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내가 본 것들만 믿는다. (2)
오후를 보내며 꽤 많은 숫자의 전화를 받았고, 그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었을 때 강찬은 사무실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는 거요?”
“원장님 뵙고 올게.”
“좀 쉬어야 될 텐데, 아무튼 조심해서 다녀오쇼.”
경호를 위해 최종일까지 모두 일어서면 외로운 기러기 석강호만 사무실에 남는다.
“남 선배는?”
“통화했소. 저녁에 돌아온다니까 여차하면 함께 저녁 먹고 있을 거요.”
“알았다. 다녀올게.”
강찬은 짧게 답을 해주고 사무실을 나섰다.
주차장에서 차를 탔고, 당연하게 승합차와 승용차에 둘러싸여 국가정보원으로 향했다.
‘뭐하는 거지?’
그 길에서 강찬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석강호에게조차 말하지 못했지만, 차민정을 보고난 이후에 불쑥 든 감정이 당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었다.
정보 세계의 권력자?
강찬은 피식 웃으며 가와구치를 떠올렸다.
일본 정보국이 대놓고 특수요원을 파견했다는 것은 제대로 위원장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막말로 그다음 응징도 솔직히 웃겼다.
기껏 달려가서 가와구치와 그 아래 특수 요원 놈들 줄줄이 죽인 것 말고는 없는 거다.
일진을 두들기든, 반군을 상대하든, 한번 얻어맞았던 적이 다시는 이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게 해야 완벽한 마무리다.
‘언제고 너 두고 봐’ 하는 놈들이 매번 총칼을 들이대고, 그럴 때마다 응징한답시고 달려가는 건…….
백 번 달려가서 잘 응징하다가 한 번 잘못되면 죽는 짓?
절대 현명한 거 아니다.
강찬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매서운 눈으로 먼 하늘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핵폭탄 하나 없어서 바실리에게 손 벌리는 게 최고 권력을 지닌 위원장이라니?
아프리카 점령하겠답시고 제라르와 증평 특수팀, 강철규를 전쟁터 한복판에 보내놓고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최고 권력자?
어느 틈에 승용차가 국가정보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강찬이 이를 악물고 노려보는 것만으로 누구도 감히 대들지 못할 무언가가 말이다.
***
바실리가 애용하는 활주로 옆의 막사였다.
평소와 다르게 오늘 바실리는 황량한 활주로가 빤히 보이는 막사 앞에 테이블을 놓았다.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라노크를 위해 냉정한 눈을 한 바실리가 홍차를 따라주었다.
쪼로록.
갈색 홍차가 찻잔을 가득 채웠을 때였다.
테이블 보가 휘날렸고, 그 순간에 활주로에서 달려온 바람이 홍차의 향을 움켜쥐고는 재빠르게 달아났다.
“정보 세계가 통치권을 침범하는 건 자네가 주장했던 새로운 질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실리 자네가 그런 말을 해서는 곤란하지 않겠나?”
향을 빼앗긴 홍차처럼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대화가 먼저 오갔다.
“우리의 주연은 도가 지나쳐. 아프리카의 일도 그렇고. 얼굴을 돌린 중국은 몰라도, 적어도 내 입장쯤은 고려해주었어야 했다.”
“그런 점이라면……?”
인정한다는 것처럼 라노크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힐끔 활주로를 돌아본 바실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정보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원한 거지, 한국을 강대국으로 만들려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한 게 아니지 않나.”
보드카를 단숨에 들이켠 그가 속을 들여다보겠다는 것처럼 라노크를 향해 눈빛을 빛냈다.
“그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믿는다. 그렇더라도 그의 행동은 지나쳐. 최소한 함께 가는 동맹국들의 입지를 좀 더 배려해 주었어야 해.”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 일본이 한국을 노린 것도 인정해야지. 무슈 강이 저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차세대 발전 시설은 이미 없어졌을 거다.”
바실리의 얇은 입술 끝 한쪽이 살짝 올라갔다.
“이봐, 라노크. 국제 유가가 떨어져서 당장 우리도 죽을 맛이다. 중국도 연착륙을 하지 못하면 조만간 경제가 휘청일 거고. 이럴 때 어떤 것이 가장 큰 유혹인지 알고 있지 않나?”
쪼로록.
보드카를 따른 바실리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피식 웃었다.
“전쟁이다.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느낄수록 사람들의 욕구가 전쟁으로 치달아. 민족주의가 팽배해져서 이렇게 사느니 덤빌 놈은 덤비라는 세상이 온다고.”
말을 한 바실리는 이미 전쟁을 각오한 눈빛이었다.
