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2부)-25화 (444/520)

제3장. 원하는 게 죽음이냐? (1)

카페를 나선 강찬이 올라타자 승용차가 곧바로 출발했다.

“요원들은?”

강찬이 능숙한 프랑스 말로 던진 질문에,

“약속 장소로 철수해서 대기합니다.”

운전석에 앉은 위고가 빠르게 답했다.

강찬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노크에게 전화하지 않았고, 전화가 오지도 않았다.

그건 안느도 마찬가지였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파리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라노크의 변하지 않는 믿음처럼.

도로를 타고 움직인 승용차가 일방통행인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 뒤에 다시 큰길로 나섰다.

미행하는 차가 있다면 저 좁은 일방통행로에서 무조건 걸려든다.

“미행은 없습니다.”

위고의 보고를 들은 강찬은 전화기를 꺼내 저장된 번호를 눌렀다.

국가정보원 이집트 분실.

통화 버튼을 누른 석강호는 전화기를 얼른 귀에 가져갔다.

“나요.”

[이쪽은 준비 끝났다.]

“우리는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에 움직일 거요.”

[조심해.]

“맡겨 두쇼.”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낡은 책상 앞에 있는 오래된 원형 탁자였다.

전화기를 한 번 들여다본 석강호는 곧바로 둘러앉은 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장은 준비 끝났답니다.”

남일규를 비롯해 이집트 분실장 민환근까지 진지한 얼굴로 석강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곳의 지휘를 석강호에게 맡겼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주변 민가가 문젠데…….”

석강호는 지도에 그려진 구부러진 골목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좌우에 있는 어느 집에서도 소총 든 반군이 튀어나올 수 있고, 어쩌면 골목 입구에서부터 걸려 있는 모든 집이 한통속일 수도 있었다.

무장한 여자와 아이들이 길을 막으면 골치까지 아프다.

“2인 1조로 들어가자.”

석강호의 결정에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쪽을 치고 바로 넘어가야 하니까 분실장은 교통편 확보해 줍시다.”

“알겠습니다.”

“이 건으로 혹시 이쪽 분실에 보복이 올지 모르니까, 현지 요원들은 철저하게 얼굴 가리는 거로 하고, 성공하더라도 우리가 했다고 굳이 알리는 일은 없는 게 좋아요.”

“예.”

민환근이 답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조를 어떻게 나누면 좋겠습니까?”

“석 선생이 생각하는 대로 하지.”

석강호가 질문했고, 남일규가 생각을 말했다.

남일규는 처음 불렀던 버릇대로 석강호를 아직 ‘선생’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선배하고 두희, 종일이하고 희승이. 이렇게 가지요.”

이대로라면 석강호는 혼자 움직이게 된다.

“나는 아랍어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위험이 적어. 그러니까 일단 이렇게 움직이는 거로 하자. 무전기 있으니까 문제될 경우에 연락해서 지원할 수도 있고.”

어차피 지휘를 맡긴 일이다.

“분실장은 가능한 가까운 곳에 저격수를 배치해 주쇼.”

“대기 중입니다.”

느슨하던 줄을 양쪽에서 당긴 듯한 팽팽한 긴장이 이집트 분실 안으로 퍼져 나갔다.

***

말라위 릴롱궤(Lilongwe, Malawi)에서 트럭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밀롱드(Milongunde) 기지.

사제 지프로 들어온 4명의 용병이 입구에 선 제라르를 향해 경례를 건넸다.

지프를 따라 트럭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었다.

“환영한다.”

“지옥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할 말은 아니잖소?”

제라르가 입술 한쪽을 들어 웃는 사이 지프에서 내린 네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지휘관은 어디 있소?”

“먼저 들를 곳이 있어서.”

네로의 시선 앞에서 트럭들이 들어섰고, 계급장 없는 군복 차림의 용병들이 차에 실린 무기들을 내리고 있었다.

백인, 흑인, 동양인, 젊은 남자, 중년 남자들이 흙먼지 일어나는 속에서 제법 분주하게 움직였고, 그들이 만들어 낸 고함이 밀롱드 기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인원이 전부인가?”

“그럴 거요.”

트럭에서 내린 인원은 70명가량 되었다.

많다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퇴역한 용병들을 기준으로 한다면 적은 인원도 아니었다.

