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2부)-48화 (467/520)

제4장. 불행했던 과거는 놓고 가세요. (1)

차동균의 전화를 받은 강찬은 병원 현관 바깥에 걸터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위독하다고 들었다.

이제는 정말 강해진 차동균이 풀이 팍 죽은 음성으로 전한 말은 그랬다.

“무슨 일이요?”

“반둔두 진입로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영감과 곽철호가 총상을 입었고, 두 사람 모두 의식이 없단다.”

석강호가 무거운 눈으로 강찬을 바라보았다.

화를 내는 것도, 슬픈 것도 아닌 덤덤한 얼굴과 음성으로 내용을 전해주는 강찬이 염려돼서였다.

“아까 그놈들 말이다. 눈알이 빨갛던데, 그놈들 대가리를 움켜쥘 때도 꼭 블랙헤드의 에너지를 상대하는 것 같았고. 너는 괜찮았냐?”

“나도 좀 의심스럽기는 했소. 그런데 나야 뭐 그 돌멩이 마주쳐도 워낙 아무 일 없었잖소?”

강찬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시선을 들었다.

“그놈들 정체는?”

“관광비자로 들어왔습니다. 다섯 명 모두 같은 비행기로 입국했고, 호텔까지 확인했는데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국적은?”

“러시아로 되어 있었습니다.”

피식 웃은 강찬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괜찮은 거요?”

“뭐가?”

“이 정도면 두 대를 때려주겠다고 나서야 하는데 그렇게 덤덤하니 있으니까 걱정돼서 그렇수.”

고개를 가로 저은 강찬은 한숨을 푹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하늘에 대고 맹세한 게 있거든.”

최종일과 손에 붕대를 감은 우희승, 턱 아래 거즈를 붙인 이두희까지 강찬의 다음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찬은 거기까지만 말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평소라면 궁금하다고 달려들었을 석강호마저 침묵을 지키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금 강찬의 눈빛에 담긴 각오를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전투 이후부터 지금껏 양동식은 꼼짝도 않고 강철규의 곁을 지켰다.

침대 위쪽에 매달린 링거와 혈액 팩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약과 혈액, 심장 박동을 그려내는 기계들이 아직 강철규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전부였다.

양동식은 아직 얼굴에 묻은 흙먼지와 시커먼 그을음조차 지우지 못했다. 그런 몰골을 하고서도 수술 때부터 지금껏 강철규를 지키고 있는 거였다.

“저는 아버지를 뵌 적이 없습니다.”

마치 강철규가 듣고 있다는 것처럼 양동식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답니다. 그래서 사진으로만 봤습니다. 허리에 손을 짚고 선 사진들이 전부인데, 저는 그래서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처럼요.”

차동균이 들어왔다가 양동식의 모습을 보고 입구에 잠시 멈췄다.

“선배님 말씀을 듣고 증평 특수팀에 오는 게 제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선배님의 전설을 듣고 나면 아버지를 뵙는 것 같았습니다.”

어쩐지 밥상에 마주 앉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건네는 듯한 말투였다.

“저 때문에 못 피하셨다는 거 압니다.”

양동식이 시선을 돌려 붕대를 감아놓은 강철규의 가슴을 보았다.

“수류탄을 던질 시간에 피하셨다면 분명 이런 일 없으셨을 겁니다. 저더러 밖으로 뛰라고 할 시간이면 선배님은 얼마든지 총구에서 빠져나오셨을 거라는 거? 저 다 압니다.”

말을 마친 양동식이 다시 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강철규에게 시선을 돌렸다.

“염치없지만 이번만큼은 일어나 주십시오. 선배님의 희생으로 제가 살아났다는 생각에 견디기가 너무 힘듭니다. 괜히 제가 나서서 선배님을 이렇게 만든 것 같아서 정말 너무…….”

말끝을 삼킨 양동식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쯤 차동균이 양동식에게 다가갔다.

급하게 일어서려는 그의 어깨를 차동균이 다독였다.

“강한 분이다. 분명 일어나실 거다. 그러니까 이제 가서 씻고 밥도 먹고 해.”

“조금만 더 있다가 가고 싶습니다.”

차동균은 양동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이 진정 원하는 후배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오늘의 전투 경험을 통해서 다음에는 알아서 피하는 군인이 되라. 그리고 그 경험을 아래로 내려줘라.”

양동식의 볼이 씰룩한 다음이었다.

“선배님이 바라는 양동식은 그런 모습일 거다. 마음이 약해서 병상을 떠나지 못하는 군인이 아니라.”

