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혼자 남으시면 어쩝니까? (2)
길이 막혀서 좀 늦었다.
그래서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던 석강호와 우희승은 서둘러 백반집에 들어섰다.
가운데 숯불을 넣는 그런 둥그런 테이블이 놓인 가게였다.
남일규와 오광택은 들어서서 왼쪽에 보이는 술과 음료수를 넣어둔 커다란 냉장고 앞에 있었다.
“뭐야? 왜 전화를 그렇게 안 받았어요!”
“미안해, 석 팀장.”
“오랜만에 봐서는 꼭! 여기가 시끄러워서 그랬다니까요! 자네도 오랜만이야!”
남일규가 석강호를 맞았고, 오광택이 우희승에게까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밥 손님은 대강 빠져나가고 술 한잔 생각났던 손님들이 새롭게 자리를 메워서 가게 안은 주점 같은 분위기였다.
“얼른 오쇼! 이리 앉아요!”
오광택이 등받이 없는 둥그런 의자를 당겨 석강호에게 권한 다음이었다.
“밖에 두희 들어오라고 하지?”
석강호는 입구 쪽에 서 있던 우희승에게 말을 건넸다.
“두희도 왔소? 그럼 들어와야지!”
오광택이 바깥을 살피는 것처럼 상체를 기울일 때였다.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던 석강호의 눈에 서양인 다섯이 들어왔다. 좁은 식당 반대편 벽 테이블에 둘러앉았는데 맥주와 마른안주를 놓고 있었다.
스미든이 있다면 저럴 거다.
서양 남자라고 해서 이런 허름한 식당 못 오는 것도 아니고.
“뭐해요! 얼른 앉아요!”
오광택이 가져다준 의자에 앉으면서도 석강호는 서양 남자들 다섯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뭐가 있소?”
석강호의 시선을 따라 오광택이 고개를 돌렸고, 남일규는 상체를 비틀었다.
단단해 보이는 머리통과 목, 그리고 다부진 어깨.
석강호는 고개를 비틀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외형이 문제가 아니었다.
악취처럼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고약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당최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오광택과 남일규가 석강호의 표정을 보고 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고, 이두희와 함께 들어온 우희승이 고개를 돌린 직후였다.
눈치가 이상했던지 벽을 등지고 앉은 남자가 석강호에게 시선을 들었다.
피처럼 붉은 눈빛이었다.
그 순간, 석강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양 남자의 그 시뻘건 눈빛이 석강호의 심장을 예리하게 파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피식.
서양 남자가 입 끝을 들어서 웃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당장에라도 총을 뽑고 싶었다.
그런데 테이블 아래로 내려간 저놈의 손에 이미 총이 들려있는 것 같아서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석강호는 바보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번득이는 머리도 있었다.
‘남 선배를 납치하려고 기다렸던 거구나!’
만약 죽이려고 했다면 석강호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 바로 방아쇠를 당기고 말지, 이렇게 시간을 끌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방아쇠를 당기면 상황 끝이다.
아무리 지랄 같아도 이 상황에서 권총을 뽑는 건 미련한 짓인 거다.
“우희승. 할머니와 다른 손님들 내보내.”
석강호는 나직하고 무겁게 지시를 내렸다.
“무슨 일인데……?”
“오 사장. 내 말 듣고 할머니와 다른 사람들 빨리 내보내. 가능하면 같이 나가고.”
오광택은 함께 이미 작전을 뛰었던 사이다.
몽골에서도 있어 봤다.
석강호의 이런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아들었고, 남일규의 눈 끝이 쭉 찢어진 것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노인네! 여기 이 친구 따라서 잠깐 나가 있어!”
“왜 그래! 계란찜 맛있게 돼가는구먼!”
“나가라고! 그리고 거기! 손님들도 나가쇼! 지금까지 먹은 건 내가 다 낼 테니까!”
오광택이 인상을 벅벅 긁어가며 한 말이다.
거기에 인상 더럽기로 절대 밀리지 않는 석강호에, 다부지게 생겨 먹은 우희승과 이두희가 문 앞에 있었고, 당장에라도 목을 딸 것처럼 남일규의 눈이 번들거리는 상황이었다.
“나가라고! 씨발!”
오광택이 나직하게 으르렁대자 손님들이 쭈뼛거리며 가게 문을 나섰다.
끄드등.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서양 남자들이 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섯 명 모두 눈빛이 시뻘겋게 빛나고 있었다.
“왜 그래?”
“노인네! 나가! 제발!”
앞치마에 손을 닦은 주인 할머니가 안타까운 얼굴로 일 돕던 아주머니와 함께 문을 나섰다.
드르륵. 철컥.
