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출발은 이틀 뒤다 (2)
고건우를 맞은 문재현은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
북한군을 사용한다는 계획도 놀랍지만, 이미 강철규를 통해 인민무력부장과 통화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조차 어려운 표정이었다.
“이미 통보했다는 말입니까?”
“대통령님께서 허락하신 국가정보원 정보총국의 권한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대금 지급 방법과 북한의 도발 방지 대책, 마지막으로 우리가 요구하는 통제, 이 세 가지에 대해 북한의 답이 있으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정보총국도 이런 역할을 합니까?”
“중국에는 앞으로 허가 없이 넘어오는 어선을 무조건 격침하겠다는 경고까지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재현은 고개를 먼저 저었다.
“원장,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북한은 인권부터 무엇 하나 믿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거기에 북한의 병력을 사용하고, 그 대가로 대금을 지불한다고 하면……?”
문재현이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조용히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야당이 이 건을 부풀리면 정권 유지조차 어려운 일이 됩니다.”
“부원장도 그 정도는 짐작하는 눈치였습니다.”
고건우는 문재현의 반응이 어떨지를 익히 예상한 눈치였다.
“유라시아 철도와 차세대 발전 시설을 유치할 때와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 정권이 바뀌든, 표현은 죄송합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대통령님이나 저, 그리고 부원장 중 누군가 당한 뒤에 차례로 무너지든, 적들이 원하는 것을 기다리다가 당하는 건 아니라는 의견이었습니다.”
문재현은 말을 전하는 고건우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원산에 잠수함이 숨겨진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적의 도발은 충분히 감지되었습니다. 차세대 발전 시설의 스파이, 중국의 지진, 그리고 위성 신호 발생기가 그 증거입니다.”
“잠수함을 폭파시킨 것처럼 먼저 응징하자는 건가요?”
“중국과 프랑스를 돌려세우겠다는 의지입니다. 그 두 나라가 완전히 돌아서면 지금껏 우리를 지지해 왔던 독일과 스위스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입술에 힘을 꾹 준 것으로 문재현은 복잡한 심정을 표시했다.
“대통령님, 독일과 프랑스, 러시아, 중국의 정보국에서 부원장이 가져온 이득들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그들 정보국과 정보총국에 많은 것을 요구했는데 정작 부원장은 우리나라에서 행사할 권한이 없습니다.”
“원장, 이건 너무 큰 도박입니다. 정권이 흔들릴 일입니다. 언론이 어느 쪽으로 흐르느냐에 따라 걷잡지 못할 수도 있고, 돌이키지 못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염려하는 건 물러날 내가 아니라 바로 부원장의 미래입니다.”
전과 달리 문재현은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원장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러시아로 출발했습니다.”
“흠.”
문재현의 깊은 탄식이 한숨을 타고 쏟아졌다.
***
박상식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도 앞에서도 꼿꼿했다.
“니보라. 어케 들으면 지금 죽여 달라는 말로 들려.”
“지도자 동지의 판단이 기렇다면 기케 하시믄 됩네다.”
김정도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마주 앉은 박상식을 살폈다.
“원산에 잠수함을 받아들인 건 인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한 일이었어. 기걸 모르네?”
“남조선의 전사가 원하는 일 또한 인민을 위한 일입네다. 우리 충성스러운 군대가 아프리카에 나가서,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위엄을 보이며, 외화벌이까지 하는 일을 왜 마다합네까?”
“니보라우! 기딴 걸 위해 서해안을 내놓으라는 게 말이 되간? 로동호를 비롯한 미사일을 공동관리하면 어카겠다는 기야! 미제 자본의 괴뢰들이 남조선의 송금을 지켜보갔네! 생각이란 걸 좀 하라우! 생각을!”
버럭 지른 김정도의 고함이 쨍하고 집무실을 울렸다.
그러나 박상식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태도였다.
“미사일을 공동관리하믄 당장 일본은 물론이고, 자본주의 괴뢰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잖습네까? 기카고 지도자 동지도 남조선의 전사래 보셨디 않습네까?”
“내래 봤디.”
버럭 고함을 지른 직후다.
그런데 어쩐지 김정도의 음성에서 조금은 기운이 빠져나간 느낌의 답이 바로 나왔다.
“동무는 아예 목숨을 버렸구만.”
“지도자 동지께 이런 말을 하고 어케 무사하길 바라겠습네까?”
김정도의 나직한 숨소리가 그의 집무실을 울렸다.
