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대장! 뭐냐구요! (1)
라노크는 참 오랜만에 만족한 얼굴로 테라스 난간을 짚은 채 바깥의 경치를 즐겼다.
다른 팀이 아니라 한국의 대테러팀이 외곽 경비를 맡았다.
그 외에 이제는 다시 전열을 정비한 정보총국이 특수요원을 파병해 2선을 경계한다.
프랑스 정보총국의 유일한 부총국장 강찬의 지시에 따른 조치였다.
심지어 총국장 에르완은 사과 전화를 하고, 방문해도 되는지를 문의했으며, 일정을 기다리겠노라고 간곡하게 매달렸다.
강찬의 힘이다.
프랑스를 적으로 돌릴 일이 있더라도 한 번은 기회를 달라고 했던 그의 청을 강찬은 완벽하게 들어주었다.
고맙다. 그리고 감사하다.
강찬과 강찬을 알게 된 인연에.
라노크가 멀리 있는 호수를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띠르르르. 띠르르르. 띠르르르.
몇 사람밖에 모르는 그의 전화기가 울어 댔다.
몸을 돌린 라노크는 테이블로 옮겨 가 전화기를 들었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알로?”
[목소리가 편안하군?]
“나야 이곳에서 불편할 게 없잖나.”
[그렇군.]
라노크와 달리 바실리는 어딘가 불편한 음성이었다.
[무서운 프랑스인이 결국은 정보총국까지 완벽하게 체질을 바꿔 놓았군. 주연께서 후계자까지 키울 테니 당분간 프랑스 정보총국을 넘보는 건 포기해야겠지?]
“무슈 강의 새로운 모습을 인정하면 자네도 편할 텐데? 나무에 올려놓고 흔드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
바실리의 한숨이 건너온 다음이었다.
[총국장을 그대로 둘 정도로 그가 늘었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프랑스 국적이 아닌 부총국장으로는 그게 최선이라는 것도. 게다가 실질적인 총국장 노릇은 어차피 우리 주연이 할 게 아닌가.]
말을 뱉는 바실리는 분명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을 거다. 눈앞에 없어도 보는 것처럼 선명한 일이었다.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으로 봐야겠지?]
“그는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분명 자네 말대로 성장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라노크가 시가를 집어 들 때 또다시 한숨이 건너왔다.
[내가 대통령이 된 것도 결국은 주연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비참한 생각이 드는군.]
“그보다는 자네 역시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 주연을 위해서 말이지!]
바실리의 특유한 탄성을 들은 라노크가 가볍게 웃은 다음이었다.
[라노크, 세계 전쟁이 일어날 수 있어. 그 바로 코앞에서 불을 잠시 끄긴 했지만, 아직 불씨는 충분히 살아 있다.]
“정보총국이 돌아왔으니 영국과 미국도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하지 않겠나? 나는 무슈 강을 믿는다.”
[아쉬움이 남을지언정 후회는 않는다?]
“멋진 말이군, 바실리.”
[하!]
특유의 탄성과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라노크의 앞에서 라파엘이 홍차를 따라 주었다.
“외출을 준비해 주겠나?”
“알겠습니다.”
라파엘은 세련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
강렬한 아프리카의 오후 햇살 아래에서 제라르는 모처럼 제 역할을 찾은 놈처럼 보였다.
“대장, 첫 번째 목표가 어디입니까?”
듬직한 놈의 어깨 너머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용병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콩고 민주공화국.”
뜻밖의 답이었나 보다.
제라르가 고개를 갸웃한 다음이었다.
“다음은 르완다, 부룬디, 그리고 콩고, 이어서 잠비아, 앙골라.”
강찬이 연속해서 나라 이름을 늘어놓았고, 그걸 들은 제라르는 볼의 상처를 우그러트리며 웃었다.
이곳에 석강호가 있었다면 분명 눈빛을 번득이며, ‘푸흐흐.’ 하고 웃었을 거다.
“하여간 대장은 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강찬이 피식 웃었는데 그 웃음이 제라르는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북한군의 저 많은 숫자가 필요했던 겁니까?”
“길게 끌 것 없다. 10만이든, 13만이든 단숨에 쏟아부어서 중앙아프리카를 완벽하게 점령한다.”
“외인부대는 어쩔 생각입니까?”
“여기 오기 전에 총국장과 이야기가 끝났다. 그러니 일단 기본적인 충격은 피할 수 있을 거다.”