답은 없었다. 그런데도 차동균은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다시 양동식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네가 진짜 특수팀의 대원이 되겠다는 각오를 보여드려. 선배님이 원하고,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말이다.”

잠시 시선을 떨구었던 양동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양동식은 그렇게 병실을 나섰다.

강찬은 남일규의 침대 옆에 앉았다.

호흡기가 강제로 숨을 밀어 넣는 것처럼 움직였고, 띡띡 거리는 기계가 힘겹게 남일규의 심장 박동을 그려내고 있었다.

링거와 혈액 팩에서 방울방울 약과 혈액이 떨어져 내렸다.

남일규도 늙었다.

늘 강철규의 옆을 지키며, 후배들에게는 다정한 선배였던 남일규가 늙은 모습으로 침대에 있었다.

힘이 없는 나라의 군인이면서 후배를 지키겠다고 서울구경이라는 독한 수단을 생각해 낸 남자.

발전하는 후배들의 모습을 그토록 기뻐하면서, 그런 후배를 건드린 적들을 절대 용서하지 못하던 선배가 늙은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거였다.

‘불행했던 과거는 우리가 지고 갈 테니 너희는 당당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강찬은 언젠가 강철규가 독백처럼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염병할!

불행한 과거가 있으면 털어내서 없애버려야 하는 거지, 그게 뭐 좋은 거라고 짊어지고 가겠다는 건지.

석강호, 유헌우, 최종일, 우희승, 이두희, 그리고 뒤늦게 달려온 오광택이 말없이 강찬과 남일규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삐이이-.

힘겹게 남일규의 심장 박동을 그려내던 기계가 할 일을 마쳤다는 것처럼 길게 울었다.

피를 넣었는데? 왜?

강찬은 유헌우를 돌아보았다.

이럴 때는 심장도 좀 누르고, 전기충격기인가 그런 거 가슴에 대고 펑펑 충격도 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유헌우는 침울한 표정으로 침대로 다가와 남일규가 덮고 있던 얇은 모포를 들어 그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강찬은 여전히 덤덤한 얼굴이었다.

“다예.”

“예.”

남일규가 죽었다.

그래서 유헌우가 그의 얼굴을 모포로 가렸고, 의료진이 조심스럽게 그와 연결되었던 기계들의 작동을 멈추고 있는 마당이다.

강찬은 덤덤한 얼굴만큼이나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음성으로 석강호를 불렀다. 분명하게 다예라고 불렀다.

“내가 하늘에 대고 맹세한 게 있거든.”

석강호가 긴장한 얼굴로 강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당하다 보면 언젠가는 너도, 제라르도, 최종일도 잃을 것 같다고. 그래서 이번 경고가 있을 때 결심하고 그걸 하늘에 대고 맹세했었다.”

유헌우가 손짓해서 의료진들을 빠르게 내보냈다.

그때 강찬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피식 웃었다.

“아예 땅덩어리를 갈라버릴 거다. 수천이 죽든, 수만이 죽든, 그건 모른다. 앞으로 대대손손 살인마로 기억돼도 상관없다.”

석강호의 볼이 씰룩한 다음이었다.

“개새끼들을 상대로 인간적으로 싸우겠다는 게 잘못됐던 거다. 다시는 이런 짓 못 하게 모조리 죽여줄 거다. 이런 짓을 꾸민 놈과 같은 땅에 사는 놈들 모두를.”

평소의 강찬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러나 석강호를 비롯해서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몇천, 몇만, 몇십만이 죽어도 상관없다. 다시는 이 땅이나 우리 사람을 노리지 못하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지옥 아니라 그 어디라도 가겠다.”

여전히 덤덤한 음성이었다.

그런데 이를 갈아대며 하는 말보다 더 섬뜩하고 무섭게 들렸다.

“너는 나와 함께 간다.”

“예.”

석강호가 다부지게 답을 한 다음이었다.

“최종일.”

“예.”

“가족들에게 작별인사하고 내일 아침에 돌아와.”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강찬이 손을 내밀어 모포 속에 담겼던 남일규의 손을 잡았다.

“불행했던 과거는 놓고 가세요. 우리가 다 지우겠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홀가분하게 가시고, 혹시 그쪽으로 엉뚱한 놈들이 가거든 서울구경이나 시켜주세요.”

말을 마친 강찬이 피식 웃었다.

“양 선배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혹시 영감님 가거든 이리 다시 보내주시고요.”

