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역사의 시작. (2)
손으로 지도를 펼친 박철수가 원을 그리듯 검지로 지도의 중간을 가리켰다.
“우리는 이 지역을 먼저 점령해야 합니다.”
제라르나 안철호는 당연히 박철수가 가리키는 지형을 알고 있다.
본진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
안철호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적들은 분명 이곳에 박격포와 저격수를 배치할 겁니다. 이곳이라면 전차까지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고, 헬기의 지원도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습니다.”
설명을 마친 박철수가 다시 검지로 이동 경로를 가리켰다.
“우리는 이 길을 통해 이동해야 합니다. 그러니 적은 이곳을 통과하는 길 양쪽 산에도 반드시 인원을 배치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더라니.
안철호는 새삼 박철수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하는 게 최선일까?
안철호가 보기에 가장 효과적인 전술은 당연하게 아군의 특수팀이 숨은 적을 제거하는 거였다.
그것도 양쪽을 동시에 공략해야 한다.
북한군이 박격포와 저격수 쪽을 맡고, 차동균의 특수팀이 진입로 양쪽에 숨은 적을 제거하려면?
뭐라고 해도 북한군의 상당한 희생이 불가피해 보였다.
‘결국, 우리를 이렇게 이용해 먹겠다는 건가? 지역을 바꾸면?’
잠시 지도를 보았던 안철호의 얼굴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분명하게 피어올랐다.
차동균과 목표 지역을 바꾸어도 희생은 비슷하게 발생할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겠구만요.”
그가 다부진 표정으로 각오를 뱉어낸 다음이었다.
“우리 특수팀 대원 한 명당 북한군 병사 다섯 명을 묶어주고, 명령권을 주십시오.”
박철수가 뜻밖의 요청을 건넸다.
“우리 대원들이 이곳의 네 곳과 진입로 양쪽을 일제히 치고 들어가는 동안, 엄호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기카면 차동균 씨의 대원들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는 맡을 수밖에 없는 임무입니다.”
“보십시오, 장군 선생님. 우리 대원들도 그 정도로 용맹하단 말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한쪽을 맡으면 어떻겠습니까?”
위험한 임무를 도맡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안철호는 오히려 임무를 나누자고 나섰다.
“동시에 작전을 수행하려면 손발을 맞춰왔던 대원들이 앞서서 움직이는 게 좋습니다.”
“병력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희생을 줄일 가장 좋은 방법을 찾은 겁니다.”
안철호는 그만 말문이 콱 막혔다.
차동균이 그렇더니 박철수도 북한군을 한 식구로 대우하고 있었다.
그 사이 박철수는 제라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반둔두 외곽 도시들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필요한 인원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쪽은 게릴라 전에 능한 반군들이 많습니다. 적어도 3만 명은 있어야 치안을 보장할 수준이 됩니다.”
제라르가 알아듣기에 지장 없는 우리말로 답을 건넸다.
“우리는 이곳의 게릴라전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북한 병력과 함께 반둔두 주변 도시를 장악해주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치안유지, 정부군과의 협조까지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박철수의 지시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라르가 먼저 답을 했고,
“장군 선생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안철호가 단단한 음성으로 답을 건넸다.
“작전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북한군 지원 병력은 두 시간 내로 선발해 주시고, 공략 시간은 후에 결정되는 대로 따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작전 회의가 끝났다.
제라르가 먼저 막사를 나섰고, 뒤따라 안철호가 북한군 지휘관들과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막사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이제부터는 증평의 특수팀이 어떻게 움직일지 세부계획을 세워야 할 때였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그때쯤 박철수의 부관이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강철규 선배가 깨어났습니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런데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었다.
그에게 전해야 할 아픈 소식 때문이었다.
“제가 먼저 가보겠습니다.”
박철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차동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철규는 꼬박 하루 만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곽철호가 위기를 넘겼다는 말을 먼저 들었고, 이어서 남일규가 사망했다는 잔인한 소식도 들었다.
“이걸 빼줄 수 있겠나?”
“지금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군의관이 난색을 표했으나 강철규는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차동균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군의관이 강철규의 몸에 꽂혀있던 링거와 기계장치들을 떼어냈다.
강철규는 모포를 걷고 바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고통이 엄청날 거였다.