강찬의 날카로운 눈빛이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반드시 끼어드는 놈들이 나오고, 그 상태에서 아차 하는 순간에 감당하지 못할 전쟁으로 번질 위험도 있다. 반군, UIS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쓸어버린다.”
“알겠습니다.”
“명심해. 용병은 가이드 선까지만 활동한다. 대대적인 공세 전에 증평의 특수팀이 위치를 선점하고, 그 뒤에 북한군이 밀고 들어가는 방식이다. 체제 유지는 다시 용병이 맡는다.”
제라르가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돌대가리는 연락이 있었습니까?”
둘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다음이었다.
제라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단순한 놈이 또 어디서 총알이나 얻어맞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걱정되냐?”
“그놈이요? 돌대가리를 걱정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대가리에 맞으면 총알도 튀어나올 놈인데요. 일이 틀어질까 봐 염려돼서 한 말입니다.”
강찬이 픽 웃었고, 제라르가 비슷하게 웃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그때 또다시 헬리콥터 소리가 밀롱드 기지로 날아들었다.
강찬은 시선만 들었고, 제라르는 상체를 돌렸다.
“누가 또 옵니까?”
“라노크 대사가 부탁했던 인물이 프랑스에서 출발한다고 들었다.”
둘이서 함께 일어나 강찬이 내렸던 곳을 향해 움직였다.
아프리카의 뿌연 하늘이었다.
저 멀리에서 작게 보이던 헬리콥터가 점점 윤곽을 드러냈고, 곧바로 기지 아래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용병들이 또다시 강찬과 제라르를 감싸듯이 몰려든 다음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헬리콥터가 주저앉는 것처럼 바닥에 털썩 내려앉았다.
먼저 내린 사람은 뜻밖에도 테오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내린 사람도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문바키……?”
강찬은 고개를 갸웃하며 헬리콥터에서 내리는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바키요? 문바키?”
제라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테오와 문바키를 번갈아 보았는데, 제대로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놈이 없을 때 왔었나?
다예가 없을 때 왔으니 당연히 이놈은 문바키를 모른다.
“다시 봬서 기쁩니다. 부총국장님.”
“어서 와. 인사부터 하지. 이쪽은 전 외인부대 특수팀 사령관 제라르, 이쪽은 정보총국 차장 테오.”
둘이서 고개를 한 번 까닥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부총국장님, 이쪽이 이번에 라노크 위원장이 부탁한…….”
“문바키 맞지?”
테오가 놀란 눈으로 문바키와 강찬을 번갈아 볼 때였다.
“알아보시는군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전에 한국에 가서 스미든을 만나긴 했는데 불행하게 대장을 만날 기회는 얻지 못했습니다.”
악수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마치 오래 떨어져 있던 동생처럼 문바키는 강찬에게 덥석 달려들어 상체를 꼭 안았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말을 건네고도 문바키는 강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라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테오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눈치였다.
남자끼리 오래 껴안고 있는 거 좋아하는 사람 아니다. 그리고 다른 남자 땀 냄새 진짜 싫어한다.
문바키의 등을 두드려 준 강찬은 우선 녀석을 떼어 놓았다.
“어떻게 된 거냐?”
“이제부터 대장과 함께 다니게 되었습니다.”
피곤하겠는데?
해맑게 웃는 문바키는 어쩐지 그런 느낌이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강찬이 테이블을 향해 몸을 움직이자 제라르, 테오, 문바키가 뒤를 따랐다.
이놈이 내가 다시 태어난 걸 알고 있나?
라노크가 미리 무언가를 알려 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동성애자 놈처럼 무언가 갈구하는 눈빛으로 강찬을 보는 게 설명되지 않아서였다.
제라르와 테오가 수상쩍은 시선을 던지는 것도 딱 그런 의미처럼 느껴졌다.
“앉아.”
역시나 강찬을 시작으로 탁자에 둘러앉았다.
“알던 사이였습니까?”
제라르가 던진 질문이 시원했나 보다.
테오의 표정이 그랬다.
“라노크 대사님께 말씀 들었지.”
테오까지 헛갈리게 할 필요 뭐 있겠나.
강찬이 적당하게 답을 했고, 잠시 정보총국의 내부 이야기가 오갔다.
“위고가 차장으로 승격될 예정입니다. 에르완 총국장님의 직접 지시입니다.”
“다른 수상한 움직임은?”
“총국장님의 경호 파트에서 의심스러운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독자적으로 처리하기엔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 오늘 직접 찾아뵈었습니다.”
“호텔에서의 일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일단은 지켜본다. 만약 판단하기에 위험한 수준이라면 먼저 조치하고 나중에 보고하도록.”