“인내하자는 말보다는 너희 때문이라는 울분이 터져 나오는 시기다. 자네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 모두가 파멸로 달려가겠지만 결국은 피하지 못할 일이 다가오고 있어.”
어쩌면 섬뜩한 말일 수도 있었는데 라노크는 고개만 한번 끄덕이고는 시가를 집어 들었다.
“이런데도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내게 핵미사일을 요구하다니. 폭탄을 제거해달라고 앉혀놨더니 오히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있는 꼴이 아닌가.”
찰칵.
대꾸하기 싫은 것처럼 라노크가 라이터를 켰고, 대화가 잠시 잘렸다.
라노크는 볼이 움푹 들어가도록 불을 빨아들였고, 바실리는 상관없다는 투로 담배를 집어 들었다.
“후우.”
바람을 이긴 시가의 향이 두 사람을 감싸며, 잠시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전쟁은 내게도 굉장한 유혹이다. 안팎의 문제가 한방에 해결되니까.”
고백하듯 뱉어낸 바실리의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 바실리.”
라노크가 여유롭게 받았다.
“대통령을 하는 게 아니었어.”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보는 부분도 달라지는 법이지.”
라노크의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실리가 담배를 꾹 눌러 끈 뒤에 고개를 들었다.
“가봐야 할 시간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전쟁을 하게 되더라도 무슈 강의 방식으로 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군.”
“하!”
특유의 탄성을 터트린 바실리가 고개를 비틀고는 라노크를 보았다.
“자네의 그 끝없는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나?”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로 바실리가 던진 질문이었다.
“내가 본 것들만 믿는다. 내가 확인한 것들만 신뢰하고. 무슈 강과 자네에 대한 나의 신뢰는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바실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결정하기 직전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
고건우는 지하 회의실에서 강찬을 맞았다.
단 둘뿐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눈과 귀를 가장 완벽하게 피할 곳을 두고 굳이 다른 곳에서 마주할 이유는 없었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잠이 부족한 눈, 전에 없이 눈 아래로 길게 내려온 다크서클, 한쪽이 부르튼 입술까지.
얼굴만 봐서는 고건우가 좀 더 고생한 느낌이었다.
“박철수 장군을 아프리카 통합 지휘관으로 파병할 예정입니다. 그 외에 차동균 대위가 요구한 보급품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빠른 결정이 내린 점이 좋았다.
강찬을 힐끔 본 고건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일주일 뒤입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예의 주시하고 있지요.”
“경호 외에 다른 문제가 있나요?”
굳이 말을 꺼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이쪽은 전대극이 있고, 너무 과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미국 측의 경호까지 가세한다면 적어도 미국대통령의 방한 기간에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최근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외국인의 숫자도 그렇고, 위조 여권의 수준이 워낙 뛰어나서 위험 인물의 입국 동향 파악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말을 마친 고건우가 세 장 분량의 A4 용지를 강찬 앞으로 내밀어 주었다.
“우리 디지털 분석실에서 분석한 자료들입니다.”
서류를 받은 강찬은 그것들을 천천히 살폈다.
첫 장에는 도표와 숫자들이 가득 있었다.
“우리는 황기현 전 원장과 송창욱 청장을 잃은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의 위험국가 입국자 동향과 지금의 입국자 동향을 한 번 비교해 보면 얼추 윤곽이 나옵니다.”
설명을 듣고서야 강찬은 ‘아!’하는 심정으로 서류에 찍힌 숫자와 도표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 장은 다르미 코프의 행방에 대한 정보들입니다. 프랑스 정보총국의 자료들을 모아보면 그의 측근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정보들을 취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 다르미 코프의 행방을 찾으셨나요?”
“그걸 찾았다면 오히려 속이 편했을 겁니다.”
하여간 한 번 속 썩인 새끼는 뒈질 때까지 속을 썩인다.
그리고 이럴 때 정답은 빨리 죽여주는 거다.
“그 뒤는 미국 측과 공식적으로 합의된 일정들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강찬은 마지막 서류를 대강 훑었다.
“부원장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정보총국의 임무를 맡겼으니 최선을 다해줄 것이라고만 압니다. 다만, 이런 일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주었으면 싶습니다.”
“이런 거라면 김형정 팀장에게 전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이런 핑계라도 있어야 따로 얼굴이라도 마주하지요.”
고건우의 말이 고마워서 강찬은 픽 웃고 말았다.
“지칠 만도 한데 부원장은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심정적으로 지친 느낌인 것도 맞습니다.”
고건우가 넉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라면 절대 부원장처럼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빤한 말이었다. 낯 간지러운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워낙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네는 터라 다른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지치고 힘들더라도 절대 손을 놓지는 마세요. 힘들면 내게 전화하거나 찾아와서 서운하고 아쉬운 점에 대해 뭐라 해도 좋으니 고개를 돌리는 일만은 없었으면 합니다.”
