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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오브블랙필드(2부)-21화 (440/520)

제1장. 서양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었지요 (1)

성남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멋들어지게 머리를 감추는 시간이었다.

활주로에 멈춰 선 비행기에서 내린 강찬은 기다리던 최종일 일행과 함께 곧바로 사무실을 향해 이동했다.

지금까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작전, 이틀 전이다.

상대의 목을 노리는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특수팀과 요원들도 희생을 각오하고 달려들어야 하는 계획인 거다.

재킷에 셔츠만 입은 강찬은 뒷좌석의 창으로 보이는 도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래 견뎠다.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참 잘 견딘 시간이었다.

가까운 사람 지켜 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엉뚱하게 달려오더니 삽시간에 여기까지 온 건데, 이제는 어떤 형태로든 확실하고 분명한 마무리를 해야 할 타이밍이기도 했다.

“출발하기 전에 서울 근처에서 전부 모일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싶은데, 적당한 장소가 있을까?”

강찬이 고개를 돌려 던진 질문에 최종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군부대는 어떠십니까?”

“그런 곳 말고 좀 편한 장소. 가평에 닭 먹던 곳 같은 느낌이면 좋겠는데?”

“확인해 보겠습니다.”

전화기를 꺼낸 최종일은 국가정보원에 강찬의 요구를 전하고 장소를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

욕심이었다.

그냥 출발하기 전에 다 같이 얼굴 보며 편하게 저녁 먹었으면 싶었고, 지금도 앞뒤를 따르고 있는 무장 대원들이 하루만이라도 승합차를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5분쯤 뒤에 최종일의 전화기가 울렸고, 통화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사리에 있는 조정 경기장이 일몰 후에 모두 폐쇄된답니다. 차라리 그곳을 사용하시는 게 어떠냐고 합니다.”

“주변 시선은?”

“고층 건물이 없어서 앞쪽 산만 확인하면 안전도 확보할 수준이랍니다.”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으로 집결할 생각이십니까?”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싫을 수 있잖아. 나하고 기러기, 비무장왕이랑 남일규 선배 정도 모일까 하는 거지. 제라르도 있고.”

“그럼 저희는 안 되는 겁니까?”

최종일의 질문이 날아왔을 때는 조수석에 있던 우희승까지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왜 그래? 가족들도 생각해야지?”

“그게, 존경하는 인물이 바뀐 영향도 있습니다.”

“뭐야? 또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된 거야?”

강찬의 질문이 웃겼나 보다.

핸들을 잡은 이두희가 흐느끼는 것처럼 웃었는데, 그 순간 이상하게 다들 킬킬거리며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가족이 있는 사람은 안 되는 거로 해.”

“저희 집사람을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그런 자리 빠지면 집에서 내내 숨죽이며 있어야 합니다.”

이번엔 조수석의 우희승이 정말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서 웃었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외로운 기러기 석강호가 저녁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낙지에 무슨 한이 맺힌 놈처럼 역시나 저녁은 빨간 낙지볶음과 밥이었다.

“식어서 그런데 그냥 같이 비벼 먹읍시다.”

“그러자.”

강찬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석강호가 능숙하게 밥을 비볐다. 이어서 맛있게 저녁 먹었고, 편한 복장으로 탁자에 앉아 커피와 담배를 앞에 두었다.

“북한의 병력을 사용하는 건 어떻게 됐소?”

“그거야 공을 던져 놨으니까 저쪽에서 알아서 할 거다.”

석강호가 심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을 거요?”

“그렇겠지.”

이번엔 강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

고건우는 원산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섰다.

행정가였던 그가 국가정보원을 맡게 되면서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 과정을 통해 무엇보다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단연 담이 커졌다는 거였다.

그렇게 담이 커진 고건우지만, 평양 시내의 모습이 보이자 덜컥 강찬이 그리웠다.

어떤 순간에도 꺾이지 않는 남자,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 놓여도 반드시 돌파구를 찾는 강찬이 옆에 있다면 참 든든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주석궁의 뒤편으로 돈 승용차가 보조 건물 중 하나 앞에 멈췄다.

공산당 복장은 언제 봐도 위압감을 준다.

고건우는 속을 알기 어려운 덤덤한 표정을 하고 안내원을 따라 안으로 걸었다.

주석궁에 비해 겸손해 보이는 부속 건물의 현관을 지나자 이슬람 사원 양식인 듯한 기둥과 둥근 테두리들이 보였고, 곧바로 김정도와 박상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시라요.”