말을 마친 강찬은 아쉬운 얼굴로 남일규의 손을 놓았다.

강철규가 퍼뜩 눈을 떴다.

“선배님!”

말끔한 얼굴의 양동식이 벌떡 일어나 외쳤고, 그 소리를 들은 의료진과 차동균, 윤상기가 뛰어들었다.

“선배님! 정신이 드십니까?”

“일규가 여기 왔었나?”

“예?”

양동식은 강철규가 꿈을 꾸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여기 반둔두 임시 기지입니다.”

그래서 엉뚱한 답을 꺼내 들었다.

“차 대위. 반군 기지는?”

“반둔두 진입로를 확실하게 점령했습니다. 내일 중으로 박철수 장군님이 도착하고, 장갑차도 들어올 거라서 잠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고개를 세웠던 강철규가 통증을 이기려는 것처럼 이를 악물며 머리를 눕혔다.

“일규가 울면서 매달리던데, 꿈이었나?”

강철규의 말을 들은 차동균이 눈치 채이지 않게 침을 삼켰다.

“절대 여기 남아 있어야 한다고. 너무 생생해서. 일규가 토해내는 피를 보고 퍼뜩 정신이 든 건데.”

약 기운 때문인지 강철규는 혼잣말처럼 꿈의 내용을 떠들었다.

링거에 주사약을 넣은 의료진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될 거 같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좀 더 자도 되겠지?”

“한숨 주무십시오. 그러고 나면 더 좋아질 겁니다.”

차동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철규는 잠에 빠져들었다.

***

스웨이든은 뉴욕을 빠져나와 홍콩으로 향했다.

돈이 좋긴 좋다.

다윗의 별이 미국에 남긴 천문학적인 돈은 CIA에서 비밀 실험을 가능하게 했고, 또 스웨이든이 이렇게 마음 놓고 움직이게도 만들었다.

전용기 안에서 스웨이든은 전화기를 들고 나직하게 웃었다.

“그래도 가지 하나는 확실하게 잘라냈군.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아.”

[아프리카에도 좀 더 많은 무기와 병력을 지원할 거요.]

“한 방에 보내주자고. 그들을 집결시킨 곳에서 콰앙!”

스웨이든은 오른손의 손가락을 쫙 펴면서 폭탄이 터지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나는 한국에서의 다음 파티를 준비할 테니까 자네는 내가 원하는 무기들과 병력을 확실하게 지원해주길 원한다.”

[나, 드미트리는 비용을 제공하는 고객에게서 신뢰를 잃은 적이 없소.]

“기대하지.”

전화를 마친 스웨이든이 다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결과는 어떻게 됐소?]

“곁가지 하나를 확실하게 제거했다는 소식이오.”

수화기 너머에서 도이슨의 만족한 숨소리가 들렸다.

“이번 한국에서의 파티가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될 거요. 내가 볼 때 그 애송이는 이미 길을 잃었소. 여기에 제대로 한 방이 터지면 그는 반드시 외톨이가 될 거요.”

[그때쯤 한국에서 지진이 일어나게 된다는 뜻이군요?]

“하하하!”

스웨이든의 통쾌한 웃음이 자가용 비행기 안에 가득 퍼졌다.

“그 성격으로 봐서 지금쯤 엄청나게 흥분하고 있겠지. 아프리카에 나간 병력이 몰살되거나, 한국에서 두 명의 대통령이 사망하는 일, 그 중 어느 것이 일어나도 한국 국민은 그를 원망하고 외면할 게 틀림없소.”

[지진까지 일어난다면 그를 원망할 틈도 없을 거요.]

스웨이든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송이를 쓰러트릴 비장의 무기를 철저히 준비해 주시오.”

[알았소. 그런데 미국안전국에서 우리 정보국에 연락이 있었는데 조금은 조심할 필요가 있지 않겠소?]

“이번 일이 끝난 뒤에는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어 있을 테니 염려 마시오.”

전화를 끊은 스웨이든이 앞에 펼쳐놓은 랩탑을 들여다보았다.

“사무엘. 당신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내가 가진 이 녹음 파일을 이기지는 못할 텐데?”

그가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을 선택하자 두 사람의 대화가 랩탑을 타고 흘러나왔다.

- “당신이 원하는 것은?” -

- “국가안전부를 총괄하는 최초의 CIA 국장입니다.” -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 “감사합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

사무엘을 대통령이라 부른 스웨이든의 음성이 분명하게 흘러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