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2부)-41화 (460/520)

제1장. 내가 본 것들만 믿는다. (1)

밝은 빛이 눈을 파고드는 느낌에 강찬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익숙한 천장을 보며 사무실 회의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느긋하게 몸을 일으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인 거다.

일본에서의 일들이 먼 옛날처럼 느껴질 정도로 깊게 자고 일어났다.

이제 물마시고, 커피나 한잔 하면서 아직 몸에 묻은 잠을 깰 시간이었다.

“이제 일어났소?”

그러나 물이고 커피고 필요 없이 석강호를 보는 순간에 강찬은 잠에서 확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머리칼이 하늘로 치솟은 석강호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물병을 건네주고 있어서였다.

깜박 잊었다. 이놈은 장거리 이동 후에 일어날 때면 이런 몰골이라는 것을 말이다.

“너는?”

“난 마셨소.”

말소리에 깬 모양인지 최종일과 우희승, 이두희가 좀비처럼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이지 푹 자고 일어난 얼굴이었다.

“몇 시냐?”

“점심 먹을 때요.”

물어본 놈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석강호의 대꾸가 있었다.

“일단 커피로 속을 깨워줍시다.”

말을 한 놈은 폭격 맞고 겨우 살아난 것 같은 몰골로 창가의 원형 탁자로 움직였고, 대신 커피는 좀비 같은 우희승과 이두희가 알아서 준비하고 있었다.

“여깄소.”

찰칵.

“후우.”

둘이서 담배를 물었을 때 이두희가 봉지 커피가 가득 담긴 머그잔을 가져다주었다.

“하아-암!”

입이 찢어질 정도로 커다랗게 하품을 했던 석강호가,

“캐액! 캑!”

곧바로 사레들린 사람처럼 더러운 기침을 쏟아냈다.

강찬은 얼른 머그잔 위를 손으로 가렸다.

“야! 좀! 담배 연기라도 뱉어내고 하품을 하든가!”

“푸흐흐. 날카로워지셨소. 전에는 괜찮았었는데 이상하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은 석강호가 점심을 주문하라고 하고는 다시 고개를 가져왔다.

“영국으로 바로 갈 거요?”

“그럴 생각이다.”

강찬은 머그잔을 들어 봉지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게 사람이 간사한 건지, 이상스럽게 봉지커피는 한국에서 마시는 게 가장 달고 진하게 느껴진다.

“그 새끼들도 엄청 경계하고 있을 거 아뇨?”

“그렇겠지. 그렇다고 해도 지진 발생 시설이다. 악에 받쳐서 버튼을 누르기 전에 정리해야지.”

“그건 그렇소.”

석강호의 답이 떨어졌을 때였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염병할 심장이 느닷없이 경고하는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협심증 환자도 아니고, 최근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로 두서없이 뛰었다가 알아서 가라앉는다.

대개 본능이 주는 경고는 나중에라도 이것 때문이었구나 싶은 것들이 있었는데 이번엔 딱히 그런 일도 없었다.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끈 강찬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무언가 준비하는 놈들이 있는 건가?

해가 빌딩의 머리 위로 한껏 솟아오른 시간이었다.

***

차동균을 발견한 안철호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걸어왔다.

이마에 피가 엉겼고, 무릎과 팔꿈치 부분의 군복이 찢겨 있었다. 거기에 군화의 발목 부분이 가로로 갈라져서 당장 교체해야 될 수준이었다.

“숨어있던 놈들 정리가 끝났소.”

보고 같은 말을 건넨 그는 강철규와 차동균, 곽철호의 위아래를 빠르게 살폈다.

“멀쩡하니 좋습니다.”

“제때 지원해 준 덕분입니다.”

“그런 소리 마시오. 반군들 독하기가 손가락 깨문 족제비 같아서 예상시간보다 훨씬 늦지 않았습니까.”

세 사람과 함께 킨샤사를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선 안철호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눈 끝에 독기를 달았다.

“80명이나 죽었소. 부상도 그 정도고. 기케 조심하라고 했는데도 어찌 그런 총알을 하나 피하지 못하고.”

멀리 있는 건물과 둔덕 저 너머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올라오고, 간간이 소총 소리도 들렸다.

화약 냄새를 뿌린 바람이 어색한 침묵을 감싸 안고 달아난 다음이었다.

“지휘관이 필요합니다.”

차동균이 안철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 전투에서 느꼈겠지만, 이런 식으로는 북한 병력의 희생이 계속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를 못 믿겠다는 소리입니까?”

