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역사의 시작. (1)
강찬과의 전화를 마친 박철수는 곧바로 막사를 나섰다.
지프가 대기하고 있는데도 그는 차동균과 함께 걸어서 이동했다.
“잠깐 멈춰.”
완전무장한 차동균과 권총 한 자루 허리에 건 박철수다.
대신 박철수는 손에 다섯 장의 지도를 들었다.
둔덕의 아래에서 지도를 펼쳐 든 박철수는 주변을 커다랗게 둘러보았다.
“너는 저쪽에서 들어왔을 거 같은데?”
“그렇습니다.”
“올라가 보자.”
쩔걱. 쩔걱.
경계를 서던 북한군 병력이 대놓고 바라보고 있는데도 박철수는 상관없다는 것처럼 반군들이 버텼던 폐가까지 바로 걸었다.
야산의 꼭대기처럼 사방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저쪽과 저 끝에서 엄호했겠구나. 그리고 이쪽으로 바로 달려왔을 테고.”
“그랬었습니다.”
박철수는 마치 전투 현장을 지켜보았던 사람처럼 유탄발사기를 날린 양쪽 끝과 강철규가 달려온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박철규가 다시 걸었다.
그는 담벼락을 살핀 뒤에 장군이란 계급에 어울리지 않게 담벼락에 매달려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차동균은 이런 거 주저할 군인 아니다.
그는 박철수와 보조를 맞추며 바로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담의 안쪽을 지키고 있던 북한군 병사 두 명이 이게 뭔가 하는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여기쯤 저격병이 있었을 텐데?”
지도에서 고개를 든 박철수가 담벼락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여기입니다.”
차동균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 움푹한 구멍이 있어서 박철수가 그리로 고개를 디밀었다.
“박격포 부대는?”
“저쪽이었습니다.”
차동균이 앞서 걸었고, 박철수가 뒤를 따랐다.
“이곳에서 박격포를 발사했고, 저쪽에 포탄이 있었습니다.”
박철수가 고개를 끄덕인 직후였다.
담벼락을 돌아 북한군 소좌 안철호가 다가왔다.
“장군님. 북한군 지휘관 안철호 소좌입니다.”
“박철수요.”
“안철호입니다.”
박철수가 먼저 손을 들어 경례를 하자 안철호가 얼른 모자의 챙 끝부분에 손을 올렸다.
손을 내리는 것도 박철수가 먼저였다.
“장군 선생님이 오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혹시 경계 상태에 문제가 있다면 내게 바로 말씀해주면 됩니다.”
인사도 하기 전에 이렇게 둘러보는 이유를 따지는 듯한 말이었다. 그러나 박철수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처럼 지도를 펼쳤다.
“안철호 소좌.”
“말씀하십시오.”
안철호는 줄곧 박철수를 보고 있었다.
“반둔두의 진입로를 확보하는데 우리 병력 사망 69명에 부상 32명입니다. 인사보다 왜 우리 병력이 희생된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안철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박철수를 보았다.
그가 말한 사망자와 부상자가 남북의 병력을 합친 숫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분석을 통해서 반둔두 본진을 공략할 때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것이 내 임무라고 믿었습니다. 우선 살펴보고 제대로 된 인사는 그때 하겠습니다.”
차동균을 보았던 안철호가 볼을 씰룩한 뒤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장군 선생님. 우리끼리 있을 때는 말씀을 편하게 하십시오. 그래야 내가 차동균 씨와 편하게 지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카고 인사는 이미 했습니다. 그럼 일 보십시오.”
말을 건넨 그는 바로 손을 올려 경례를 마치고는 몸을 돌렸다.
잠시 안철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철수가 다시 지도에 시선을 돌렸다.
“차동균.”
“대위 차동균.”
“부원장은 대한민국과 이곳을 노리는 적이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영국, 이스라엘과 같은 국가라고 판단하고 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어제의 교전에서 수상한 점이 많았습니다.”
힐끔 차동균을 본 박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다. 남북한이 하나로 합쳐도 힘겨운 전쟁. 우리가 이곳에서 밀리면 우리의 조국이 전쟁에 휩싸인다. 우리는 반드시 이곳에서 이 전쟁을 끝마친다.”
차동균의 답을 바라는 말이 아니었다.
말을 마친 박철수는 굳은 얼굴로 반둔두를 바라보았다.
**
강찬은 국가정보원 지하 회의실에 있었다.
