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대장! 뭐냐구요! (2)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프랑스 정보총국에서 국가정보원으로 엄청난 양의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강찬이 움직이고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영국의 움직임,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스라엘의 활동,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에서 허은실을 공격했었던 일본 요원들의 구체적인 정화까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고건우는 자료들을 보며 또다시 부족한 국가정보원의 능력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아직 부족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한참 멀었다.
그러나 이건 아무리 투자한다고 해도 단시간 내에 보강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훈련을 마친 요원들을 현장에 배치하고, 그들이 자리 잡기까지에는 엄청난 노력과 투자, 그리고 꽤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현재 가장 완벽한 역할을 수행하는 이집트 분실만 봐도 그렇다.
엄지환, 김광민을 잃었다.
대신 그런 경험이 내려갔다.
지금 국가정보원 이집트 분실은 분실장 민환근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이집트는 물론이고, 주변의 리바아, 수단, 이스라엘, 요르단의 정보들까지 수집해서 보내고 있었다.
두 요원을 잃은 것이 정말이지 아픈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국제빌딩의 테러와 잠수함을 이용한 고성 시설의 파괴를 막았다. 그 정보들의 가치를 감히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나.
고건우는 올라온 자료들을 확인하다가 매섭게 눈빛을 번쩍였다.
[핵융합 발전 시설 건립]
[미국,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 중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공동 협력 사업]
[미국 CIA 주도]
마우스를 움직인 고건우는 핵융합 발전 시설 항목 위에 화살표를 놓고 빠르게 클릭했다.
아쉽게도 아직 세부적인 내용은 올라오지 않아서 추가적인 사항은 없었다.
고건우는 구내전화기를 들었다.
“지금 내가 확인하는 내용이 부원장에게도 전달되는 건가?”
고개를 끄덕인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올라온 정보에 만족해서는 곤란하다. 추가할 수 있는 정보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하나의 정보라도 소홀하게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
통화를 마친 고건우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강찬이 이 내용을 확인한다면 분명 지시가 있거나 다른 방법을 취할 게 분명했다.
지원한다. 그가 어떤 요구를 하든 말이다.
고건우는 각오를 다지는 눈빛으로 앞을 보았다.
***
지평선 저 너머로 붉고 동그란 태양이 걸린 시간이었다.
지겹도록 보았었고, 아픈 기억도 많은데 이상하게 저 빌어먹을 붉은빛에서 시선을 돌리기가 어려웠다.
강찬은 기다랗게 늘어진 구름을 안고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바닷가에서 볼 때와 비슷했다.
아프리카의 노을은 마치 한국의 바닷가에서 보는 것처럼 늘 저렇게 잔인한 핏빛이었다.
“커피 한 잔 더 드릴까요?”
“너는 훈련 안 하냐?”
”나는 병아리나 퇴물 중닭이 아닙니다.”
“미친놈.”
물병을 들어 컵을 헹군 제라르가 다시 커피와 설탕, 크림을 뚝뚝 떠서 집어넣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우선 일본. 다음은 중국.”
버너에 올려놓은 주전자를 힐끔 본 제라르가 시선을 가져왔다.
“정보총국을 해결했으니 외인부대와 총질할 일은 막은 거다. 이제부터 지랄한 놈들의 대가리를 하나씩 돌려 줄 셈이다.”
“영국이 더 급한 거 아닙니까? 그 새끼들은 지진을 일으킬 수도 있잖습니까?”
뜨거운 물을 머그잔에 부은 제라르가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던진 질문이었다.
“영국과 이스라엘은 미국이 어떻게 할지를 지켜보는 모양이다. 스웨이든 이 개새끼가 뭔가 성과를 낼 때까지 숨어 있겠다는 거겠지.”
“정보총국 정리가 끝났으니 다른 곳 정보국 수장 놈들이야 닥치는 대로 대가리 돌려 버리면 끝나는 일이잖습니까?”
“대가리를 돌리는 것도 순서가 있어야지.”
강찬은 제라르가 건네준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 멀리서 훈련을 끝낸 건지 용병들이 둥글게 모여서 무언가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정보국 수장은 빈자리로 두지 않는다. 이번에도 어설프게 마무리하면 그놈은 또 엉뚱한 생각을 할 거다.”