노인네가 나갈 때까지 지키던 이두희가 문을 닫고서 안쪽 고리를 걸었다.
그 직후였다.
“쯧쯧.”
석강호와 눈을 마주 보고 있던 서양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 불쑥 손을 테이블로 올렸다.
석강호의 예상대로 권총이 들려있었다.
“씨발!”
오광택이 뱉어낸 욕이 소리를 모두 처먹고 사라진 것처럼 가게 안에 살벌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건충?”
벽을 등지고 앉은 남자가 뜻밖의 말을 던졌다.
석강호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본 그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건충 내 나라.”
석강호는 이제야 상대방의 말을 이해했다.
“씨발 놈들이 어디서 우리말을 엿같이 배웠네.”
지켜보던 오광택이 홱 욕을 뱉었는데 놈들은 석강호와 우희승, 이두희만 노려보고 있었다.
“권총 꺼내서 넘겨줘.”
석강호가 천천히 몸을 숙여서 발목에 권총을 풀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우희승과 이두희도 권총을 꺼내 들었다.
“저 새끼들 경찰이 와도 상관없다는 투다. 밖에 누가 있을 거고. 남 선배를 납치하려 했던 모양인데. 싸움이 시작되면 오 사장은 내 뒤로 나와.”
그동안 우희승이 풀어낸 권총 세 자루를 바닥에 놓고 발로 밀었다.
“왜 이래요? 총은 몰라도 칼은 안 밀려! 그리고 저쪽이 다섯, 우리가 다섯! 나더러 어딜 가라고.”
끄드등!
자리에서 일어난 오광택이 대놓고 주방으로 걸었다.
적들이 흥미롭게 지켜보는 앞이었다.
그는 주방에 도마 위로 손을 쭉 뻗었다.
“남 선배!”
오광택이 남일규를 향해 홱 칼을 던져준 직후였다.
터억!
남일규가 칼을 낚아채고는,
와락!
그대로 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
터컹! 터컹! 터컹!
왼쪽에서 유탄발사기의 방아쇠를 당겼고,
터컹! 터컹! 터컹! 터컹!
이어서 오른쪽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와락!
강철규는 소총을 오른쪽에 낀 채 앞으로 달려나갔다.
곽철호가 왼쪽, 윤상기가 오른쪽, 양동식이 뒤를 맡았다.
타다당! 타다다당! 타다당! 타다다다당!
반둔두의 허공을 가르는 것처럼 소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나왔고, 멀리 보이는 벽의 위쪽이 거칠게 터져 나갔다.
50미터다. 50미터의 거리를 강철규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철컥! 푸슝! 푸슝! 푸슝!
담벼락의 위로 머리가 불쑥 올라왔다가는 강철규의 사격에 아래로 사라졌고,
투두둑! 투두두두둑! 투두둑!
이어서 적이 쏴대는 AK 소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비무장지대의 숲에 몸을 숨긴 채 달리는 거 아니다.
당당하게 태극기 달고, 적을 향해 뛰어간다.
군인 강철규가 말이다.
30미터쯤 남았다.
타다다당! 타다당! 타다다다다당!
아군의 엄호 사격을 믿고 달리는 길이다.
저 담벼락만 넘으면, 그래서 박격포만 잡을 수 있다면 반둔두의 입구가 아군의 손에 넘어온다.
그래야 북한군 병사들의 피해도 줄인다.
후욱. 후욱.
강철규는 달리는 와중에 호흡 소리를 들었다.
거친 망에 걸린 것처럼 갈래갈래 쏟아지는 햇살, 눅눅한 구름, 아군의 사격에 터져 나가는 회백색 벽, 적이 갈기는 AK 소총에서 피어난 연기까지.
20미터쯤 남았다.
군화에 밟히는 바닥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몸에 매달린 무기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곽철호와 윤상기, 그리고 양동식의 거친 호흡 소리도 모두 들었다.
그때 담벼락 위로 적의 머리통이 불쑥 올라왔다.
철커-억!
강철규는 소총을 어깨에 겨눈 채 앞을 노려보았다.
푸슝! 푸슝! 푸슝!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적의 머리가 피를 뿜으며 떨어져 내렸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해내며 강철규는 타고 넘을 담벼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이를 악물었다.
총알 맞은 자리인 줄 알았다.
회백색 담벼락에 뻥 뚫린 구멍 말이다.
그러나 그 구멍에서 불쑥 나온 건 분명 소총의 총구였다.
함정이거나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달려올 것을 기다렸다는 의미도 된다.
15미터쯤 남았다.
여기서 방향을 틀면 강철규는 살아난다.
아마 그럴 거다.
