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2부)-35화 (454/520)

제8장. 지금부터 바꾼다 (1)

꼬박 18시간을 넘게 날았다.

그렇게 홍콩 국제공항에 내린 비행기는 경광등을 번쩍이는 안내 차량을 따라 격납고 한쪽으로 움직였다.

말이 좋아 한쪽으로 움직이는 거지, 이건 뭐 아예 몸을 숨기는 수준이었다.

함께 탔던 대원들이 날카롭게 밖을 살피는 상태에서 버스 한 대가 다가왔고, 익숙한 얼굴이 버스에서 내렸다.

“라노크 대사님이다. 트랩 열어.”

대원 한 명이 버튼을 누르자 ‘철컥’ 하고 밀려 나간 문이 천천히 활주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홍콩 현지 시간으로 오후 5시쯤이었다.

프랑스에서 며칠 전에 봤었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움직였다가 다시 돌아온 길이다.

무엇보다 라노크가 이렇게 활동한다는 것이 반가웠고, 전쟁터 한가운데서 든든한 아군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보다 든든했다.

“어서 오세요.”

버스 앞에서 기다리던 라노크가 강찬을 향해 팔을 벌렸다.

둘이서 인사하는 사이 정보총국과 대테러팀 대원들이 버스와 비행기 사이를 감싸다시피 둘러섰다.

“홍콩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적을 혼란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입니다.”

라노크가 눈짓을 하자 요원 한 명이 간이 의자 2개와 간이 탁자를 버스에서 가져왔다.

둘이서 버스를 등 뒤에 두고, 강찬이 타고 온 비행기를 바라보는 자세로 탁자에 앉았다.

사는 거 참 기가 막힌다.

홍콩 국제공항 활주로 한쪽에서 오후의 햇살을 즐기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여객기들의 거친 엔진 소리, 화물을 싣는 소리, 각종 장비들과 차량이 움직이는 소리가 배경처럼 주변을 쓸고 지나갔다.

홍차, 담배, 시가가 탁자에 놓였고, 손바닥만 한 재떨이도 올라왔다.

“정말 좋습니다.”

“문바키를 받아 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그렇다면 문바키를 좀 더 매섭게 다뤄야겠군요.”

“하하하!”

라노크는 어쩐지 이전보다 쉽게 가면을 벗어던지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불안했다.

정보 세계란 이런 여유를 약점처럼 파고들어 목을 물어뜯기 때문이었다.

“다음 목표는 일본 정보국입니까?”

“그렇습니다.”

홍차를 따라 주고 물러난 요원들 사이에서 라노크가 나직하게 질문을 던졌고, 강찬이 비슷하게 답했다.

철컥.

시가의 끝을 자른 라노크가 볼이 움푹 들어가도록 불을 빨아들였다.

맞은편에 앉은 강찬 역시 당연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렇다면 바실리를 좀 더 부드럽게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밤에 봐서 제대로 못 느꼈던 걸까?

마주 앉은 라노크의 눈 아래와 볼에 매달린 그동안의 세월이 오후의 햇살에 드러난 느낌이었다.

“비록 그가 정보국을 완벽하게 손에 쥐었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대통령과 계속 싸우는 것은 분명 힘겨웠을 겁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보국 수장과 대통령은 역할과 성격이 완벽하게 다릅니다.”

담배를 끄자 라노크의 근처에 웅크렸던 시가의 진한 향이 강찬을 스치고 활주로로 날아갔다.

“프랑스 정보총국을 강찬 씨가 바로 세운 것처럼 그 역시 러시아 정보국을 새롭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럴 때는 그에게도 힘을 실어 주는 게 좋지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워낙 강한 성격인 데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어딘가 변했구나 싶었거든요.”

라노크가 입술 한쪽만 움직여 웃었다.

“두 사람이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까?”

“저와 바실리가요?”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대놓고 욕을 했다고 생각했을 거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나는 이 길로 러시아로 갈 예정입니다. 강찬 씨는 정말 이대로 일본에 들어갈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강찬의 눈을 똑바로 본 상태에서 라노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섭지 않습니까?”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것이 소중한 사람들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으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찬 씨, 차라리 정보총국에 지시하는 건 어떻습니까?”

라노크의 걱정과 염려가 그의 눈에 가득 담겨 있었다.

“대사님, 한국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지시하면 정보총국의 누군가는 대사님과 문바키를 오해할 수 있구요. 다시는 로망이나 은골로 같은 인간이 나오지 않도록 이끌고 싶습니다.”

라노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눈에 미소가 스치는가 싶은 다음이었다.

“러시아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는 함께 저녁을 하지요.”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노크가 강찬에게 팔을 뻗었다.

끝내고 싶었다. 이런 싸움을.

그래서 좋은 사람들과 이렇게 차 마시며 여유롭게 살고 싶었다.