“아예 뿌리를 뽑아 버릴 생각이군요.”
강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정보국 놈들은 다 안다. 이럴 때 적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지. 하나는 내가 있는 이곳에 화력을 집중하는 거고.”
“대장의 본진을 공격하는 거.”
제라르가 눈빛을 빛내며 강찬의 말을 받았다.
둘만 아는 특별한 비밀이 아니라, 전투를 치러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한국에 있는 분들이 위험하겠군요.”
“그렇겠지.”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노을을 보며 강찬은 혼잣말처럼 답을 했다.
“피할 수 없는 거지. 내가 저놈들을 노리는 만큼 저놈들도 나를 노릴 테니까.”
“우리는 본진 따위 노리지 않잖습니까? 만약 한국에 있는 부모님을 노리는 거라면…….”
제라르가 볼을 씰룩이며 강찬을 보았다.
다람쥐처럼 쌈을 싸서 강대경과 유혜숙에게 건네줄 때 가족을 느낀다는 놈이니만큼 저렇게 분노하는 거 이해한다.
“대장! 내가 한국에 가겠습니다!”
강찬이 피식 웃는 것을 본 제라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뭡니까?”
“뭐가?”
“뭔가 있잖습니까?”
강찬이 잠자코 커피만 마시자 제라르가 탁자 건너편에서 상체를 불쑥 기울였다.
“뭡니까? 뭐냐니까요?”
붉은색을 뒤집어쓴 제라르의 눈에 얼마 남지 않은 태양이 마지막을 장렬하게 불태우고 있었다.
“대장! 뭐냐구요!”
“미쉘이 괜히 유럽을 돌겠냐?”
“예?”
제라르가 화들짝 상체를 세우고는 깊게 보이는 눈동자를 껌벅였다.
“그럼 혹시 그 일행에……?”
“특수 분장을 한 요원 2명이 열심히 상추에 고추를 키우고 있을 거다.”
“오!”
“너 그럴 때 다예랑 똑같아 보이는 거 아냐?”
감탄했던 프랑스 놈이 대번에 얼굴을 확 바꾸었다.
“에이! 그런 욕을 합니까?”
“미친놈.”
둘이서 킬킬거린 다음이었다.
“난 요즘 대장이 점점 무서워집니다.”
농담처럼 던진 말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없는 곳에 서 있으니까.”
진담으로 답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었다.
우리가 저쪽 수장을 노리는 것처럼 저쪽은 고건우와 강찬을 노린다.
“이집트의 살라피주의자들에 대한 응징은 끝났으니 다음은 다르미코프지. 그 새끼는 절대 그냥 죽음을 기다리지 않을 거다. 우리도 기다린다. 그 새끼가 움직일 때까지.”
“중앙아프리카를 점령하겠다는 게 그 이유 때문입니까? 무기 밀거래를 막으려고?”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무기 밀매가 두 곳에서 가장 활발하지.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 지역. 일단 그 두 곳의 숨통을 조일 생각이다.”
“아프리카는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중동에는 전혀 파견된 병력이 없잖습니까?”
매서운 눈으로 제라르가 던진 질문이었다.
해는 이제 꼭대기의 둥그런 부분만 남았다. 그리고 그만큼 핏빛도 진해졌다.
“멍청아! 내가 여기 있다면 둘 중 하나라고 했지?”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제라르의 볼이 다시 길게 늘어졌다.
“중동의 병력이 이리 넘어오겠군요.”
“중앙아프리카를 점령하면 위아래가 잘린다. 다르미코프, 영국, 미국은 숨통이 콱콱 막히겠지. 그리고 중국도 견디기 어려워진다.”
“그때 대장은 여기 없는 거군요?”
“오!”
강찬이 과장된 얼굴로 반응한 다음이었다.
“나는 다예가 아닙니다.”
제라르가 단호한 표정으로 답을 건넸다.
***
스웨이든은 미국 부통령 사무엘과 마주 앉았다.
말이 좋아 부통령이지, 미국 행정부에서 부통령은 그저 얼굴마담 정도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맞는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스터 바이스 프레지던트.”