“우리는 양쪽 모두 특수전에 익숙한 부대라 대대적인 공세를 지휘할 지휘관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북한 병력의 보급품을 모두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보시오, 차동균 씨!”

“북한에서 온 대원들이 미끄러져서 넘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넘어지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대원들도 있었습니다.”

차동균의 강렬한 눈빛을 안철호는 삐딱하게 고개를 튼 채, 끝까지 노려보고 있었다.

“남이든, 북이든, 함께 싸우는 동료가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함께 아프리카 전체를 점령할 겁니다. 안철호 소좌의 군화가 찢어지고, 북한 대원들의 밑창이 닳은 것을 걱정하면서는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를 수 없습니다.”

날카로운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원하는 게 뭐요?”

“박철수 장군을 모시고 싶습니다. 남과 북을 동시에 지휘할 지휘관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군복과 군화 등의 보급품, 필요하다면 무기 일부도 교체했으면 싶습니다.”

“남조선의 자본을 자랑하겠다는 거요? 우리가 많이 먹는다는 것을 보고서 그런 생각을 한 거라면…….”

“안철수 소좌님.”

차동균이 안철호의 말을 뚝 잘랐다.

“후속 부대가 단단하게 빨리 도착해야 우리의 생존율이 높습니다. 그래서 요청하는 겁니다.”

“흥!”

안철수는 차동균의 말을 거칠게 받았다.

어쩐 일인지 강철규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앞쪽을 살피고, 곽철호는 덤덤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차동균과 안철호가 마주서서 시간을 보낸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쌩쌩 날아다녀야 차동균 씨의 대원들이 한 명이라도 더 안전하다 이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 조건에 북남의 모든 병력을 통솔할 지휘관을 받아들이라?”

“부탁합니다.”

차동균의 대답을 들은 안철호의 볼이 씰룩했다.

부탁한다고 했다.

남측이 지휘관을 임의로 정해도 할 말 없는 안철호에게 말이다.

“흠! 기렇다면 이번만큼은 차동균 씨가 정하는 대로 하겠소. 이건 전적으로 남조선의 대원들을 위한 우리 북조선 군대의 결단이오.”

“알았습니다.”

“그럼 일단 돌아가 있겠소.”

안철호는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뒤에 있는 세 사람은 “햐! 차동균이 저거이, 진짜 사내로구만! 참군인이야!”하는 안철호의 혼잣말을 못 들었고, 안철호는 강철규가 피식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

밥을 먹는 동안, 이집트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고, 강찬은 프랑스와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씻었다. 그나마 샤워를 하고 나자 어느 정도는 사람의 몰골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강찬이 옷을 갈아입고 탁자에 앉았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강찬의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김형정입니다. 삼성동 분실인데 잠시 들러도 되겠습니까?]

“뭘 그렇게 불편하게 그러세요. 오세요.”

[부원장님. 차민정 요원과 함께 갈 생각입니다.]

뜻밖의 요청이었다.

용인의 전원주택에서 요원 네 명을 잃은 차민정이 함께 사무실로 오겠다는 것은.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강찬은 바로 답을 했고,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김 팀장님과 차민정이 함께 온다는데?”

“차민정? 용인을 맡았던 그 요원 말이오?”

“예. 용인의 경호를 담당했던 요원 맞습니다.”

석강호의 질문에 최종일이 답을 해주었다.

차민정에 대한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입을 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요원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차민정의 심정을 누구보다 석강호가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프리카의 상황을 파악하고, 차동균, 제라르와 통화를 마칠 때쯤 김형정과 차민정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좀 쉬셨습니까?”

김형정은 잠깐이나마 공항에서 봤던 참이다.

“어서 와.”

강찬은 고개 숙여 인사하는 차민정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마에 붙인 거즈, 턱과 목에 붙은 자잘한 상처들, 그리고 붕대를 감은 탓에 두툼해 보이는 팔뚝까지, 그날 차민정이 겪었던 힘겨움이 한눈에 들어왔다.

“앉죠.”

강찬이 테이블로 걸었고, 당연하게 석강호와 김형정, 차민정이 함께 움직였다.

“점심은요?”

“먹고 왔습니다. 우선 먼저 의논드릴 게 있습니다.”

시간이 급한 모양인지 김형정은 차도 나오기 전에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차동균 대위에게서 지원 요청이 있었습니다. 국방부와 의논해야 할 사안이긴 한데, 박철수 장군을 지휘관으로 보내달라는 것과 북한군의 군복, 군화를 교체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통화해서 들었습니다. 북한군 지휘관은 동의한 모양이던데요.”