급유를 마친 비행기는 홍콩 국제공항 활주로를 달려 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의 나리타 공항까지는 대략 5시간 정도 걸린다.

일본 정보국이 강찬의 입국을 확인할 시간으로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인 거다.

당연하게 강찬이 타고 있는 비행기의 입국 허가는 전혀 다른 용도로 신청했다.

아무렴 그렇다고 그 정도를 모르면 그게 정보국이겠나?

모르긴 몰라도, 일본 정보국은 눈을 벌겋게 뜨고 자가용 비행기와 입국 신청자를 검토하고 있을 거다.

강찬은 전화기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김형정입니다, 부원장님.]

“강찬입니다.”

이상하게 통화의 시작이 바실리와 비슷해져 가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석강호와 최종일 팀이 출발했을 겁니다.”

[내일 새벽에 도착 예정입니다. 정확한 시간은 05시 30분입니다.]

야간 비행 더럽게 힘들 텐데?

석강호가 워낙 코를 골아서 옆 사람들 진짜 힘들 거다.

“팀장님, 귀국하면 용인 테러 정확하게 알려 주시고, 곧바로 김관식 청장님 경호에 투입하세요.”

[경호에 말입니까?]

“어차피 지켜보는 이들 많습니다. 그렇게 처리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특이 사항은요?”

[미국 대통령의 방한입니다. 전격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전의 스케줄을 모두 취소한 일정이라서 의아해하고 있던 참입니다.]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정이 이상하다면 그런 거다.

“두 번의 테러가 신호입니다. 적들은 아직 소기의 목적을 얻지 못했으니까 분명 더 큰 계획을 꾸밀 겁니다.”

[다시는 소중한 분들을 잃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겠습니다.]

김형정의 다부진 답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비행기는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

그으으으응!

비행기가 무섭게 내려앉았고,

드드드드드!

비포장 활주로를 거칠게 달렸다.

“죽여주는구먼!”

네로가 미친놈처럼 지른 고함을 모두 들었다.

제라르가 볼의 상처를 우그러트리며 웃었고, 말귀를 못 알아들은 증평 특수팀 대원들은 그의 표정과 음성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수송기의 진동이 가라앉을 무렵이었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

수송기의 주변을 나는 헬리콥터의 소리가 요란하게 들어왔고,

크르르릉! 크르르르릉!

울부짖음 같은 장갑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철컥! 철컥! 철커덕! 철컥!

지시 한마디 없었는데도 무기를 점검하는 소리가 수송기 안을 가득 메웠고,

후으으응.

뒤쪽 문이 열리는 순간 대원들이 순서대로 빠르게 뛰어나갔다.

크르르르릉! 크르르릉! 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

장갑차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수송기 주변으로 달려들고, 팔을 펼친 것처럼 무기를 매단 공격형 헬기들이 하늘을 맴돌았다.

다른 표현 필요 없이, 콩고 민주공화국의 킨샤사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

“위치 확보해!”

차동균의 고함에 대원들이 뛰어갔으며,

“네로! 앞쪽과 뒤쪽 입구다!”

“Oui!”

제라르의 지시에 네로와 용병들이 임시 공항의 앞과 뒤쪽 입구를 향해 달렸다.

제라르가 허공을 맴도는 헬기에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쩔걱. 쩔걱.

외인부대 지휘관이 다가왔다.

“외인부대 제11연대 마르띠네입니다.”

포장되지 않은 활주로에서 시뻘건 흙이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동안, 경례를 마친 마르띠네가 진지한 태도로 제라르의 곁에 섰다.

아프리카다.

더위가 훅훅 달려들고, 배설물 찌든 듯한 냄새가 사방을 덮는 콩고 민주공화국의 킨샤사.

훤칠한 키, 당당한 체격, 다부진 어깨, 빛나는 눈빛과 볼에 그려진 위협적인 상처까지.

어깨에 걸친 소총을 아래로 내려 잡은 제라르는 아프리카 한가운데서 거역하기 어려운 특수팀 지휘관의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곳에 온 병력은?”

“총 49명입니다!”

헬리콥터의 소리를 이기기 위해 마르띠네가 악을 쓰듯 답을 했다.

“마르띠네!”

“Oui!”

제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외인부대 대원 누구도 제라르를 함부로 하기는 어렵다. 외인부대 특수팀 역사상 두 번째로 손꼽히는 지휘관이기 때문이었다.

그를 키운 것이 외인부대 특수팀의 전설 갓 오브 블랙필드라는 사실이 그를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이동 후에도 공항을 사수한다!”

“이미 명령받았습니다!”

“병력이 워낙 많다! 보급품이 단절되면 전진이 어려워! 명심해라! 필요하다면 정보총국에 직접 연락해도 되고, 아니라면 내게 바로 연락해.”

“Oui!”

마르띠네가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답했다.

프랑스 정보총국이 인정한 남자, 제라르의 명령을 들은 직후에 나온 표정이었다.