“반갑습니다.”

“이쪽은 아시지? 인민무력부장.”

“박상식입네다.”

“고건우요.”

반갑지 않은 악수를 나누는 동안 고건우는 상체를 숙이지 않았다. 눈과 눈이 똑바로 마주쳤을 때도 절대 피하지 않았다.

박상식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고건우를 살필 때,

“가자우.”

김정도가 두 사람을 재촉했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놓고 5분쯤 시간을 보낸 다음이었다.

“보라우, 원장. 우리 전사래 사망 시에 받는 돈이래 5천 불은 너무 헐값 아니야?”

하는 말로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10분쯤 지났을 때 고건우는 알 수 있었다.

김정도는 돈을 원하고, 박상식은 이 기회를 통해 미국과 영국, 중국, 일본의 시선을 돌렸으면 한다는 것을 말이다.

‘김정도 옆에 박상식이 오래 있는 것은 위험한데?’

불쑥 떠오른 생각이었는데, 고건우는 두 사람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문재현과 강찬을 생각해서 그랬다.

***

밤 10시쯤 되었을 때 제라르가 들어섰다.

“목 부러지겠다. 힘 좀 빼고 다녀라.”

“시끄러워! 돌대가리야.”

저런 한국말은 도대체 어떤 놈이 가르친 걸까?

“대장, 네로 기억합니까?”

탁자에 앉은 제라르가 프랑스어로 질문을 던지자 석강호가 재미없다는 얼굴로 커피 잔을 들었다.

“나중에 3구대장을 지냈던 놈인데, 대장 있을 때 제일 병아리였습니다. 프란다스의 개라고 불렸던 놈?”

“아! 그 멍멍이! 그놈은 왜?”

“이번에 그놈이 용병 지휘관을 맡을 것 같습니다.”

“뭐요? 뭔데 그렇게 웃어요?”

강찬은 석강호에게 방금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햐! 그 개새끼가 벌써 용병 지휘관을 할 정도가 됐나? 하긴, 이 새끼가 특수팀 사령관까지 했으니까, 뭐.”

“야!”

강찬은 픽 하고 웃으며 담배를 집어 들었다.

미쉘에게서 배워서인지 제라르가 따지는 소리는 어쩐지 예쁘장하게 들렸다. 아직 프랑스 말 억양이 남아 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놈이 프랑스 말을 지껄일 때면 엄청난 위압감을 팍팍 내뿜는 걸 보면 사람은 말하는 게 참 중요한 거다.

“미쉘은 어떻게 됐어?”

“스케줄 준비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세부적인 문제는 알아서 한다고 하구요.”

알아서 잘할 거다. 미쉘이라면.

“이번엔 분명하게 끝내자.”

강찬이 정리하듯 건넨 말에 석강호와 제라르가 다부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일어나 버릇처럼 물을 먼저 마시고 시원하게 씻었다. 수건을 목에 두른 강찬은 샤워실을 나서기 전에 세면대에 손을 걸치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잘할 수 있을까?

결과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만은 안다.

“쯧!”

강찬은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어떻게 움직일 거요?”

“용인에 들렀다가 저녁에 미사리 조정 경기장으로 움직여서 함께 있을까 하는데?”

출발을 하루 앞두었다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평범하게 시작한 하루였다.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아침을 먹을 때까지 그랬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그런데 젓가락을 막 집어 드는 순간에 강찬의 본능이 위험하다고 소리치는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왜 그러쇼?”

석강호가 가장 먼저 알아챘고, 그다음으로 제라르가 강찬의 눈빛이 변한 것을 알아보았다.

“뭔가 위험이 다가오는 모양인데 아직은 제대로 모르겠다. 일단 밥부터 먹자.”

“그럽시다.”

위험이 다가오는 느낌이라고 해서 밥 먹는 걸 거르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밥에 독이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심장의 울림은 식사를 마쳤을 때쯤 가라앉았다. 대신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어깨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좀 어떻소?”

“그냥 그래. 우리가 대놓고 움직인다고 떠들었으니까 저놈들도 엄청나게 준비하고 있겠지.”

“그럴 거요.”

강찬은 천천히 사무실을 둘러본 후에 다시 석강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다르미코프는?”

“동선 파악 중이요. 약아 빠진 새끼가 비슷하게 생긴 놈들을 여기저기 풀어놓은 바람에 잘못하면 여러 놈 잡게 생겼소.”

“우리 방식의 싸움이 아니니까 너무 급하게 달려들지 마.”