“하나씩 짚자우. 우리 군대를 가져가고, 한 사람 당, 한 달에 백 불을 준다 기거지?”
“그렇습네다.”
탐이 나는지 김정도가 입맛을 다셨다.
“핵 시설과 미사일을 공동관리하고, 서해의 경비를 남조선에 맡기라는 기는?”
“중국이나 일본이 도발하믄, 남조선의 판단에 따라 가차 읍이 격침하겠다는 의도로 보입네다. 중국의 어선을 모조리 서해에서 밀어내갔다는 뜻도 있는 것으로 보입네다.”
“거참! 남조선 아새끼래! 살다가 중국을 협박하는 전사래 다 보누만! 이거이 진짜로 한다믄, 어케 발표하믄 좋겠나?”
“인민을 배불리! 이케 발표하믄서, 남조선과 함께 아프리카를 개척하는 위대한 혁명의 과업을 만들었다? 기케 발표하믄 어떻겠습네까?”
김정도가 뭔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박상식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말해 보라. 동무래 원산 경계를 소홀히 한 거이 있지? 안 그러네?”
박상식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남조선 전사래 휴전선을 뚫고 달려와 장광택이를 사살했어. 또다시 기런 일이 없다고 어케 믿갔네? 우리 군대가 모조리 빠져나가믄, 중국도 믿기 어려워. 남조선과 우리가 힘을 합치믄, 중국이나 미국이 가만있갔네?”
안에 꽁꽁 싸매 둔 것을 펼치듯이 김정도가 조용하게 털어 낸 질문이었다.
질문을 받은 박상식은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도 김정도는 정말이지 커다랗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
강찬은 막사 앞에 서서 낡은 활주로를 보며 바실리를 기다렸다.
햇볕도, 바람도, 다 같은 것일 텐데 이상하게 러시아와 중국, 한국에서 느끼는 것이 다르게 다가온다.
멀리서 자동차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며 강찬은 피식 웃었다.
기관총을 건 지프를 비롯해 무장 병력이 앞서고, 시커멓고 긴 승용차가 4대나 달려오고 있어서였다.
잠시 지켜보고 있는 동안 두 번째 승용차가 강찬 앞에 서더니 요원들이 쭉 둘러선 직후에 바실리가 내렸다.
대통령이 되더니 별 폼을 다 잡는다.
“위원장이 직접 와 줄 줄은 몰랐다.”
“대통령이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낫겠지.”
악수를 건넨 바실리가 막사로 강찬을 안내했다.
“편안하게 있자고.”
바의 안쪽으로 들어선 그는 탁탁 소리가 나도록 보드카와 잔, 그리고 홍차 잔, 재떨이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살다가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준비하는 홍차를 마시게 될 줄은 몰랐다.
“설마 주연 자리를 내놓겠다는 건 아니겠지?”
빤한 농담이다.
그리고 이런 농담에는 웃어 주는 게 예의인 거고.
강찬이 피식 웃는 것을 본 바실리가 테이블 아래에서 홍차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쪼로로로록.
미리 준비했던 모양인지 뜨거운 김과 함께 강한 홍차 향이 강찬에게 달려들었다.
“너무 급해. 좀 천천히 가자.”
“뭘?”
바실리는 강찬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눈매를 찡그린 뒤에 잔에 보드카를 따랐다.
“급한 마음은 이해한다. 그렇더라도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잖나. 거기에 너무 자극적인 부분도 있고. 아프리카에 병력을 넣겠다는 것은 세계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의도로 밖에 안 보여.”
바실리는 보드카를 훌쩍 들이켰고, 강찬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왜 이렇게 서둘러? 라노크나 양범이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주연이 너무 급하면 조연들이 그 뜻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강찬이 말이 없는 동안, 바실리는 또다시 잔을 채웠다.
“위원장이란 자리는 가끔 협상을 필요로 할 때도 있어. 너무 적과 아군을 가리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야.”
“대통령이 되더니 말이 많아졌어.”
“그런가? 요즘 워낙 내 말을 방송해 주는 곳이 많아서인지 늘긴 하는 것 같더군.”
특유의 차가운 웃음을 보인 바실리가 두 번째 보드카 잔을 털어 넣었다.
“이쯤에서 끝낼 생각이다. 지금 마무리 짓지 못하면 끝도 없는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할 테니까. 누군가의 희생을 지켜봐야 하는 것도 지겹고.”
