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성공을 믿어 주는 지휘관이 돼 (1)
정보국 책임자로 살면서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간도 마음 편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사람이 24시간 불안에 떠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인 거다.
일본 정보국 책임자 가와구치는 사무실로 들어서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요원들이 지켜 준다.
스웨이든과 통화했고, 이스라엘 정보국과도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건물로 들어설 때면, 불쑥 강찬이 나타나 머리를 꽉 움켜쥘 것만 같아서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강찬이 프랑스에 불쑥 나타나서는 은골로를 해치웠다.
미칠 일이다. 그리고 다시 사라진 거다.
그의 다음 행선지가 일본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겠나.
‘멍청한 양키놈!’
가와구치는 속에서 올라오는 욕을 꿀꺽 삼켰다.
뭐? 강찬의 주변을 하나씩 갈라놓고, 수족을 자르겠다고?
비밀 병기를 한국에 보냈다고도 들었다.
그 직후에 수족이 잘린다던 강찬은 프랑스 정보총국을 제대로 움켜쥐었고, 이어서 북한군을 한국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이 상태에서 중국이 돌아서고 미국마저 꺾이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도 가능해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들어선 가와구치는 책상에 앉으며 커다랗게 숨을 토해 냈다.
남한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이 일본을 침략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묵인한 상태인데 미국마저 입을 다물면?
가와구치는 나쁜 생각을 털어 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약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영국이 강찬에게 항복하고 지진 발생 시설을 넘길 경우에는 모든 일본인이 강찬과 한국을 향해 무릎을 조아리고 매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열도가 가라앉기 싫다면 가와구치가 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정당하게 배상해라.”
강찬의 말 한마디에 가와구치는 도쿄 한복판에서 할복해도 용서받지 못할 꼴이 된다.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이 정도면 이제 모습을 드러내고 압박할 때도 되었는데?
가와구치는 강찬이 어디 있는지만 정확하게 알아도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
스웨이든은 눈에 핏발이 시뻘겋게 올라 있었다.
누가 봐도 잠이 부족하다는 것을 확연히 알 정도였다.
위성이 문제다. 그 빌어먹을 위성이.
강찬이 어디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급한데, 한국이 위성을 관리하는 동안은 어떻게 방법이 없는 거였다.
중국의 정보국 요원은 속속 한국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프랑스 정보총국은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정보총국장 에르완이 오히려 강찬의 눈치를 살피는 지경이었다.
“흐음.”
스웨이든은 결심을 앞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통령의 눈 밖에 났던 전임 책임자 셔먼의 최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스웨이든이다.
미국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해도, 작전에 실패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세계에서 스웨이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남지 않았다.
미국의 권위를 포기하고 한국에 웃음을 파는 대통령이라니.
스웨이든은 매서운 눈으로 앞에 놓은 자료들을 노려보았다.
“나는 셔먼과 다를 겁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그의 결심이 혼잣말로 흘러나왔다.
***
석강호는 벽에 붙어 안쪽에 귀를 기울였다.
TV 소리였다.
남성용 화장품 광고인 모양으로, 요걸 바르면 숨겨진 매력을 한껏 뿜어낼 거라는 느끼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석강호는 등을 벽에 붙인 자세로 안을 향해 움직였다.
엄지환의 모친이 흘리는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마르는 법이 없었다.
다 좋다. 서로 이익을 위해 죽고 죽이는 거라면.
그런데 다른 사람들 몫을 뺏은 것도 아니고, 아등바등 살아 보겠다며 뛰어다니며 만든 건데 그걸 가지고 지랄이고, 잘살아 보겠다고 애쓰던 사람들을 길바닥에서 죽이느냔 말이다.
김광민의 가족이 억지로 삼키던 눈물이 생각났고, 이어서 ‘날 좀 데려가야!’ 하고 목 놓아 울던 엄지환 모친의 모습도 떠올랐다.
다시는 못 건드리게 한다.
혹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게 조직이든, 나라든 섬뜩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스으윽.
석강호는 쭉 찢어진 눈으로 안쪽을 살폈다.
구형 브라운관 TV의 화면이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그 앞에서 AK 소총을 허벅지에 건 남자가 나무 의자에 앉아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남자 너머로 문이 없는 공간이 보였다.
저 안에 석강호가 목표로 하는 놈이 있을 거다.
스윽. 스으윽.
석강호는 사냥감을 발견한 살쾡이처럼 소리 없이 움직였다.
광고가 끝난 TV는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여자들을 나무라는 드라마를 보여 주었다.