강찬은 고건우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뭔가를 느낀 건가?
내 얼굴 어디에 도망가고 싶다고 적혔나?
어쩌면 나이 든 양반들의 경험이 그에게 이런 말을 꺼내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이 많은 사람이 제 역할을 못 해서 젊은 부원장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 부원장의 고생과 노력에 비해 보상도 터무니없습니다.”
강찬의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말이 이어졌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그런데 그때 강찬의 전화기가 석강호처럼 눈치 없이 울어댔다.
“죄송합니다. 정보총국에서 온 전화입니다.”
“받으세요.”
강찬은 고개를 잠시 숙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부총국장이다.”
[위고입니다. 영국의 비밀 기지의 위치와 영국 정보국 도이슨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고건우가 없는 자리였다면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로 치켜들었을 정도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도이슨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리스에서 영국으로 이동 중입니다.]
깜찍한 새끼.
꼭꼭 숨으랬다고 뭐 그렇게까지 멀리 돌아다니는 건지.
“지금 그를 제거할 수 있나?”
[경호 인원이나 수준으로 봐서 당장은 어렵습니다.]
영국 정보국 수준이 그리 만만한 한 정도는 아닌 거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무리하다가 또다시 도이슨이 대가리를 감추면 그것도 끔찍한 일이다.
“지시가 있을 때까지 놓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
[알겠습니다.]
전화를 마친 강찬은 우선 고건우에게 내용을 알려주었다.
“하시던 말씀이 있었는데……?”
“아닙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부원장을 오랜만에 만나니까 괜히 시간을 끌고 싶었나 봅니다.”
말을 마친 고건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둘이서 함께 회의실을 나왔고, 무장한 대원들이 지키는 복도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층 로비에 나섰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단박에 요원들과 대원들이 강찬과 고건우 주변에 둘러섰다.
“자. 부원장.”
또 뒷말이 뭔가 있는데 뚝 자른 것처럼 고건우가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고 이게 또 무슨 말인지 얼른 해보라고 하기도 애매한 거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강찬은 고건우와 악수를 나누고 몸을 돌렸다.
순대를 잔뜩 먹고 난 뒤에 어묵 국물을 그냥 두고 돌아선 것처럼 어딘지 아쉽고 뻑뻑한 헤어짐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강찬은 위고가 보낸 위성사진을 확인했다.
“뭐요? 이거 그냥 초원 아뇨?”
“비밀 기지를 밖에다 거창하게 만드는 게 더 이상한 거지.”
“애새끼들이 비겁한 짓을 하니까 이런 것만 늘어요.”
무언가 엄청난 시설을 기대했던 모양인지 위성사진을 본 석강호는 대놓고 툴툴거렸다.
“푸흐흐. 아무튼, 이 개새끼들 얼른 가서 모가지 싹 돌려주고 이런 거 다시는 생각도 못 하게 깡그리 부숴놓고 옵시다.”
막말로 지진 위협만 없애도 완벽하게 한시름 놓는 거다.
급한 데도 굳이 프랑스 정보총국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정확한 정보가 필요해서 그랬던 거고.
하나씩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잠깐 생각 좀 하고.”
“알았소. 나는 그럼 저녁 주문하고…, 그런데 남 선배는 왜 연락이 없지?”
결정은 강찬이 한다.
그걸 아는 석강호가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지진을 만드는 시설이다.
강찬은 도이슨이 희생시킨 4만 명의 중국인과 그 때문에 구금되어 있는 양범을 떠올렸다.
만약, 미사일을 갈기거나 대대적인 병력이 침투해서 4만 명을 죽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4만 명이다. 4만 명.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기게, 그리고 다시는 이런 시도가 없도록 확실하게 매듭짓고 싶었다.
그렇다면 완벽하게 꺾어줘야 한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땅속에 시설을 만들고 지진을 만들어내겠다는 욕구가 안 생길 정도로 처절한 응징과 경고를 던져서라도 말이다.
“염병.”
강찬은 창가에 비스듬하게 앉은 자세로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퇴근 시간이어서 빌딩 주변으로 차와 사람이 가득했다.
영국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도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그들은 정말 죄가 없다.
자꾸만 달려드는 나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강찬은 나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끔찍한 생각이었다.
영국과 일본, 미국에까지 지진을 일으킨다는 것은.
살인의 광기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나 할 법한 상상이란 생각도 들었다.
‘정신 차려.’
끝으로 치닫는 이런 감정을 보듬어 줄 사람의 품과 미소가 그리운 순간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강찬은 맑은 눈으로 웃어주는 김미영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