이게 어쩐지 자꾸만 바실리를 닮아 가는 느낌인데,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영국의 움직임은?”
“이삼 일 내로 도이슨의 위치를 파악할 것 같습니다. 그 외에 지진 발생기라는 장치를 찾기 위해 전 요원이 동원되다시피 뛰고 있습니다.”
강찬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무기상 다르미코프의 위치도 알아봐.”
“알겠습니다.”
답을 한 테오는 헬리콥터가 있는 방향을 돌아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문바키는 오늘부터 부총국장님과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지시 사항이 없다면 저는 이 길로 돌아가겠습니다.”
이곳에 있어 봐야 흙먼지 먹을 일밖에 없는 테오다.
거기에 정보총국의 내부 단속을 맡길 사람이 부족해서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았다.
강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했고, 제라르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걸었다.
두 사람이 헬리콥터를 향해 걸어간 다음이었다.
문바키가 눈빛을 빛내며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대장, 대장에 관한 자료를 보았습니다.”
그럼 그렇지.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스미든을 만나러 갈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 갓 오브 블랙필드라는 이름이 있다고 해서 만나고 싶었던 정도인데, 대장의 자료를 보고 나서는 왜 그 닉네임을 사용했는지 이해했습니다.”
“그 자료가 아직 남았냐?”
“로망 정보총국장 직전에 일괄 폐기했습니다.”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봐?”
“당시 아프리카의 기록과 한국에서의 대장 기록을 비교해서 위원장님께 보고한 사람이 접니다.”
이건 뭐, 할 말이 전혀 없는 대꾸였다.
“그리고 그 기록의 폐기 담당자가 저였습니다. 라노크 위원장님이 로리암에 들어가시기 전에 폐기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문바키는 순박함에 알기 어려운 독기와 필요한 기본예절을 욱여넣은 모습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고, 제라르가 쩔걱거리며 돌아왔다.
“제라르.”
“Oui.”
“이 녀석을 용병에 포함시켜라. 그리고 작전이 끝날 때까지 데리고 다녀. 기본 가르쳐 주고.”
“대장?”
문바키가 놀란 얼굴로 강찬을 불렀다.
“어리광 피우지 마.”
그러나 녀석은 차가운 강찬의 얼굴을 보자 움찔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네가 몸담을 정보총국을 능력도 없이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거지? 경호 요원을 둘둘 휘감고 다니는 책임자가 되겠다는 거냐?”
강찬은 문바키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키워 달라고 부탁받았다.
정보총국을 맡길 후계자로.
“문바키.”
“Oui. Capitaine.”
“내가 라노크 위원장을 지켜 드린다. 그리고 함께 너의 성장을 지켜볼 거다. 그렇다면 내가 위원장님과 같은 위치가 되었을 때 누가 지켜 줘야 하겠나?”
제라르가 흥미롭게 바라보는 앞이었다.
“문바키가 합니다.”
피식. 씨익.
아동틱한 대답에 강찬과 제라르가 동시에 웃었는데, 문바키는 웃지 못하고 있었다.
“실력을 쌓아라. 네 몸을 우선 지킬 수 있는 실력. 여기 제라르가 인정한다면 내가 데리고 다니겠다.”
“알겠습니다.”
강찬이 고개를 돌려 제라르를 보았다.
“데리고 가서 군복과 무기 챙겨 줘.”
“알겠습니다. 가자, 문바키.”
제라르를 보았던 문바키가 강찬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아무래도 뭔가 억울한 모양인데, 불행하게 강찬은 눈빛이나 표정에 마음이 흔들리는 타입이 아닌 거다.
시원시원하게 걷는 제라르의 곁을 기운 쭉 빠진 모습으로 문바키가 따라갔다.
사람의 인연은 참 무섭다.
우연히 마주쳐서 다시는 못 볼 것 같던 사람이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불쑥 나타나는 것이 그렇다.
그나저나 저런 놈이 정보총국을 책임진다고?
라노크의 안목이 처음으로 의심스러운 순간이었는데, 강찬은 픽 웃으며 멀어진 문바키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찬을 알아보았던 라노크다.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정보총국의 미래는 문바키와 같은 보스를 필요로 하는지 모르는 거다.
제라르가 소개하자 네로가 단박에 문바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강찬은 고개를 돌려 헬리콥터가 내려서던 곳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돌대가리, 아니 석강호는 잘하고 있을까 싶어서였다.
느리기는 했지만, 차례차례 정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