5미터, 4미터, 3미터.
TV가 그렇게 재미있냐?
2미터, 1미터.
이렇게 다가와도 모를 정도로?
적의 머리가 바로 앞에 있었다.
와락! 와드득! 피윳!
놈에게 달려든 석강호는 왼손으로 목을 휘감은 뒤에 다시 대검으로 목을 갈랐다.
매력이 철철 넘친다는 광고를 보던 놈의 몸뚱이가 피를 철철 흘리며 늘어졌고, 쭉 뿜어진 피가 브라운관 TV를 덮쳤다.
이제 남은 것은 안쪽에 있는 중간 보스였다.
스으윽. 스윽.
석강호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불쑥 나온 남자와 딱 하고 시선이 마주쳤다.
멈칫!
눈 깜짝할 정도의 정적이 흘렀고,
와락!
석강호가 달려들었다.
퍼억! 퍽! 퍼버벅!
연달아 주먹과 팔꿈치, 다시 주먹을 뻗어 낸 석강호의 뒷덜미를 적이 거칠게 내리쳤다.
콰직! 퍽! 퍼벅! 퍼억!
근성으로 석강호 이길 사람 몇 없다.
뒷목을 세게 얻어맞았는데도 석강호는 악착같이 주먹을 뻗었고, 적의 명치에 제대로 한 방을 꽂아 넣었다.
콰다당!
적을 끌어안듯이 안쪽으로 넘어진 직후였다.
휘익! 푹!
울대를 노린 칼이 목과 가슴을 잇는 부위에 깊게 박혔다.
피쉬이이!
피가 쭉 뿜어져 나왔고,
“크르르륵!”
경련처럼 버둥대던 적의 몸이 한순간 축 늘어졌다.
석강호의 머리가 온통 피범벅이어서 독한 눈이 더욱 독해 보였다.
이제 한 놈 남았다.
***
허은실은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움직일 때마다 총을 맞은 정강이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고, 온 몸뚱이가 푸르딩딩해졌다가 시커멓게 변했는데, 그래도 침대에서 대소변을 해결하지 않을 정도로 좋아졌다.
살면서 제대로 된 칭찬, 처음 받아 봤다.
“잘했어, 허은실. 정말 잘해 냈다.”
606 특교단 중위인 임미옥이 이번 파병 여군 지휘관으로 함께 왔고, 그녀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칭찬도 해 주었다.
“끄응.”
허은실은 악착같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 그나마 멀쩡한 다리를 바닥에 대고 휠체어에 몸을 실었다.
짝다리를 안 짚으려고 했더니 오른쪽 정강이에 총알이 박히는 바람에 공식적으로 짝다리를 짚게 되었다.
“화장실?”
“예!”
“부럽다!”
건너편 침대에 누운 중사 지은희가 허은실을 보고 건넨 말이었다. 며칠 전 샤워하다가 비누를 밟고 넘어진 그녀는 지금도 다리를 침대 위에 걸고 있었다.
뼈에 철심을 박아서 당분간은 침대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해야 했는데, 그녀는 허은실이 화장실 갈 때마다 부럽다고 난리였다.
그럼 좀 적게나 먹든가.
쩔걱. 쩔걱.
문을 향해 휠체어 방향을 돌리던 허은실이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현재 병동에는 모두 6명의 부상자가 치료받고 있습니다. 간단한 수술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정도여서 근처의 위급한 주민들이 도움을 요청할 정도입니다.”
몸에 달린 장비들이 쩔걱이는 소리, 임미옥이 누군가에게 병동 상황을 설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붕이 둥그런 형태여서 멀리서 보면 군복색 칠한 비닐하우스처럼 보이는 병동은 긴 복도 한쪽으로 병실이 늘어서 있는 구조였다.
소나기는 피해 가는 게 현명하지, 굳이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흠뻑 젖을 일 없다.
허은실은 입맛을 다시며 휠체어에 앉은 채 임미옥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쩔걱. 쩔걱.
“허은실 하사는 이 병실에서 치료받고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미옥이 휙 들어왔고, 대령 계급장을 단 지휘관과 부관, 그리고 완전무장한 대테러팀 대원 셋…….
세상에…….
강찬이 들어섰다.
“차렷!”
지은희가 버럭 고함을 질렀는데,
“됐어. 환자는 보고 안 해도 돼.”
대령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말렸다.
강찬은 짙은 정장에 하얀색 셔츠 차림이었다.