가슴에 박혔던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아서, 그가 침대로 내려오는 순간에 붕대 위로 붉은 피가 삽시간에 번져 나왔다.
그런데도 강철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내려와 병실을 나섰다.
멋진 복장 아니다.
늙은 몸에 가슴에는 붕대만 감았고, 아래로는 헐렁한 환자복을 입은 데다, 슬리퍼를 신었다.
그러나 강철규의 자세만큼은 꼿꼿했다.
굳은 얼굴에 걱정을 한껏 담은 차동균이 옆을 따라 걸었는데, 강철규는 간이 병동을 나서 피처럼 붉은 반둔두의 노을 속에서 걸음을 멈췄다.
“담배 있나?”
강철규를 힐끔 보았던 차동균이 나직한 한숨과 함께 담배를 꺼내주었다.
철컹. 치이익.
강철규는 겨우 한 모금 피운 담배를 반둔두의 땅을 헤집고는 그 위에 향처럼 꽂았다.
바람이 없는 저녁이었다.
담배의 하얀 몸뚱이가 노을을 맞아 피처럼 붉게 빛났으며, 그 위에서 진한 연기가 한 줄로 피어올랐다가 머리쯤에서 엷게 흩어졌다.
수술 자리가 다시 찢어졌는지 몸을 일으킨 강철규의 붕대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래놓고 나더러는 이곳에 남아 있으라고 매달렸던 거구나.”
차동균은 답을 할 뻔했다.
그런데 붉게 물든 강철규의 눈이 반둔두 땅의 끝을 향해 있었다. 그는 분명 저 하늘 어딘가에 있을 남일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거였다.
“불행한 시대를 함께 살았지만, 희망을 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하자.”
길게 올라오던 담배 연기가 구불거렸다가는 흔들리는 것처럼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고맙다.”
울음을 참는 강철규는 처음 보았다.
양동식을 잃었을 때도 번들거리는 눈을 했던 그가 지금은 울음을 참느라 이를 악물며 입술에 힘을 꾹 주고 있었다.
“동식이랑 있어라. 내가…….”
차동균은 대한민국 특수팀의 전설이 토해내는 아픔을 보았다.
힘없는 시대였었다.
그런 이유로 잔인하게 버려졌는데도 끝까지 대한민국과 태극기를 위해 싸웠던 이들이었다.
눈물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차동균은 강철규가 울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대한민국 특수팀 전설이 토해내는 슬픔을 들여다보기 미안해서 차동균은 시선을 멀리 들었다.
지평선 위로 길게 늘어진 얇은 구름과 피처럼 붉은 노을, 향을 대신해 땅에 묻혀 연기를 피워내는 담배.
병실에 들렀던 박철수가 막사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무슨 일인가 했던 대원들이 하나둘 나와 강철규와 차동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안철호가 막사에서 나왔고, 북한군 수만 병사들도 이상한 낌새에 밖으로 나왔다.
아팠던 시절 대한민국 특수팀의 전설과 본인은 모르지만, 현역 최고의 특수팀 지휘관으로 꼽히는 차동균이 노을 속에 있었다.
이상하게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사람마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와서 마른침을 삼켜댔다.
노을이 피처럼 붉어서 그랬는지, 땅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이국만리 아프리카여서 그런지는 확실하게 알기 어려웠다.
**
남일규의 장례식은 삼엄한 경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그토록 따랐던 강철규와 피붙이처럼 아꼈던 증평의 대원들은 참석하지 못하는 장례식이었다.
비번인 대원들과 요원들이 줄지어 들어왔는데 상황이 상황이라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바로 돌아섰다.
무엇보다 비상경계 중이어서 근무에 지장이 없도록 무리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이유 때문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오광택이 상주 자리를 지킨 가운데 남일규는 후배들을 대할 때의 표정을 사진에 담고서 제단 위에 있었다.
차동균이 아프리카에 임시 분향소를 만들겠다고 했으니, 먼 그곳에서 후배들의 모습을 봤을지는 모르겠다만, 하여간 장례식은 그런 모습이었다.
강찬은 가장 먼저 향을 사르고 두 번 절했다.
‘편히 가세요. 무거운 짐, 제게 주고 홀가분하게 가세요.’
하고 싶은 말은 병원에서 이미 했었다.
강찬이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선배님을 부탁드립니다.’