“특수팀 우선으로 꾸려서 그렇소.”

제라르는 고개만 끄덕였다.

뭐라고 해도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다.

그나마 강찬을 팔았으니까 이 정도인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반도 채우지 못했을 거다.

“오늘은 이게 전부고, 내일부터 사흘 동안 이 정도……? 혹시 정말 70명이 다였다고 생각한 거요?”

제라르를 의심스럽게 들여다보던 네로가 눈살을 구기며 웃었다.

“구대장은 갓 오브 블랙필드의 위력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거요. 연락을 시작하고 나서 제대를 신청하겠다는 전화도 있었소.”

볼을 우그러트리며 웃는 제라르를 보며 네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 갓 오브 블랙필드란 이름은 평생 이런 의미일 거요. 전설이 된 그 양반을 잊을 만할 때 아프가니스탄 중계가 나왔으니. 그의 이름을 아는 대원들이 어떻게 그 모습을 잊을 수 있겠소?”

무기들을 다 내린 남자들이 허공을 향해 뽀빠이처럼 양손을 들고서 ‘휘- 호오!’ 하고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2대에 걸친 갓 오브 블랙필드를 탄생시킨 나라라니. 그러고 보면 한국이란 나라가 전투 민족이 아닌가 싶은데, 가 본 느낌은 어떻소?”

네로를 힐끔 본 제라르가 수긍할 수밖에 없다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강한 나라.”

“역시!”

제라르의 답을 들은 네로는 정답을 맞힌 유치원생처럼 반가운 얼굴이었다.

***

강철규, 한진성과 함께 걸은 차동균이 북한군 소좌 앞으로 다가갔다.

“차동균입니다.”

“안철호요.”

안철호의 뒤에 있는 4명의 북한군이 날카로운 눈으로 차동균 일행을 살폈다. 전체적인 첫인상은 키가 작다는 느낌이었다.

“막사는 저쪽에 준비했습니다. 피곤할 텐데 우선 쉬고, 한 시간 뒤에 저녁 식사입니다.”

“차동균 씨.”

차동균의 말끝을 문 것처럼 안철호가 입을 열었다.

오랜 비행을 견딘 사람 특유의 피곤이 그의 눈과 볼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우리를 지휘할 사람이 누구요?”

표준어에 북한의 억센 억양을 눌러 담은 듯해서 중국에 살던 우리 동포가 아닌가 싶은 말투였다.

“내가 맡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인차 우리 차동균 씨에게 지시를 받으면 되겠습니다.”

“협조하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양쪽 모두 계급장을 달지 않았다.

경계하는 눈초리도 비슷했다.

적으로 상대하는 게, 차라리 솔직하게 총구를 들이대는 것이 어쩌면 더 편한 상대인지 모른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적대감, 경계심, 그리고 의심들이 뒤엉킨 가운데 안철호가 강철규를 힐끔 보았다.

혹시 하는 눈빛이었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구내 통신망을 이용하면 됩니다.”

안철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동균이 몸을 돌렸다.

쩔걱. 쩔걱.

서너 걸음을 옮겨 갔을 때였다.

“보시오.”

안철호가 다시 차동균을 붙들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음성이었다.

차동균이 몸을 돌렸고, 강철규와 말라위 용성부대 책임자 한진성 역시 안철호를 향해 돌아섰다.

“혹시 비무장왕이라는 전사 아니오?”

강철규를 향한 안철호의 시선 속에 분명하게 적대감이 올라 있었다.

소개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할 이유도 없고.

그런데 안철호의 눈빛에 적대감이 워낙 확연해서 어떻게 할까 하는 사이, 차동균의 대꾸가 늦어 버렸다.

어색함이 차동균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독촉할 때였다.

강철규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다 봤다.

안철호, 그 뒤에 선 4명의 북한군, 다시 그 뒤에 좌우로 줄을 서 있는 북한군 병사들 모두.

“박상식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말조심하시오.”

북한군 소좌 안철호의 날카롭게 예리한 경고가 울려 나오는 순간이었다.

웃고 있던 강철규의 눈이 삽시간에 얼어붙는 것처럼 차갑게 변하더니 이어서 감정을 깡그리 털어 낸 것처럼 건조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차동균은 강철규의 눈빛이 변하는 과정을 처음 봤다.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지금은 골목 앞에서 대장 가리는 그런 순간이 아닌 거다. 어설프게 나서 강철규를 말리면 이후에 그는 제대로 말도 꺼내기 어려운 모양이 된다.