“아무렴 내가 국장만큼 바쁘겠소? 나야 늘 허드렛일에 얼굴을 비치는 게 전부인데. 그래, 어쩐 일이오?”
눈처럼 하얀 머리칼을 한 부통령 사무엘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스웨이든을 보았다.
“먼저 이 일에 대해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미합중국의 안위와 이익에 중대한 문제라 그렇습니다.”
“윤리와 도덕, 미합중국의 법에 문제가 없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겠소.”
사무엘은 아직 경계하는 눈빛을 풀지 않았고, 스웨이든은 상관없다는 투였다.
백악관 부통령 집무실이다.
책상 한쪽에 세워진 성조기, 카펫에 새겨진 독수리가 좀 작다는 것을 제외하면 구조는 대통령 집무실과 다를 바 없었다.
“한국에서 UIS의 테러가 포착되었습니다.”
고개를 갸웃한 사무엘이 ‘무슨 수작이지?’ 하는 것처럼 눈살을 좁히고 스웨이든을 바라보았다.
“남쪽 지역에서 국지적 도발, 이어서 자원청장 김관식, 마지막으로 국가정보원 부원장의 가족을 노리는 테러입니다.”
“이보시오, 국장. 굳이 그런 내용을 내게 말하는 이유가 뭐요? 설마……? 이 정보를 아직 한국의 정보국에 전하지 않은 거요? 그렇소?”
“그렇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어떤 이유에서든 CIA의 공작에 휘말리고 싶지 않소. 여기까지만 합시다.”
항복하는 사람처럼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인 사무엘이 상체를 뒤로 빼고 앉으며 단호하게 의사를 밝혔다.
“부통령님, 이번이 끝이 아닙니다. 한국에 또다시 커다란 테러가 있을 겁니다. 그걸 부통령님이 막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스웨이든이 던진 제안에 눈빛을 반짝였다.
“이번 테러로 한국은 충격에 빠질 겁니다. 잠수함 폭파 사건은 쉬쉬하고 넘어갔지만, 연료자원청 청장과 부원장의 부모는 반응이 다른 일입니다.”
“다음 테러의 목표는 뭐요?”
“한국의 대통령입니다.”
“이런! 젠장…….”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사무엘은 벌컥 상소리를 뱉어 냈다.
“요즘 한국의 위상이 어떤지 몰라서 이러는 거요! 자칫하다가는 내 목이 달아날 일이오! 여기까지만 합시다!”
“부통령님이 한국의 대통령을 구합니다.”
단호한 표정이었던 사무엘이 또다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얼굴로 스웨이든을 노려보았다.
“미합중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합니다. 그 위기에서 미합중국 대통령과 한국의 대통령을 구해 낸 미국의 영웅. 어떻습니까?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 아닌가 싶은데요?”
“스웨이든, 당신의 제안에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소.”
“대통령과 부통령은 함께 같은 나라를 방문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냐는 투의 시선이 스웨이든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일본을 방문하시는 겁니다. 그곳에서 테러의 징후를 발견한 부통령은 규정과 상관없이 한국으로 날아가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을 구해 냅니다.”
“흐음.”
턱과 입을 쓸어 댄 사무엘이 유혹을 떨치지 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라우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이유가 있소?”
“그건 부통령님이 만드셔야 합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일어나는 테러를 위로하고 한미 동맹을 철저하게 만든다는 명분이면 대통령도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내가 테러를 막는 방법은?”
“대통령 경호실 외곽에 우리 요원들이 포진할 겁니다. 테러 상황이 발생하면 부통령께서 대통령과 함께 제가 정한 위치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말을 다 들은 사무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국이오. 한국에서 우리 마음대로 움직이겠다는 것도 그렇고, 영웅이 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소.”
“부통령께서는 지시만 내리면 됩니다. 위급한 상황을 돌파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거지, 총을 들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이 스웨이든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내게 진짜 원하는 게 뭐요?”
이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
스웨이든은 냉정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합중국을 다시 세계의 경찰국으로 올려놓을 조지 사무엘 대통령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국가안전부를 총괄하는 최초의 CIA 국장입니다.”
사무엘과 스웨이든이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사무엘이 앉은 자세에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스웨이든은.
그런데도 사무엘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