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함께 보고 싶습니다 (2)
바리케이드 앞에서 차가 멈추자, 4명의 대원이 빠르게 다가왔다.
차에서 내린 강찬은 대원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반갑다. 이 먼 곳 프랑스에서 보는 우리 대원들은.
쩔걱. 쩔걱.
“안녕하십니까? 부원장님.”
통역병이 환한 얼굴로 강찬에게 다가왔다.
“수고 많다.”
“조국을 위한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
손가락 2개가 없는 통역대원의 말을 듣는 순간, 강찬은 은골로를 제거하고, 에르완과 협상하며 쌓였던 불쾌한 찌꺼기들이 스르륵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프랑스다.
한국의 국가정보원 대테러팀이고.
A팀은 한국에 남고, B팀은 이곳 프랑스에서 라노크를 지켜 준다.
팔에 달린 태극기가 달빛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헬멧과 두건 사이에서 대원들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별장을 둥그렇게 싸고 우리 대원들이 있는 거다.
이렇게 애쓰다가 죽어도 그냥 이름 없는 별이 되는 걸 알면서, 강찬의 말 한마디에 조국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밤이라서 그럴 거다.
프랑스에서 외롭게 싸운다고 생각하다가, 이런 동료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우는 대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게 큰 위로가 돼서 그런 것 같았다.
“대테러팀!”
어두운 프랑스의 산과 호수에 강찬의 고함이 커다랗게 퍼져 나갔다.
“너희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
무전기가 있다. 그런데도 강찬은 어두운 하늘과 산과 호수를 향해 다부진 고함을 질러 댔다.
“너희의 이 수고와 희생 다음에! 대한민국은! 진정한 강국으로 일어설 거다! 고맙다! 대터러팀!”
강찬의 외침이 끝나자 묵직하고 뜨거운 침묵이 차량 주변을 감쌌다.
운전석에 있던 위고가 분위기에 눌린 것처럼 강찬의 옆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태극기여! 받아다오! 내 영혼을!”
B팀 조장이 분명한 고함이 커다랗게 터져 나왔고,
“조국이여! 받아다오! 내 뜨거운 피를!”
대원들이 다 함께 지른 구호가 산을 타고 돌아왔다가 호수를 향해 달려갔다.
구호에 담긴 열정이 고스란히 위고에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굉장합니다.”
위고가 혼잣말처럼 감탄했고,
“이, 씨…….”
통역대원이 거친 감정을 쏟아 냈다가 홱 강찬의 눈치를 살폈다.
피식.
“출발한다.”
위고가 운전석에 앉을 때,
척!
손가락 2개가 부족한 통역대원이 경례를 건네주었다.
라노크와 안느, 루이가 별장 앞에 있다가 강찬을 맞았다.
“벨을 너무 요란하게 울렸나 봅니다.”
“좋았습니다. 더할 수 없이 든든했으니까요. 오늘부터는 편안하게 잠이 들 것 같군요.”
강찬을 안은 라노크가 더없이 만족하고 인자한 얼굴로 양쪽 볼에 소리 나는 프랑스식 인사를 마쳤다.
“어서 와요.”
이어서 안느와 비슷한 인사를 나누었고, 루이와 손을 잡아 악수했다.
“라파엘!”
“어서 오십시오, 무슈 강.”
고개를 숙이는 라파엘에게서 못 본 사이 흘러 버린 1년을 보았다.
강찬은 다가가서 그를 안아 주었다.
웃긴다.
좋으면서, 감동했으면서도, 뻣뻣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라파엘의 모습이 말이다.
“오늘은 특별한 홍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기대되는데?”
“충분히 그러셔도 됩니다.”
나이 든 그의 눈에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라노크가 찾아낸 인재, 오늘부터 프랑스 정보총국의 실질적인 실세, 그리고 정보 세계의 1인자를 맞이한 그의 눈빛은 그랬다.
위고를 위해 루이가 아래층에 남았고, 강찬은 세 사람과 함께 2층에 있는 테라스로 올라갔다.
탁자에 둘러앉자, 호수와 산을 담은 상쾌한 바람이 힘든 하루를 위로해 주는 것처럼 강찬을 쓸고 지나갔다.
홍차, 시가, 담배, 그리고 반가운 사람들.
“강찬 씨는 다른 사람이 엄두도 못 낼 일을 놀랄 정도로 쉽게 처리할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렇습니다.”
라노크가 시가를 들었고, 강찬과 안느는 담배를 집었다.
찰칵.
불을 붙이느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처럼 기분 좋은 침묵이었다.
“정보총국 일은 고맙습니다.”
구렁이도 나이를 먹은 모양이었다.