강찬과 고건우, 그리고 김형정, 이렇게 세 사람이 전부였다.
“강대국의 연합 세력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우리는 아직 그들을 감당할 힘이 부족합니다. 만약, 제가 당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차세대 발전 시설의 정식 가동이 시작되면 영국은 반드시 우리 땅에 지진을 일으킬 겁니다.”
고건우는 국가정보원 원장이다.
누구보다 양범이 구금된 일과 프랑스 정보총국, 일본 정보국의 일들을 자세하게 아는 인물이었다.
“부원장이 이렇게 말할 때는 방법도 강구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부원장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숨겨졌던 적의 실체가 강대국의 연합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고건우는 어지간한 말에 놀라지 않겠다는 것처럼 굳은 표정이었다.
“반둔두를 점령하고 나면 그곳에 차세대 발전 시설을 짓고 싶습니다.”
그러나 강찬의 말이 떨어진 직후에 고건우의 볼이 씰룩하고 움직였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그 일이 우리의 기술만으로 가능합니까?”
“프랑스의 연구진이 협조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번 질문에는 김형정이 답했다.
“흠.”
고건우는 잠시 시선을 떨구어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와 경제 협력을 체결하기는 했습니다. 부원장은 혹시 그런 일들을 추진할 때 지금의 사태를 생각했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부원장 말대로라면 아프리카에 있는 우리 군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강대국의 연합군을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숫자입니다.”
김형정을 바라보았던 고건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대통령님의 임기가 6개월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추가 파병은 한계가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 역시 생각해두었다는 것처럼 강찬은 바로 말을 이었다.
“아프리카에 파병되었던 우리 병력을 최대한 이용하겠습니다. 이미 박철수 장군이 전권을 위임받았으니 박 장군을 통해 지휘하면 될 것 같습니다.”
“흠.”
“반둔두에 차세대 발전 시설을 짓겠다고 발표하면 아프리카의 모든 정부가 달려들 겁니다. 이미 수교와 경제 협력을 체결해 두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도 없습니다.”
고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실의 탁자는 간격이 넓다.
중앙 벽에 커다란 스크린이 있고, 자리마다 얇은 마이크 장치가 있으며, 입구의 문은 은행 금고만큼이나 두껍다.
“부원장은 아프리카에 갈 생각이군요.”
정장에 줄무늬 넥타이를 한 고건우가 무겁게 꺼낸 말이었다.
“대통령님의 임기가 끝나면 다음 통치권자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릅니다. 강대국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고성의 차세대 발전 시설을 매각할 수도 있고, 원장님을 교체할 수도 있습니다.”
듣기에 아프지만 사실이었다.
고건우는 굳은 얼굴로 강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프리카에 단단한 기반을 잡아놓으면 누가 다음 통치권자가 되던 함부로 포기하겠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부원장. 6개월 뒤에 철수 명령이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 안에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없도록 만들면 됩니다.”
고건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김형정을 보았다.
강찬의 이 말이 새 나간다면 자칫 커다란 후폭풍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연합을 구성할 계획입니다.”
그때 불쑥 나온 강찬의 말이 고건우의 시선을 잡아갔다.
“반군들을 제거하고, 확실한 정부를 수립한 뒤에 그들과 연합을 구축할 생각입니다. 유럽 연합과 같이 같은 화폐, 여권 없이 이동, 그리고 연합 법률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허를 찔린 사람처럼 고건우가 “하아.”하고 탄식을 쏟아냈다.
“전기의 무한 공급, 확실한 치안이 보장된다면 아프리카에서 연합에 가입하지 않을 나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차세대 발전 시설을 발표해 주시고, 6개월 동안 병력을 빼지 않는다면 가능합니다.”
“부원장.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혹시나 다음 정권이 부원장과 우리 군에게 아프리카에서 철수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원장님. 한 나라라도 연합에 가입하겠다고 하면 나는 그들을 지켜야 합니다. 나를 믿어준 정권을 외면하게 되면 그들은 강대국의 연합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할 테니까요.”
아직 고건우가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고건우와 김형정이 긴장한 얼굴 앞에서 강찬은 각오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북한의 병력을 이용하겠습니다.”
고건우는 강찬의 답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변화 없는 그의 표정과 눈빛이 그랬다.
“필요하다면 프랑스의 힘을 빌려서라도 제 계획대로 일을 처리할 생각입니다.”
“대한민국을 포기하겠다는 말입니까?”
강찬이 입술 한쪽을 들어 웃었다.