***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과 일본 역시 국제공항을 통해 드나드는 사람들을 체크한다.

특히 입국자 명단은 전산 처리 외에도, 수십 년 일한 전문가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확인하는 수준이다.

가로로 기다란 나리타 터미널 건물 앞으로 비행기가 내려섰다.

긴 비행이었다.

그냥 타고 온 사람이 이렇게 피곤할 정도인데 조종간을 잡은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나.

그것도 소형 비행기인데 말이다.

활주로 끝에서 속도를 줄인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강찬은 준비해 온 안경을 집어 들었다.

염병.

안경 아래로 두툼한 코와 그 밑에 콧수염까지 달렸다.

얼핏 장난감처럼 보인다. 그러나 밤에 보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밀하게 만든 분장 도구다. 그것도 국가정보원에서 직접 제작한 거.

양복을 입은 대원 넷이 비슷비슷해 보이는 안경을 쓰고는 내릴 준비를 마쳤다.

최종일 팀을 데려오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강찬과 체격이 비슷한 대테러팀 대원들을 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우우웅.

비행기가 멈췄고, 승용차가 달려왔다.

강찬은 세 번째로 비행기에서 내려 기다리던 승용차에 올랐다.

***

가와구치는 석강호와 최종일 팀이 한국으로 향했다는 것을 겨우 확인했다.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일본 정보국의 해외 활동을 모두 막아 버린 강찬의 조치 때문에 중요한 정보는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협조를 통해 얻는다.

물론 주요 공항이나 호텔에는 아직 위장 잠입한 요원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아무튼, 강찬의 가장 중요한 핵심 세력이 이집트에서 한국으로 향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것도 일반 여객기를 탑승했다.

중간에서 남모르게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기는 어렵다는 의미였다.

가와구치는 이어서 다른 자료들을 살폈다.

강찬은 홍콩 국제공항에서 라노크를 만났고, 다시 이륙했다.

거기까지였다.

그가 라노크와 함께 러시아로 갔는지, 아니면 한국으로 바로 움직였는지, 그도 아니면 눈에 빤히 뜨이는 방법으로 나리타로 들어왔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다.

띠이이.

그때 내선 전화 3번이 날카롭게 울었다.

달칵.

번호를 누른 가와구치는 곧바로 수화기를 당겨갔다.

“말해.”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내린 인원은 총 5명입니다. 전부 같은 복장에 같은 안경을 끼고 있고, 프랑스 정보총국에서 직접 마중 나와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감히 일본에 들어와서 통제를 받기는커녕 프랑스 정보총국의 호위 속에서 공항을 빠져나가!

가와구치는 자존심이 팍 상했다.

“현재 상태는?”

[신쿠코 자동차 도로에 있습니다. 호위용으로 보이는 승합차 2대, 승용차 2대가 별도로 있어서 가까이 접근하기는 어렵고, 멀리서 따라붙고 있습니다.]

수화기를 든 채로 가와구치는 눈을 좌우로 굴렸다.

결심만 한다면 야쿠자의 조직 전쟁을 핑계로 총질을 가할 수도 있고, 덤프트럭이 냅다 덮칠 수도 있다.

이 기회에……?

강찬이 타고 있든, 아니든 간에 단순 사고였다고 우겨 대면 저쪽도 할 말 없는 상황인 거다.

입국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으니 경호를 책임질 일도 없다.

“입국장 촬영 영상은?”

[이미 보내 놓았습니다.]

“바로 연락하겠다.”

가와구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가 정한 패스워드, ‘대일본 제국 만세’를 입력하자 요원들이 보낸 동영상이 화면 한쪽에 올라왔다.

달칵.

마우스 버튼을 누르자 비행기에서 내리는 5명이 또렷하게 모니터 위로 떠올랐다.

“미친 인간!”

세 번째 내리는 남자를 본 가와구치는 대뜸 욕을 뱉어 냈다.

걸음걸이, 특유의 몸짓.

강찬이다. 꿈에 나타나는 것도 두렵고 싫은 강찬.

프랑스에서 부총국장과 차장들을 살해한 그가 이런 식으로 일본에 나타났다.

이유가 뭐가 있겠나.

아무리 우습게 보였다고 해도 그렇지!

이따위로 들어와서 나를 해치우겠다고?

가와구치는 이를 악물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그는 재빠르게 내선 3번 버튼을 누르고 수화기를 들었다.

“현재 위치는?”

[공항에서 16킬로미터 지점입니다.]

“작전을 개시한다. 플랜 B를 먼저 실행하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곧바로 플랜 A를 실행한다.”

[확인하겠습니다.]

“작전을 승인한다. 대일본 제국의 명예를 지켜라.”

[확인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가와구치는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일이 너무 쉬운데? 혹시 함정인가?

사람이 약해지니까 자꾸만 의심이 생긴다.

군복, 군모, 기다란 칼.

가와구치는 조부의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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