바실리는 세 번째 잔을 채우고 병을 세워 놓았다.
“주연의 본능이 또 위기라고 말하는 모양이군.”
강찬은 어깨를 들썩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곳까지 온 이유는?”
“핵미사일.”
바실리의 표정이 한순간에 확 바뀌었다.
“약속되었던 것으로 아는데?”
“상황이 바뀐 것도 인정해야지. 지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투자를 선택했던 우리, 프랑스, 중국, 독일, 스위스는 완벽하게 패배자가 된다. 그리고…….”
바실리는 눈알 전체가 하얗게 보일 정도로 노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누구든 핵미사일을 발사하면 뒤는 돌이키지도 못해. 지진 따위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일이다.”
“왜 내가 핵을 발사할 거라고 단정 짓지?”
“지금껏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건 모르나?”
강찬의 질문을 바실리가 질문으로 되받았다.
그 직후였다.
“누구나 마찬가지군.”
강찬의 나직한 말이 나왔고, 바실리가 의아한 시선을 들었다.
“한국이 여기까지 온 것이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차세대 발전 시설이 있으니 적당히 얻어맞는 것쯤 참으란 거고, 잠수함의 위협을 이겨 냈으니 일단은 지켜보라는 거.”
바실리는 전혀 대꾸가 없었다.
“다들 하나씩 쥐고 있으면서 한국이 가지면 유독 위태로운 물건인 거지. 그 빌어먹을 핵미사일은.”
“꼭 그런 것은 아니잖나. 상황도 생각해야지.”
“상황? 잠수함을 6대나 준비시키고, 지진에, 아프리카에서 일본의 정보국 요원이 움직이는데 허울뿐인 위원장 자리를 주었으니 이제 좀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강찬은 오랜만에 피식하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동안 더럽게 안 맞는 옷 입고 너무 점잖은 체하면서 쓸데없이 묶여 살았다.
어쩐지 숨통이 턱턱 막히는데 이유를 모르겠더니, 바실리에게 말을 하면서 알게 된 느낌이었다.
“차세대 발전 시설보다 확실한 제안을 받았다면 러시아도 편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지. 정보국 위원회 자리를 물러나려면 언제고 말하라고 했었던 건 기억하겠지? 지금 물러난다.”
어쩐지 그동안 한 팀이던 조직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보 세계란 어차피 이런 거라고 들었다. 각자의 이익에 의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거 말이다.
“정보위원회, 프랑스 정보총국의 이름을 버리고도 지금처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나?”
홍차는 이미 식었고, 보드카는 향을 잃어 가고 있었다.
“지켜보면 알게 될 거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강찬은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들고 몸을 일으켰다. 활주로에서 기다리고 있는 비행기를 향해서였다.
국가정보원이 소유한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멈추면 모든 것을 잃는다. 결과가 나쁘게 나왔을 때 누군가는 차라리 처음부터 차세대 발전 시설 따위 욕심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비난할지 모를 일이었다.
재킷을 벗어 놓고 셔츠 차림으로 앉은 강찬은 창밖으로 펼쳐진 구름을 바라보았다.
석강호, 제라르가 맡은 역할을 해내느라 분주할 거고, 강철규와 남일규는 증평의 특수팀과 함께 아프리카로 향할 준비를 하느라 바쁠 일이었다.
1년 동안 정보위원회 위원장을 하며 알았다.
틈을 보이면 밟히고, 밟힌 뒤에는 처참하게 망가진다.
엎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는 인정 따위 기대하는 것이 정보국 세계에서는 더 큰 함정에 빠지는 짓인 거다.
대통령의 재가?
문재현이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강찬이 어떤 방법까지 동원하려고 하는지를 적에게 분명하게 보인 것으로 이건 남는 장사다.
적들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은 덤으로 얻는 일이고.
그동안 위원장 자리에 묶여 있었지만, 반대로 배운 것도 많았다. 반군만큼이나 정보국 세계의 생리가 어떤지 확실하게 익혔으니까.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강찬의 생각을 깨는 것처럼 전화기가 울어 댔다.
번호를 확인한 강찬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말해.”
[증평과 제라르, 사무실, 모두 준비 끝났소.]
강찬이 들고 있던 전화기에서 단단한 석강호의 음성이 넘어왔다.
“출발은 이틀 뒤다.”
[알았소.]
전화기를 내려놓은 강찬은 나직하게 숨을 뱉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