“아프리카를 포기하는 순간에 고성은 지진으로 없어집니다. 그다음은 중국이 등을 돌리고, 일본이 우리를 노리며, 미국과 영국이 압박합니다. 그래도 살아날 방법이 있다면 거기에 따르겠습니다.”
고건우가 신음 같은 한숨을 뱉은 다음이었다.
“그렇게 고개 숙이면 적들은 또다시 비무장팀 같은 대원들처럼 증평팀 대원들을 내놓으라고 할 겁니다. 그다음은요? 또다시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는 것 말고 있습니까?”
고건우는 답을 하지 못했다.
“불행한 과거를 짊어지고 가겠다던 나이 든 병사가 마지막까지 임무를 수행하다 사망했습니다. 태극기를 팔에 달았다고 울먹이던 그 사람이 바로 대한민국이 외면했던 우리 군인이었습니다.”
“남일규 요원의 일은 유감입니다.”
고건우의 묵직한 답이 있고 난 다음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전쟁을 아프리카로 가져가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강대국이 노리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김형정이 눈치를 살필 정도로 오늘 강찬은 평소와 달랐다.
“한국이 나를 버린다고 해도 나는 대원들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태극기를 외면하지 못합니다. 나는 그들과 아프리카에서 싸우겠습니다.”
강찬의 말이 끝나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대통령님과 의논 후에 연락하겠습니다.”
그리고 고건우의 말을 끝으로 힘겨웠던 면담이 끝났다.
**
전투 현장을 둘러본 박철수는 남북한의 간부들과 제라르를 막사로 불렀다.
그는 지도를 펼쳐 가운데 탁자에 펼쳐놓았다.
장군이 불렀다.
그런데도 준비된 것은 달랑 물 한 병씩이 전부였다.
“여기 반군에 정규군이나 특수군이 함께 있었다고 봅니다.”
말을 마친 박철수가 처음 증평 팀이 들어왔던 경로에 검지를 찍었다.
“우리 대원들이 들어올 곳이 이곳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박격포로 후속 부대의 진입을 악착같이 막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북한의 병력을 막고 싶었을 테니까요.”
안철호가 지도에 고개를 숙이고 박철수가 가리킨 지점에 시선을 주었다.
“여기에서부터 뒤쪽으로는 몸을 숨길 곳이 없기 때문에 우리 대원들은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철호 소좌가 반군을 맡았다면 이곳을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저격병을 꽂아야지요.”
박철수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정확한 판단입니다. 저격수가 있다면 이 길을 뚫는 대원들을 확실하게 노릴 수 있었겠지요. 우리 쪽에 강철규 선배가 없었다면 아마 희생이 제법 컸을 겁니다.”
이번에는 안철호가 고개를 끄덕인 뒤에 입을 열었다.
“박격포를 계속 쏴대니까 우리 쪽은 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차동균 씨가 빨리 막아주지 않았다면 우리 병사들의 피해가 지금보다 많았을 게 확실합니다.”
“장갑차의 진입로를 막아놓은 것도 이걸 위해서일 겁니다. 밤이 되면 뒤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고, 헬리콥터의 지원이 온다고 해도 저격수와 기관총으로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지요.”
안철호가 지도에서 시선을 들었다.
“앞으로 벌어지는 전투는 정규군을 상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반군의 진압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의미입니다.”
“기카면 어쩌면 좋겠습니까?”
짧은 만남과 지금의 대화에서 안철호는 이미 박철수를 인정하는 눈치였다.
“이게 반둔두의 지형도입니다.”
박철수는 뒤편에 두었던 지도를 꺼내 들었다.
손으로 펼치듯이 지도를 문지른 박철수가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아마 반군들은 이쪽에 몰려서 또 비슷한 방식을 취할 겁니다. 우리 대원들이 먼저 들어가고, 뒤에 북한 병력이 지원하는 형태인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간나 새끼들…….”
씹듯이 욕을 뱉어낸 안철호가 답을 요구하는 눈으로 박철수를 보았다.
“괜찮다면 우리도 북한 병력에 우리 대원들을 섞는 방법으로 진격했으면 합니다.”
“지휘는 남조선의 대원들이 하겠구만요?”
“그 방법이 효과적이니까요.”
차동균을 힐끔 보았던 안철호가 다부진 눈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혹시 반둔두 본진을 공략할 전술도 생각해두셨습니까?”
박철수는 대답 대신 새로운 지도를 탁자 위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