대신 곽철호와 윤상기, 양동식 중 한 명은 무조건 머리나 심장이 터져 죽는다.
특히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양동식은 피할 곳조차 없다.
그냥 죽을 줄 알아?
강철규는 상체를 비틀며 고함을 질렀다.
“옆으로 벌려!”
그리고는 왼손으로 가슴에 걸었던 수류탄을 낚아챘다.
“동식아! 옆으로 달려!”
티잉!
그가 엄지로 안전핀을 뽑아냈을 때였다.
부슈-웅! 퍼억!
섬뜩한 저격용 소총 소리와 함께 그의 상체가 커다랗게 휘청였다.
휘이이익!
비틀거리면서도 강철규는 악착같이 수류탄을 던졌다.
타다다당! 퍼버버벅! 타다다다당! 퍼버버버벅!
아군의 엄호 사격이 요란하게 담벼락에 꽂힌 다음이었다.
부슈-웅! 퍼억!
또다시 저격용 소총 소리가 울렸고,
털썩!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챈 것처럼 강철규가 바닥에 처박혔다.
콰으으으응!
그리고 그때 수류탄이 터졌다.
적의 저격용 총구가 있는 바로 앞이었다.
곽철호와 윤상기는 담벼락 앞에 있었다.
지금은 강철규를 돌아볼 틈이 없다.
여기서 적을 해결하지 않으면 돌아갈 방법도 없다.
티잉! 티잉! 티잉! 티잉!
안전핀을 제거한 두 사람은 네 개의 수류탄을 안으로 던지고 상체를 처박았다.
콰응! 콰으응! 콰으응! 콰응!
곧바로 엄청난 폭발음이 안에서 터져 나왔다.
지켜보던 증평의 특수팀이 일제히 달려오기 시작했고,
티잉! 티잉!?
이번엔 양동식이 다시 두 개의 수류탄을 또 집어 던졌다.
콰으응! 콰아아앙!
“윤상기!”
윤상기가 깍지 낀 양손을 앞에 대주자 곽철호는 그걸 밟으며 대뜸 벽 위로 튀어 올랐다.
투두두둑! 투두둑! 투두둑!
그러나 곽철호는 곧바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양동식이 다시 두 개의 수류탄을 좀 더 멀리 던졌다.
콰으응! 콰으으응!
“양동식!”
이번엔 윤상기가 불렀고, 양동식이 깍지 낀 손을 앞에 대주었다.
휘익! 철컥! 푸슝! 푸슝! 푸슝!
벽에 매달린 윤상기가 세 발의 총을 발사한 직후였다.
달려온 반동을 이용해 차동균과 대원들이 담벼락을 뛰어올랐고, 안쪽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휘익!
이어서 차동균이 가장 먼저 담을 넘었고, 대원들이 연달아 뒤를 따랐다.
타다당! 푸슝! 푸슝! 타다당! 타다다당!
지긋지긋하던 방어막을 뚫었다.
투두둑! 푸슝! 투두두둑! 푸슈슝! 타다당! 타당!
차동균은 안쪽에 있는 두 개의 담을 따라 달렸다.
적의 반항이 있기는 했지만, 증평의 특수팀은 이런 근접전에서 밀릴 실력이 아닌 거다.
휘익!
벽을 타고 돌아간 차동균은 안쪽에 쌓여 있는 산더미 같은 박격포탄 상자를 찾았다.
투두둑!
적의 사격이 있었지만,
푸슝! 퍼억! 푸슝! 퍼억! 푸슝! 퍼억!
차동균의 사격에 이마와 목이 터져 나갔다.
티잉! 티잉!
시간 끌 것 없다.
이것만 없애면 반둔두의 입구가 완벽하게 아군의 손에 넘어오는 거다.
휘익! 휘이익!
수류탄을 던져 넣은 차동균이 급하게 담벼락에 몸을 처박았다.
콰으으으응! 콰아아아앙!
폭발은 반둔두 전체를 날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커다랗게 솟아오른 불기둥이 버섯 대가리처럼 둥그렇게 말리더니 다시 시커먼 연기로 변했다.
멀리서 섬뜩한 폭발이 있었고, 곧바로 하늘로 치솟은 불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 특수팀이 또 해냈다.
“네로! 간다!”
폭발음이 들린 직후에 제라르가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 뒤를 네로와 용병들이 따라 달렸다.
“헉헉! 헉헉!”
긴장 때문에 벌써부터 숨을 헐떡이는 문바키는 기특하게도 제라르의 바로 뒤를 달리고 있었다.
안철호는 반군 기지를 향해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가자우! 위대한 북조선의 위용을 보이라!”
“와아아-!”
