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힘이 최고지? (2)
말라위의 수도 릴롱궤에 도착한 것은 한국에서 출발한 지 꼬박 25시간 만이었다.
우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하늘에서 본 초원은 군데군데 녹색을 품었고, 건기가 시작되어서 아프리카의 느낌과 다르게 선선한 기운도 감돌았다.
차동균이 활주로에 내려서자 대기하던 트럭이 곧장 수송기 앞으로 다가왔고, 가장 선두에 있던 트럭의 조수석에서 파병부대 복장의 대위 한 명이 내렸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말라위 용성부대 대위 한진성입니다.”
“대위 차동균입니다.”
검게 그을린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눴고,
“우선 기지로 이동하겠습니다.”
한진성이 수송기 앞에 서 있는 트럭을 가리켰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특수팀의 이동이었다.
강철규도 눈에 띄지만, 그렇게 따지면 제라르는 아예 시선을 당길 정도였다.
공항에서 자질구레한 인사로 시간을 끌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이목에 조금이나마 덜 걸리는 게 훨씬 현명한 일이었다.
쩔걱. 쩔걱.
몸에 걸린 무기와 장비, 앞으로 돌려 총구를 아래로 내려 든 소총, 군화 소리가 활주로를 울리고, 잠시 뒤에 트럭이 일제히 공항을 빠져나갔다.
***
최종일을 본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이집트 분실장 민환근은 멈칫했다가 기가 막힌다는 웃음을 꺼내 들었다.
한 회사라고 표현하는 국가정보원은 어지간해서는 어떤 일을 하는지 알기 어렵고, 특수요원쯤 되면 임무를 알려 주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
“자네가 오는 줄은 몰랐어.”
거기에 이집트 분실장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요원의 임무까지 알기는 정말 어렵다.
“인사드려. 이분이 남일규 선배님, 그리고 석강호 팀장님.”
악수를 할 줄 알고 손을 내밀었던 남일규와 석강호에게 민환근은 먼저 절도 있게 상체를 숙이는 동작으로 인사했다.
“선배님, 말씀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석 팀장님, 지환이 끝까지 챙겨 주신 점 감사합니다. 말씀만 들었는데 이제 뵙게 됐습니다.”
남자가 전하는 인사였다.
손을 내민 남일규가 안쓰러운 눈으로 민환근의 손을 잡았고, 이어서 석강호가 그와 악수를 나눴다.
“남들의 눈이 있으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일행은 밖에 세워 둔 승합차에 올라 바로 출발했다.
“앞쪽과 뒤에 따르는 차가 우리 요원들입니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바로 소개하겠습니다.”
운전도 민환근이 직접 했다.
“살라피주의자 동향은 파악했소?”
“그쪽 우두머리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근거지가 워낙 민가 밀집 지역이고, 그쪽에 병력을 얼마나 배치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석강호가 질문했고, 민환근이 바로 답했다.
흰색과 검은색이 번갈아 칠해진 한 뼘 높이의 중앙 분리대, 흙먼지가 펄펄 피어나는 도로 주변, 낮은 벽돌 건물에 나무로 차양을 만든 카페,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회색 바지에 녹색 셔츠, 조끼를 입은 남자들.
승합차 바깥은 확실히 이집트였다.
누구도 바깥을 두리번거리지 않아서 승합차 안의 분위기는 엄숙한 느낌이었는데, 민환근은 슬며시 뜨거워지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만 가능한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 요원들이 살해당한 것에 대한 응징은 리비아 작전을 끝으로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 구경의 창시자 남일규에 석강호, 그리고 훈련 동기 중 가장 뛰어났던 최종일까지 달려왔다.
민환근은 들키지 않도록 마른침을 삼켰다.
정보원은 국적을 포기했다는 각오로 일한다.
힘없는 나라 정보원은 죽으면 그냥 개죽음으로 처리되고, 국가정보원 벽에 별 하나 걸리는 게 전부다.
아프리카 파병은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주고, 이런 모습은 요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 준다.
승합차를 몰고 달리는 동안, 민환근은 국가가, 정부가, 그리고 태극기가 가족과 떨어져 목숨 걸고 싸우는 요원들을 알아주는 느낌이었다.