물론 강찬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의견을 제시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박철수 장군이 지휘한다면 훨씬 좋지요. 그런데 보급품의 경우는 비용이 엄청나게 들지 않나요?”

“당장은 그렇습니다.”

“현장 지휘관의 요청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원해 게 좋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가진 돈을 사용해도 좋으니까 가능한 한 원하는 대로, 그리고 서둘러서 협조해주었으면 싶습니다.”

“원장님과 의논해서 처리하겠습니다.”

김형정이 말을 마쳤을 때 이두희가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공평하게 머그잔 네 개였다.

잔을 앞에 받은 김형정이 차민정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하라는 것처럼 보였다.

“부원장님.”

언젠가 유혜숙의 사무실에서 코를 얻어맞아 피를 철철 흘릴 때도 차민정은 이렇게 힘겨운 표정을 짓지 않았었다.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테이블 저쪽에서 최종일과 우희승, 이두희가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제가 지켜주지 못한 요원들이 떠올라서 단 한 시간도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눈을 감으면 계속 눈앞에서 자동차가 폭발하고 그때 보았던 요원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말을 듣고 있던 석강호의 볼이 씰룩한 다음이었다.

“제게 임무를 주십시오.”

차민정의 다부진 요구가 떨어졌고, 그 순간 김형정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런 요구를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어떤 임무를 말하는 거지?”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적을 직접 상대할 수 있는 거라면, 먼저 간 요원들을 달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어떤 임무이든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김형정이 무서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최종일과 우희승, 이두희가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차민정.”

“예, 부원장님.”

차민정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강찬의 부름에 답했다.

“언젠가 석강호에게도 했던 말인데, 응징하기 위해 일본과 이집트에 달려갔었지만, 우리는 깡패가 아냐.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이 분명해서 움직인 거다.”

차민정은 밀랍인형처럼 변화가 없었다.

파랗게 피어오른 독기가 얼굴 전체로 스며들어서 안면 근육이 마비된 것처럼도 보였다.

여자의 표독스럽고 차가운 눈은 정말 무섭다.

있는 대로 분통을 터트리는 석강호 보다 더 강렬한 느낌이었고, 정말 그녀 주변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부원장님께서 가시는 임무에 포함시켜 주십시오.”

차민정이 다시 말을 꺼냈을 때였다.

“차민정!”

참고 있던 김형정이 그녀를 날카롭게 불렀다.

“감정을 이해해서 참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이상은 도가 지나친 행동이다.”

차민정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그리고 원장님이 따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시간되는 대로 연락 바란답니다.”

“알겠습니다. 연락드리고 움직이지요.”

이건 뭐, 김형정과 담배 하나 제대로 피우지 못했다.

거절당했다고 해서 차민정이 쭈뼛대거나 풀이 죽은 태도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말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분명 다부진 태도로 인사하고 김형정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애가 아예 죽어버렸네.”

석강호가 고개를 저어가며 혼잣말을 뱉어냈다. 아닌 게 아니라, 딱 그렇게 보이긴 했다.

강찬은 말없이 창가의 테이블로 움직였다.

“생각해 보쇼. 차민정이 부모님 경호한 게 벌써 얼마요? 얼추 2년 다 되는 거요. 그동안 함께 데리고 있던 요원들 싹 희생되었는데 저러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뇨?”

담배를 집어든 석강호가 홱 고개를 돌려서 “안 그러냐?” 하고 최종일에게 동의를 구했다.

강찬이 보고 있어서 그런지, 최종일은 무겁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대장도 한 대 맞으면 꼭 두 대 때려준다고 하지 않소?”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 빙빙 돌리니까 어지러워.”

“그냥 그렇다는 거요. 심정이 이해되는 뭐, 인간적인 감정! 그런 거!”

말을 해놓고 속이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석강호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하여간 이상하게 담배는 한 사람이 피우면 꼭 함께 손이 간다.

결국, 강찬도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가슴에 담긴 사람을 잃는 건 아프다.

어쩌면 차민정은 지금 죽은 것과 같은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주변에 남은 행복이 오히려 죄처럼 느껴지는 그런 시간이라면 말이다.

“차민정이 가족이 어떻게 되지?”

“남편과 아들 한 명입니다.”

강찬의 질문에 최종일이 답을 건넸다.

“집에 가는 길에 불량배에게 둘러싸인 남편을 구해주었는데 그게 인연이 돼서 결혼했다고 들었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연이긴 한데 듣는 순간에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땐 참 답답하우.”

답이 없어서 그런 거다. 답이.

강찬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프리카에서 보았던 것처럼 뜨거운 태양이 빌딩 높은 곳에서 강찬을 내려다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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