사진 속의 남일규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원들과 요원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오광택은 죽어버린 사람처럼 그들을 맞았고, 맞절을 하며 예의를 지켰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때 김태진이 들어섰다.
제단 위에 있는 남일규를 본 그가 있는 힘을 다해 울음을 참으려 애썼는데, 오광택이 부른 “대표님!”하는 말에 그만 그는 바보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황량한 몽골에서 의지가 되었던 세 사람이 모였는데 한 명은 제단 위에 있는 거였다.
몽골에서 함께했던 시간이 떠올랐고, 김태진의 울음을 보자 남일규의 죽음이 실감 난 모양이었다.
“으아아-!”
그때부터 오광택이 커다랗게 울어댔다.
“씨발! 형님이 죽었습니다! 니미! 오광택이 앞에서 칼에 맞았어요! 으아!”
굵디굵은 남자들의 울음이었다.
“흐휴!”
석강호가 고개를 모로 틀며 욕을 뱉어냈는데 중간중간에서 대원들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후우.”
겨우 울음을 삼킨 김태진이 붉어진 눈으로 강찬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마침 몽골로 돌아가던 길이라 공항에서 바로 이리 왔다.”
말은 않지만, 가슴에 담긴 사람을 잃을 때마다 강찬이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익히 아는 김태진이다.
그는 안쓰러운 얼굴로 강찬을 보았다.
“앉으세요.”
직접 보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자리를 권하는 강찬을 보며 김태진은 ‘더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무엇보다 전성기의 강철규를 연상시키는 강렬하면서도 깊은 눈빛이 그랬다.
요원이 분명한 남자가 가져다준 커피를 앞에 두고 김태진과 강찬은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우! 엄청나군.”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놀라움을 이기지 못한 감정을 그렇게 쏟아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아프리카를 유럽 연합처럼 하나로 묶을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라니.
“도와주시겠어요?”
“자네가 원한다면 나는 무조건 그 계획에 합류하겠다.”
김태진은 그 자리에서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부족한 인원, 앞으로 들어가야 할 막대한 자금, 그밖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하나둘이 아닌 거, 누구보다 잘 아는 김태진이다.
둘 중 하나일 거다.
진정한 아프리카의 절대자로 우뚝 서거나, 아프리카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거나.
내기를 하라면 김태진은 앞쪽에 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쭉 봐왔던 강찬이다.
김태진이 아는 한, 뒤쪽에 배팅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
김태진은 발인까지 자리를 지키겠노라 했다.
석강호와 함께 그가 움직이자 강찬은 밖으로 나섰다.
장례식장 주변 건물 옥상마다 대원들이 있을 거고, 그들은 강찬이 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 날카롭게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거였다.
미안하다.
그들의 수고가 안쓰럽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나서줘야 했을 늙은 병사의 초라한 장례식이다.
이러지 않아도 남일규는 서운해하거나 화내지 않을 거다.
후배들을 쉬게 하라고 멋쩍게 웃을 사람이다.
그가 어떤 것을 바라더라도 우리 이 정도 수고는 아끼지 말자.
이것이 우리가 이 정도를 누릴 수 있도록 희생한 그들에게 보이는 마지막 예의이니까.
강찬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멀리서 최종일과 우희승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전화기를 들고 있어서인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찰칵.
“후우.”
강찬은 길게 담배 연기를 뿜으며 하늘을 보았다.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지켜보세요.’
강찬은 전화기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서너 차례 울린 다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위원장.]
연륜이 가득한 음성이 전화기를 타고 건너왔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이를 먹으면 바쁘게 움직이기보다는 한쪽에 물러나 지켜보는 게 좀 더 편해지지요. 나는 그렇게 지냈습니다.]
어쩐지 도를 닦는 사람이나 할 법한 대꾸에 강찬은 나직하게 웃었다.
“우즈만.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아프리카를 향해 부는 바람 때문인가요?]
확실히 연륜 있는 이들의 눈과 귀, 그리고 그들의 통찰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이미 많이 밀려났지만, 도움될 일이 있다면 기꺼이 움직이겠소. 어디에서 보는 것이 좋을까요?]
“정하시는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흠. 앞으로 일주일은 움직이기 어려울 테니 내가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남일규의 일을 알고 있는 듯한 우즈만의 답이 있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강찬은 그렇게 전화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