬 씨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강찬의 만류를 라노크가 덤덤하게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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