대령이, 대테러팀 대원들이, 임미옥이, 부관이, 그리고 건너편 침상의 지은희가 보고 있는 앞에서 강찬은 똑바로 허은실에게 다가왔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뭐라고 답을 하지?
강찬의 뒤에 서 있는 임미옥의 눈에 불이 확 켜지는 것이 보였다.
“괜찮습니다!”
군인으로 상대할 거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여군이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허은실.”
“하사! 허은실!”
“불편한 건 없어?”
“없습니다!”
픽 웃은 강찬이 몸을 뒤로 돌렸다.
“잠깐 둘이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임미옥이 다리를 걸고 있는 지은희를 얼른 보았다. 강찬이 원한다면 바로 들고 나갈 태세였다.
“괜찮다면 휠체어를 밀고 밖을 잠시 돌아보고 싶은데요. 허은실, 그래도 되겠어?”
“괜찮습니다!”
강찬이 두 번째로 픽 웃었다. 그러고는 바로 걸어서 허은실의 휠체어 뒤로 움직였다.
“어디 가 보자.”
임미옥이 무슨 일인가 하고 눈치를 살피는 앞을 강찬은 주저하지 않고 지나갔다.
밖은 더웠다.
당연하게 에어컨을 돌린 안쪽보다 더운 게 맞다.
병동 막사 바깥의 길을 따라 강찬이 움직이는 동안, 바깥에 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이제 둘밖에 없어. 편하게 얘기해도 돼.”
허은실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병동 막사 앞에 서 있는 대테러팀 대원 외에는 실제로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잘 지냈어?”
“응.”
강찬이 웃는 소리가 허은실의 귀로 들렸다.
“굉장한 일 해냈다. 덕분에 큰 위기도 막아 낼 수 있었고.”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거려서 허은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젠 옷 사러 다니지 않아도 되겠다? 군복 입으면 되니까.”
“나, 이렇게 살면 언젠가는 지난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
허은실이 앞을 보고 혼잣말처럼 던진 질문이었다. 언제고 강찬에게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그건 용서하는 사람 마음이지.”
못 들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강찬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답해 주었다.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과거의 잘못이 없어질 거라고는 기대하지 마. 다만, 네가 지금 이 모습을 잃지 않고 견디면 언젠가는 진심으로 하는 사과를 받아 줄 때가 있을 거야. 그것 역시…….”
“용서하는 사람 마음이라는 거지?”
“그렇지.”
병동을 지나면 부대 바깥으로 널따랗게 펼쳐진 초원이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있는 외곽 초소와 함께.
휠체어를 세운 강찬은 허은실 앞으로 움직였다.
“담배 피우냐?”
“응.”
강찬이 건네준 담배를 입에 물었고, 불도 강찬이 붙여 주었다.
“후우.”
초원을 바라보는 강찬의 등이 외로워 보였다.
“미영이는?”
“잘 지내.”
“아프리카는 어쩐 일이야?”
“해결할 일이 있어서.”
담배 연기를 멋지게 뿜어낸 강찬이 허은실에게 시선을 돌렸다.
“군인이 된 거, 후회 안 되냐?”
“절대 안 해.”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
“화장실 가고 싶어.”
강찬이 이렇게 커다랗게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휠체어가 다시 병동 막사를 향해 움직였다.
“어쩌면 아프리카에 있는 우리 부대 전체가 힘들어질지 몰라.”
“들었어. 그것 때문에 우리 부대도 분위기가 평소와 달라.”
허은실은 강찬이 무얼 가슴에 두고 있는지 알았다.
말하지 않았는데 그냥 알 수 있었다.
“잠깐만.”
허은실이 부탁했고, 강찬이 휠체어를 세웠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군인이 된 거 후회한 적 없어.”
허은실은 상체를 억지로 돌려 강찬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총을 맞았고, 죽을 뻔했지만,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았어.”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허은실은 처음으로 강찬에게 떳떳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힘겨운 작전을 앞두고 명령을 고민하는 지휘관은 매력 없어. 임무를 맡기면서 성공을 믿어 주는 지휘관이 돼.”
강찬이 입술만 움직여서 웃은 뒤에 다시 휠체어를 밀어 주었다.
“그런데 진짜 그 많은 직업 놔두고 왜 군인이 된 거냐?”
이번엔 허은실이 픽 하고 웃고는 답을 하지 않았다.
너 때문이라고 어떻게 말을 하겠나.
“화장실까지 직접 데려다주려고?”
대신 속에도 없던 말이 불쑥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