3만 명이 넘는 대원들이 지르는 함성이 반둔두의 입구를 완전히 뒤덮고, 반군 기지를 향해 달려나갔다.
***
남일규가 짧게 그어 올린 칼날이 가장 앞에 있던 남자의 목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콰다당!
남일규는 정말이지 한 마리 표범 같았다.
적의 목을 그은 그는 단숨에 테이블 위로 몸을 날려 권총을 잡은 손목을 가르고 있었다.
곧바로 석강호와 우희승, 이두희가 몸을 날렸고,
콰다당! 휘익! 콰아악! 피잇!
적들도 각오한 것처럼 달려들어서 가게 안은 단박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칼을 맞은 적의 목에 하얗게 선이 그어지는가 싶더니 무섭게 뿜어진 피가 좁은 가게의 천장까지 튀었다.
퍼억! 퍽! 퍼버벅!
우희승이 권총을 들었던 놈의 손목을 붙들고 버티는 동안, 석강호와 이두희는 각각 상대와 뒤엉켜 치명적인 부위를 노렸다.
주방에 있던 오광택이 달려 나오는 동안, 남일규는 홀로 떨어진 놈을 노리고 투박한 부엌칼을 휘둘렀다.
꽈악!
그런 남일규의 오른팔을 붙든 놈이 있었다.
목이 갈라졌던 바로 그놈이었다.
어떻게?
남일규가 믿을 수 없는 눈을 하고도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틀 때였다.
휘익!
홀로 남았던 놈이 톱날 달린 대검을 불쑥 밀어 넣었다.
푸욱!
남일규의 허리 바로 위로 대검이 깊게 박혔다.
“야! 이 개새끼야!”
오광택이 고함을 지르며 칼을 내질렀다.
휘익! 콱! 퍼억! 휙! 휙!
각자 한 명씩을 맡아 칼을 휘두르는 싸움이었다.
석강호는 적과 뒤엉켜 둥근 테이블과 함께 넘어졌고, 우희승은 적의 오른손목을 붙들고 주방으로 넘어갔다.
남일규는 칼을 거꾸로 돌려 잡고 뒤에서 끌어안은 적의 가슴에 연속해서 쑤셔 박았다.
견디지 못한 것처럼 적이 남일규를 안고 앞으로 엎어졌다.
콰다당!
테이블과 함께 엎어진 남일규의 등으로 섬뜩한 고통이 파고들었다.
푸욱! 푹! 푹!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아까처럼 목을 베이고, 또 가슴에 칼을 얻어맞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
“으아아-!”
남일규는 마지막 힘을 다해 상체를 비틀었다.
그리고는 적의 대가리를 왼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피이잇! 서거억!
비무장지대에서 서울구경을 만든 남일규의 칼질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변한 적의 목이 반 이상 갈라지더니 그제야 뒤로 자빠졌다.
털썩!
놈의 대가리가 남일규의 몸뚱이로 떨어졌다.
“끄으응!”
남일규는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는 벽에 옆으로 기댄 것처럼 버티고서 좁은 가게 안을 바라보았다.
좁은 가게 안에서 섬뜩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다.
그런데 마치 TV를 통해서 보는 것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칼을 뽑아 든 석강호가 두 번이나 가슴을 찔렀는데도 적은 아직 생생하게 덤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석강호나 오광택, 우희승, 이두희를 도와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그런데 움직이려고 하는데.
“허억. 허억.”
숨이 가빠왔고, 다음으로 물에 빠진 것처럼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몸이 부르르 떨리기만 하고 꼼짝도 하지 못했다.
도움을 못 줘서 미안했고, 얌전히 있을 걸 공연히 밖에 나와 이렇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했다.
퍼억! 퍽!
주방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우희승이 적을 상대하고 있는 거다.
피잇! 퍼억!
바로 눈앞에서 적이 휘두른 칼에 오광택이 옆구리를 베였고, 팔꿈치에 볼을 얻어맞았다.
도와야 하는데……!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남일규의 머리가 경련처럼 떨었다.
나 같은 놈은 죽어도 됩니다.
대신 저 친구들은 돕게…….
큰일 할 사람들은 살아날 수 있게…….
남일규가 악착같이 몸을 움직이려 부들거리고 있을 때였다.
콰아앙! 와장차-앙!
유리가 끼워진 가게 문이 요란스럽게 터져 나갔다.
그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됐다. 저 양반이 왔으니 이젠 된 거다.
떨림이 멈춘 남일규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사람은 강철규였다.
아프리카에서 혼자 외로울 사람.
‘선배님. 혼자 남으셔서 어쩝니까?’
그의 머리가 벽을 향해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