“후우.”
나직하게 숨을 내쉰 임환근은 앞에 달리는 승용차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다.
***
가와구치는 쥐어 짜낸 듯한 근엄한 표정으로 전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
조부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보국 수장이 된다.
상대의 말을 들으며 가와구치는 주문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되뇌었다.
[알다시피 위성을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뿐이오. 찾기만 하면 바로 기대했던 결과를 얻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런지, 전화기 건너편의 스웨이든은 어쩐지 태평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사라진 지 이틀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특수요원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서 그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염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증평팀과 606이 말라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제라르까지 확인했으니 당장 커다란 위협은 없을 겁니다.]
“남은 인원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미스터 가와구치, 이집트에도 그의 핵심 인원이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집트에 몰래 잠입한 것이 아닌가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건 또 그런 거다.
특히, 강찬이 석강호와 어떤 사이인지를 짐작하는 가와구치는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서양인은 모르는 동양적인 감성을 따지면 특히 그렇다.
[사흘만 견뎌 봅시다. 정 안 되면 그를 끌어낼 최후의 방법을 쓸 생각이니까요. 이집트에 있지 않다면 그는 분명 한국에 있을 거요.]
설마 그의 부모를?
하긴, 그렇게 하면 그는 무조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거다. 질문을 던져 확인하고 싶었지만, 가와구치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군모와 군복에 칼을 차고 자신을 바라보는 조부의 사진을 보고 나자, 당당하겠다는 각오가 새롭게 생겨났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미스터, 스웨이든.”
가와구치는 굳은 얼굴을 되찾고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스웨이든은 전화기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멍청이!’ 하고 욕을 뱉었다.
정보국 수장이라는 인간이 고작 강찬이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로 저렇게 겁을 먹을 줄은 몰랐다.
물론, 일본 정보국이 보유한 특수요원의 수와 수준이 턱없이 부족하긴 하다만, 그렇더라도 수장은 좀 더 단단한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놈이고, 저놈이고!”
영국이 움츠러들더니, 일본은 숫제 벌벌 떠는 꼴로 나온다.
강한 적을 맞아서는 이쪽도 강하게 나서야 하는데.
스웨이든은 강찬을 떠올리며 위성사진에 시선을 주었다.
위성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다.
아프리카에서 블랙헤드를 구하느라 정보국 총회에서 큰소리를 내지 못했고, 그 바람에 각 정보국 위성은 한국의 통제를 받는다.
스웨이든은 예상 목표 지점 세 곳을 천천히 살폈다.
강찬의 부모가 사는 용인.
고성을 책임진 자원청장 김관식.
그리고 국가정보원 원장 고건우.
이 중 하나를 때리면?
강찬은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 그에게 에너지파를 뿜어내면 힘들게 하는 모든 일이 끝나는 거다. 그렇다면 적당한 장소에 필요한 장비를 설치하는 번거로움 따위 얼마든지 감당할 만하지 않겠나.
사흘, 사흘 안에도 그를 찾지 못한다면 말이다.
마음을 굳힌 스웨이든은 CIA 아프리카 책임자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레이입니다.]
“현재 상황은?”
[요원들이 UIS에 잠입한 상태입니다. 내전이 일어난다면 바로 조치할 수 있습니다. 지원하기로 한 무기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암시장 장악은?”
[거래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요원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좋아. 엉뚱한 놈들이 구매하겠다고 나서지 않도록 주의하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쪽에서 활동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신경 써.”
[알겠습니다.]
스웨이든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아프리카를 독립시킨다고?
비쩍 마른 배고픈 북한 병사와 다 늙어 빠진 퇴역 용병을 이끌고 그 넓고 거친 아프리카를?
멋지게 한 대 맞은 느낌이지만, 여기까지다.
스웨이든은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역시 승부는 이런 속 타는 긴장감이 좀 있어 줘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최종 승리자가 된다면 영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과 프랑스 역시 미국의 입김을 거스르지 못하게 될 거다.
스웨이든은 용인의 주소를 노려보며 검지를 두들겼다.