회한이 담긴 얼굴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바쁠 텐데 어쩐 일입니까?”
“대사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살인마가 될 것 같아서요.”
라노크가 눈꼬리를 길게 늘이며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강찬 씨.”
“예, 대사님.”
“이제 더는 도움되지 못하지만, 미안하게도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홍차 잔을 내려놓느라 대꾸하지 못했다.
“수일 내로 위고를 통해 사람을 한 명 소개하겠습니다. 그를 지켜 주겠습니까?”
“정보총국의 미래인가요?”
“기억하고 있군요. 그 친구에게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언젠가 한국에도 다녀왔다고 하더군요. 운이 없어서 강찬 씨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한국을 본 것으로도 무척 행복해했었습니다.”
강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차라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대사님께서 말씀하셨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 봤을 텐데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으니까요. 그를 보호해 주고, 정보총국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저도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라노크가 궁금한 얼굴로 강찬을 바라보았다.
“그의 성장을 함께 지켜봐 주십시오. 이런 생활이 불편하시겠지만, 대사님의 경호만큼은 제가 계속 맡을 겁니다. 그래서 누군지 모를 새로운 인재가 프랑스 정보총국을 이끌어 가는 것을 함께 보고 싶습니다.”
라노크가 멋진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안느가 고마움 가득한 눈으로 강찬을 보았는데, 라파엘은 이상하게 울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
숫자가 워낙 많았다.
어지간한 돈으로는 먹는 것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사실 말 다한 거였다.
13만은 그런 숫자였다.
체격이 전체적으로 작았다.
그런데 어디로 들어가는지 북한군 병사들은 모든 것을 먹어 치운다는 흰개미 떼만큼이나 무서운 식욕을 보였다.
세끼 식사만이 아니다.
간식으로 지급되는 라면과 초콜릿 빵, 그 외에 과일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화장실을 수없이 들락거리면서도 백 일 굶은 송아지 떼처럼 우유를 마셔 댔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리면 없던 정도 생겨나는 법이다.
점심을 막 먹고 난 다음이었다.
“남조선 물자가 동나지 않겠소?”
처음과 달리 안철호는 재미없는 농담도 던졌다.
“보시오, 차 대위님. 인차 우리 오후에는 훈련을 하든, 공차기를 하든 합시다.”
차동균의 시선을 받은 안철호가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식충이로 먹을 걸 얻으러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인차 조금씩이라도 친해져야 작전을 나가서도 엉뚱한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선 공차기를 해 볼까요?”
“저쪽에 외인부대까지 세 편으로 나눠 공차기하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인원이 많으니까 두 편을 만들면 좋지 않겠습니까?”
“부상 위험이 있으니까 우리가 하는 방식의 공놀이를 하지요. 격구라고 하는 겁니다.”
“좋을 대로 합시다. 방법만 알면 되지 않겠습니까?”
“외곽 경계 인원을 제외하고 무기는 두고 나오는 것으로 하시죠.”
“그렇게 합시다.”
다른 말 할 것 없이 오후의 일정이 정해졌다.
아프리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선선한 점심 무렵이었다.
멀리 펼쳐진 말라위의 평야를 보며 안철호가 외롭게 서 있었다.
“이렇게 함께 적을 향해 설 줄은 몰랐소. 남조선의 전사가 엄청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인차 남조선은 정말 위대한 나라로 발전하는 모양이오.”
차동균을 힐끔 본 안철호가 아차 하는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결단에 우리가 이리 오지 않았습니까? 인차 우리 북조선도 금방 발전할 거요.”
차동균이 말없이 웃기만 하자,
“위대한 북조선 군대의 힘을 오후에 보게 될 거요.”
안철호가 짐짓 만들어 낸 굳은 얼굴로 북조선 막사를 향해 걸었다.
***
남일규가 앞에 섰고, 이두희가 뒤를 따랐다.
특이하게 이곳에서도 남일규는 왼쪽 등에서 어깨로 대검을 걸었고, 그 외에도 허리와 발목에 추가로 대검을 걸어 두었다.
대신 왼쪽 발목과 왼쪽 허리에는 권총을 걸었다.
한마디로 소총이 없는 거여서, 이두희는 MP5SD 소총과 탄창, 수류탄, 권총, 권총 탄창, 대검을 몸에 걸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달빛이 군데군데 뭉쳐 있어서, 달빛을 안은 회백색 벽이 지나가는 모든 것을 그림자로 보여 주는 밤이었다.
검지와 중지로 눈을 가리킨 남일규가 대검을 입에 문 채 앞으로 슥 사라졌다.
지켜보라는 의미다. 문제가 생기면 엄호하라는 뜻인 거 안다. 그런데 뭘?