“얼른 끝내고 달려갈 테니까 대장이나 무리하지 마쇼.”

강찬이 피식 웃자 석강호가 히죽 웃었다.

사무실을 나선 강찬은 용인으로 움직였다.

계속 갇혀 있다시피 살아야 하는 강대경과 유혜숙이 원했던 일인데,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강찬이 보기에도 용인으로의 이사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얼핏 보면 용인 외곽에 흔히 보이는 닭백숙 집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집 양쪽을 들여다보는 야산만 제대로 지키면 입구가 외길이라 요원들도 오히려 편안하게 지낼 수 있어서 훨씬 좋았다.

앞쪽으로 산책로가 있고, 그 산책로 아래쪽이라 경계해야 할 부분이 적은 이점도 있었다.

차에서 내린 강찬을 맞아 준 사람은 차민정이었다.

“두 분은?”

“밭에 계십니다.”

최종일과 우희승, 이두희에게 짧은 눈인사를 전한 차민정이 입구를 도는 길을 따라 앞서 걸었다.

온다는 연락을 따로 하지 않았다.

용인이다. 그런데도 산을 거쳐 오는 바람이 좀 더 차게 느껴졌다.

허름한 복장에 모자와 수건까지 덮어쓴 강대경과 유혜숙은 자그마한 밭에 있었다. 차민정을 본 강대경이 먼저 시선을 돌렸고, 유혜숙이 살짝 늦게 고개를 돌렸다.

“저 왔어요!”

“왜 자꾸 연락을 안 하고 와?”

“두 분 번거롭게 해 드리기 싫어서요.”

옷을 털어 가며 다가온 강대경의 손을 잡았고, 유혜숙을 가볍게 안았다.

건강해 보이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강찬을 안아 주었던 유혜숙이 최종일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는 뒤를 살폈다.

“왜요?”

“제라르는? 오늘은 안 왔어?”

“오늘은 약속 있나 보던데요? 어? 서운한데요?”

“얘는! 지난번에 상추와 깻잎을 워낙 맛있게 먹어서 그게 생각나서 그랬어. 점심 먹고 가도 되지?”

“그러려구요.”

한두 번 함께 먹은 사이가 아닌 거다.

강대경과 이두희가 함께 불을 피웠고, 유혜숙과 차민정이 쌈 채소를 따느라 바빴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평상에서 삼겹살을 구워 다 같이 먹었다. 농사 실력이 늘었다느니, 다음에는 매실 나무를 좀 심어 봐야겠다는 대화들을 나누며 함께하는 식사였다.

어떤 일을 하는지 물어봐야 솔직하게 답하기 어려운 내용뿐이다. 그러니 이렇게 반갑게 얼굴 볼 때만이라도 평범하게 지내는 게 좋다고 여긴 뒤부터 쭉 그랬다.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할 때 강찬은 강대경과 함께 뒤쪽 개울을 향해 걸었다.

“외국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위험한 일이냐?”

“예.”

강찬이 바로 건넨 답에 고개를 돌린 강대경이 기가 막힌 것처럼 웃었다.

“아버지께는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서요.”

“앉자.”

손잡이까지 기계로 찍어 낸 듯한 얇은 플라스틱 의자다.

하얀색과 빨간색.

“얼마나 걸리니?”

“봐야 알 것 같은데, 한두 달은 걸리지 않을까 싶어요.”

“무사히 오는 거지?”

“그럼요.”

또 뻔뻔하게 답했다.

“이 녀석이!”

강대경이 강찬의 어깨를 부둥켜안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을 때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차가운 녹차를 들고 유혜숙이 다가왔고, 셋이서 그렇게 한 시간쯤 떠들었다.

녹색이 묻은 바람과 나뭇잎에 걸러진 햇볕이 나쁘지 않은 개천가에서였다.

“가 봐야겠어요.”

적당히 시간이 지났을 때 강찬이 일어섰고, 강대경과 유혜숙이 몸을 일으켰다.

“또 올게요. 건강 조심하세요.”

“조심해서 가, 아들. 사랑해.”

유혜숙을 안은 강찬의 시선에 강대경이 들어왔다.

걱정을 안타까움처럼 담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번이 끝이다.

돌아온다면, 다시 와서 이렇게 지낼 수 있다면, 그때는 늘 이렇게 살아갈 거다.

눈빛을 들키기 싫어서 웃는 얼굴로 몸을 세웠다.

출발하기 하루 전날, 점심을 막 지난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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