***
프랑스 파리, 앙빠스 쌩뜨히 근교의 작은 카페였고, 십자 나무 사이에 낀 유리가 오후의 햇살을 좁은 카페 안쪽으로 깊게 찔러 대는 시간이었다.
소피안 타드뷔르는 복잡하고 심오한 눈빛과 표정으로 테이블 건너편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침묵이 체크무늬 테이블보 위를 흘러 바닥으로 떨어지도록, 타드뷔르는 나이프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눈 안 아프냐?’ 하는 얼굴로 그를 빤히 보고 있는 게 그랬다.
그의 살기 넘치는 눈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은 맹세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타드뷔르는 속으로 고개를 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갱단이다. 그것도 프랑스 정보국을 잘못 건드렸다가 조직이 반쯤 무너져 무척 힘든 세흐토 브니므.”
맞은편의 남자가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것이 또 소피안의 속을 긁었다.
보통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혹시 소피안의 기분이 상할까 봐 ‘그래도 당신이 있는 한 당신의 조직은 프랑스 최고요.’, 뭐 이런 말을 지껄여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프랑스어가 능숙한 이 동양인은 오히려 ‘괜히 왔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이걸 죽여 버려?
아니면 제대로 공포에 질리게 만들어?
“반쯤 망가졌어도 우리는 이곳을 지배한다. 그런 건 잘 모르는 모양이군.”
상대방 남자는 상관없다는 투였다.
“어쨌든 예전에 비해 반쯤 무너졌다는 거지?”
소피안은 입술 한쪽을 들어 이죽거리는 웃음을 그려 냈다. 그가 사람을 죽이기로 했을 때 흔히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렇다면 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지.”
맞은편의 동양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앉아!”
소피안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함부로 내 앞에서 먼저 일어나지 마라.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적어도 이 카페에서 살아서 나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다.”
맞은편의 남자는 또다시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차라리 죽어라.
그래서 나를 모욕한 대가를 치르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를 늦게나마 배워라.
소피안의 인내가 양쪽에서 잡아당긴 엿가락처럼 늘어져서 막 끊기려는 순간이었다.
동양인 남자가 탁자에 팔을 걸치고 상체를 앞으로 가져갔다.
“가까이 와.”
고개를 갸웃했던 소피안은 어디까지 가나 보겠다는 심정으로 맞은편 남자를 향해 상체를 가져갔다.
“갱단은 힘이 최고지?”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지?
소피안이 상대를 날카롭게 노려본 다음이었다.
맞은편의 남자가 스푼을 들었다.
움찔.
소피안의 반응이 웃겼나 보다.
피식 웃은 남자가 거울을 내미는 마법사처럼 소피안의 얼굴을 향해 스푼을 내밀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스푼 안에서 소피안은 볼이 널따랗게 벌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널따랗게 벌어진 그의 얼굴에 저격용 레이저 불빛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소피안이 놀란 눈으로 스푼과 동양인 남자를 번갈아 본 직후였다.
“지금부터 한마디라도 입 밖으로 뱉으면 네놈부터 시작해 이 카페에 몸을 숨긴 놈들 모두 이마를 뚫어 주마.”
무언가를 말하려던 소피안은 입술을 콱 오므렸다.
스푼을 들기 직전에 한마디라도 뱉으면 모조리 이마를 뚫어 주겠다던 동양인 남자의 경고가 떠올라서였다.
“언젠가 약속을 하나 받았지. 요구하는 것 하나는 무조건 들어준다고.”
소피안의 표정을 본 동양인 남자가 픽 하고 웃더니 ‘말은 해도 좋지만, 이제부터 경어를 사용해.’라고 경고했다.
“보스와 한 약속… 이… 오?”
상대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요구할 때 건네는 이름은… 말해 주시오.”
동양인 남자는 원래 유쾌한 성격인지 소피안을 보며 또다시 픽 웃었다.
“갓 오브 블랙필드.”
젠장할……!
소피안은 이를 꽉 깨물었다.
하마터면 목숨만이 아니라 조직 자체가 깨끗하게 없어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