이두희가 소총을 겨눈 자세로 남일규가 간 방향을 노려볼 때였다.
스윽!
하마터면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느닷없이 사람 대가리가 대롱대롱 허공에 나타나는 것에 놀라서 그랬다.
그리고 잘린 사람 머리보다 더 무서운 눈을 하고 남일규가 나타났다. 심지어 그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대가리 주인의 머리칼을 풀어서 담벼락 끝의 틈에 끼어 걸었다.
서울 구경이다.
대한민국 요원, 비무장팀의 후배를 건드린 놈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남일규의 독기 어린 경고이기도 했다.
남일규가 나갈 방향을 검지와 중지로 가리켰다.
어쩌면 사람이 움직이는데 저토록 조용할 수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두희가 움직였고, 1분쯤 지난 다음이었다.
함께 움직이던 남일규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는 이두희를 향해 흐뭇한 눈으로 웃었다.
후배의 발전이 기쁘다는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두희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남일규는 검지와 중지로 다시 눈을 가리켰다. 두 번째 목표를 발견했다는 의미였다.
이두희가 소총을 어깨에 걸고 사격 자세를 취하는 것을 확인한 남일규가 대검을 거꾸로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초조하다. 함께 들어가고 싶다.
그러나 남일규는 이 방식을 원했다.
선배가 아니었다면, 동기나 후배였다면 악을 바락바락 써서라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했을 거다.
“크르륵!”
남일규와 함께 움직인 뒤로 처음으로 비명이 들렸고,
퍼억! 핏! 핏! 피윳! 핏!
이어서 섬뜩한 대검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와락! 쩔걱!
이두희는 총을 겨눈 자세로 남일규가 들어간 곳을 향해 뛰어들었다.
또 놀랐다.
대여섯 명의 적들이 피투성이로 늘어져 있는 가운데서 적의 목을 뒤에서 안은 남일규가 그걸 잘라 내고 있었다.
그러게! 왜 우리 후배를! 대한민국 요원을 건드려!
뒷모습만 보았다.
그런데도 남일규가 부르짖는 절규를 듣는 것만 같았다.
실력은 뒤지지 않았지만, 국력에 밀려서 후배들을 잃어야 했던 비무장팀의 비애, 그래서 이렇게 독해져서라도 적들에게 경고해 왔던 남일규의 몸부림이 그의 어깨에 숙명처럼 걸려 있었다.
툭!
적의 목을 끊어 낸 남일규가 피가 뚝뚝 흐르는 대가리를 천장에 매달았다.
저런 선배 앞에서 방심하는 건 죄다.
그것도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큰 죄.
이두희는 조용하게 몸을 돌려 소총을 겨눈 자세로 움직였다.
앞으로 대한민국은 강해질 거다.
다시는 우리 요원을 함부로 못 건드릴 정도로, 만에 하나 건드렸다면 이 정도 응징은 각오해야 할 만큼 강한 나라가 될 거다.
이두희와 남일규가 동시에 앞쪽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최종일과 우희승은 원래부터 한 조였다.
최종일이 검지와 중지로 앞을 두 번 가리키자 우희승이 소총을 겨눈 자세로 벽을 타고 돌았다.
와락! 터억!
의자에 앉아 있는 적의 대가리를 감싸고 주둥이를 틀어막은 다음,
홰액! 으드드득!
등으로 얼굴이 돌아올 정도로 사정없이 돌렸다.
정확하고 명쾌한 동작이었는데, 최종일은 만족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강찬처럼 번거롭게 주둥이 막지 않고 적의 목을 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건 연습하기가 어렵다.
애꿎은 동물들 세워 놓고 머리를 돌려 가며 연습할 것도 아니고 말이다.
조용하게 책상에 엎드린 것처럼 적의 몸뚱이를 기울였는데, 시선이 천장으로 가 있어서 모양이 좀 기괴했다.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다.
정보대로 이 안에 타깃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다.
최종일이 검지와 중지로 눈을 가리키자, 우희승이 소총을 들고 먼저 움직여 안쪽을 겨눴다.
둘이서 눈이 마주친 다음이었다.
‘하나, 둘!’
홱! 와락!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잠들었던 두 놈이 놀란 것처럼 고개만 들었다.
휘익! 푸욱! 서걱!
최종일이 안쪽 놈을 향해 다이빙하듯 몸을 던져 목에 대검을 꽂아서 그어 버렸고,
퍼억! 짜각!
우희승이 소총으로 볼을 찍고,
콰자작!
목을 돌렸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깔고 있는 놈의 대가리를 확인한 최종일은 만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광민을 노리고 달렸던 승용차에 탑승했던 현장 지휘관 놈의 대가리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