“죽고 싶으냐?”

그때 불쑥 강철규의 말이 건너갔고, 안철호와 병사들의 눈끝이 꿈틀거렸다.

“박상식이 너희에게 과거의 복수를 하라고 했다면 나 역시 내 후배들의 복수를 해 주마.”

감정 안 담긴 사람 음성이 이렇게 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강철규가 뱉는 말은 그런 느낌이었다.

협박이 아닌 거다.

지금 강철규는 진짜 속마음을 전하고 있는 거 맞다.

다들 그렇게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안철호가 아직 하얗게 번들거리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어서 마치 ‘할 수 있으면 해보시오.’라는 느낌이었다.

피식.

강철규가 잔인하게 웃었고,

번득.

안철호의 눈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차동균은 강찬의 말을 떠올리며 숨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이 정도면 충돌을 피하기는 어렵다.

아차 하는 순간에 안철호의 목이 돌아갈 거고, 말릴 방법 없는 교전이 벌어질 거다.

그렇다면 강철규가 안철호를 해결하는 순간에 뒤편 네 놈을 맡아 줘야 한다.

‘일단 소총을 탈취해서.’

차동균이 안철호 뒤편의 4명을 노려본 직후였다.

“실례했소.”

어쩐 일인지 안철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부장 동지에게는 말을 들었소. 조심하라고, 충분히 예우하라는 말씀이었소. 그래서 물었던 거지, 다른 뜻은 없소.”

말을 정말 좋았다.

그런데 표정은 칼 한 자루 들고 있어야 어울릴 만한 딱 그런 느낌이었다.

“안철호.”

“말씀하시오.”

“전투가 벌어지면 지켜보겠다.”

“실망하지는 않을 거요.”

숨을 참는 대결을 하는 것처럼 대화가 오갔다.

그러고도 두 사람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차동균이 두 번째로 뒤편의 4명과 그들이 든 소총을 스치듯 살핀 직후였다.

아슬아슬한 경계를 타는 것처럼 안철호가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라우! 식사하고 쉰다!”

그 말을 끝으로 안철호가 몸을 돌렸고, 차동균을 시작으로 강철규와 한진성도 돌아섰다.

북한군 막사와 용성부대는 50미터쯤 간격이 있었다.

적당히 걸었다고 생각한 차동균은 강철규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놈들은 우리와 원한이 많지. 저쪽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손꼽히는 전사 두 놈의 목을 일규가 매달았고.”

쩔걱. 쩔걱.

한진성의 놀란 눈을 못 본 것처럼 강철규가 말을 계속 이었다.

“동식이가 놈들 위장 장소에 클레이모어를 터트렸었지.”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 훈련을 담당했던 상위 계급 지휘관이 총살당했다고 들었다.”

차동균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진상은 믿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

강찬은 사람의 얼굴이 박힌 서류들을 노려보았다.

“우선 이렇게 3명입니다.”

“잘못 판단했을 확률은?”

“라노크 위원장님의 동선을 파악한 보고와 말씀하신 위성 신호를 수신한 라인이기 때문에 전혀 그럴 일 없습니다.”

못 본 사이 위고는 배가 더 나왔다.

그래서 애처롭게 올라간 바짓단 아래로 정강이가 반이나 드러나 있었다.

“현재 위치는?”

“모두 함께 있습니다.”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님의 경계는?”

위고가 무슨 의미인가 하는 얼굴을 들었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라노크 위원장님 외곽에 한국 대테러팀을 배치하는 데는 한 시간 정도 더 필요합니다.”

강찬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학습의 동물이다.

그러니 샤흐란에게서 배운 교훈을 되새겨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는 거다.

적의 이마를 뚫기 전에 목구멍에 총알이 박히지 않게 하려면, 적을 상대하기 전에 안에 있는 총구를 치워야 한다.

“주변 도로 상황을 꺼내 봐.”

위고가 파리의 한 지점이 표시된 A4 용지를 강찬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로망, 이 지겨운 인간.

이번엔 정말 깔끔하게 모두 보내 주마.

강찬은 고집스러운 입술의 남자 사진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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